인체에 적용한다는 소리는 아닙니다?
나는 ‘3개의 역할을 가진 사람’이라 한다 했었다.
대학원생, 회사원, 그리고 학원 강사.
겉으로 보면 이 세 개는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연구실은 느리고 조심스럽고, 실험 하나를 정말 며칠씩 돌리기도 하고, 그렇게 돌린 것을 가차 없이 버릴 때도 많다. 그만큼 느리고 신중한 사회다. 반면 회사는 빠르고 계산적이며, 기한을 맞추고자 모두가 노력한다. 학원은 즉각적이고 감정적이다.
하지만 몇 년을 동시에 오가다 보니, 어느 순간 이상한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다-결국 모두가 조직이었다.
처음엔, 나는 내가 열심히 사는 줄 알았다. 내가 부족해서 힘들고, 내가 미숙해서 흔들리는 줄 알았다.
회의가 길어지면 내가 말주변이 부족한 것 같았고, 연구 중에 랩미팅하다 혼난다던가 정말 갈아엎기라도 하는 날이면 내가 능력이 모자란 것 같았고, 학원에서는 내가 더 잘 참고 중재했어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이상했다.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데, 등장인물만 바뀌고 구조는 그대로였다.
결정은 위에서 내려오고, 나는 그 결과를 전달받았다.
실행은 아래에서 떠안고, 책임은 모호하게 흩어졌다.
감정은 개인이 감당해야 했다. 가령, 학원에서 강의실을 뺏겼던 날처럼 말이다.
그때 처음 생각했다.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구조 아닐까?”
2. 좋은 사람들로만 구성되어도, 좋은 조직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경험한 조직들에는 대체로 ‘나쁜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다들 적극적이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왜 갈등은 반복되고, 왜 의사결정은 늘 비슷하게 꼬이고 제자리를 맴돌다가, 왜 누군가는 조용히 소진되어 사라질까.
어떤 조직은 성과를 내면서도 사람이 남고, 어떤 조직은 성과를 내도 사람이 남지 않는다.
그 차이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시스템과 문화, 그리고 소위 말하는 '불문율'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딘가에서 미팅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질문이 허용되는가.
실수를 공유해도 안전한가
정보가 투명하게 흐르는가
리더가 책임을 위로 가져가는가, 아래로 넘기는가.
사소하지만 조직마다 답이 극명하게 갈리는 질문들이다. 이런 작은 차이들이,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다른 결과를 만들고 나는 그 차이를 몸으로 배웠다.
3. 조직은 생각보다 나를 많이 바꾼다
조직은 단순히 일을 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 안에서 굴러지는(?) 사람을 조금씩 바꾼다.
빠른 조직에 있으면, 생각도 빨라진다. 위계가 강한 조직에 있으면, 말수가 줄어들고 괜히 위축된다.
피드백이 날카로운 곳에 있으면, 방어적으로 변한다. 안전한 조직에 있으면, 실험도해보고 의견도 보다 자유롭게 개진하게 된다.
나는 세 공간을 오가며, 공간마다, 조직마다 내 말투와 태도가 달라지고, 기대치가 달라지는 걸 느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이런 질문이 생겼다.
나는 조직에 적응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조직이 나를 재구성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지금 경험하는 조직들이 앞으로의 나를 만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단순히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조직을 관찰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회의에서 오가는 말들을 유심히 듣고, 의사결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기록하고, 누가 성장하는지 지켜봤다. 마라톤에서 페이서가 뛰는 건 계속하면서도, 본인이 이끄는 크루원들이 잘 따라오는지 보듯 말이다. 그리고 그 결과에, 나름대로 해석을 붙여가며 생각을 발전시켰다.
이 조직은 속도가 강점이지만, 안전이 약하다.
이 조직은 이상은 크지만, 실행 구조가 없다.
이 조직은 사람을 소모하지 않으려 하지만, 방향 결정이 느리고 결과물도 모호하다.
해부라는 단어는 조금 과격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느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조직도, 당장 별 탈 없이 굴러가는 듯한 조직도...조금만 들여다보면 내부 장기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어디가 막혀 있고 어디가 과부하인지 보이기 시작했다.
이 브런치북은 성공한 리더의 이야기나, 완성된 커리어의 회고록이 아니다. 아직 석사 ‘과정’ 중이고, 회사에서도 배워가는 위치에 있으며, 대형 학원의 강사인 것도 아니다. 어디에서도 완전히 중심에 서본 적은 없다.
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쓸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다.
아래에서 본 의사결정
실행자의 입장에서 느낀 구조의 모순
애매한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의 시선
조직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
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내 경험을 나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기록을 하기로 한 만큼, 하나의 경험을 꺼내 그 경험을 통해 조직을 해석하고,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선택을 했는지 말하는 방식으로 글을 남겨보려고 한다. 어차피 나의 3잡 인생과 연결되는 만큼, 새로운 브런치북이라는 형태로 말이다.
조직을 비난하려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고발하거나 악담할 생각도 없다. 알고 싶을 뿐이다.
어떤 조직은 왜 사람이 남고, 어떤 조직은 왜 사람이 떠나는지, 그리고 그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어쩌면 ‘조직 속에서 나를 잃지 않는 법’에 대한 기록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언젠가 내가 조직을 만드는 위치에 서게 된다면, 지금의 관찰들이 기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