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는 보셨는지..
처음엔 수업이 너무 조용해서였다.
칠판에 곱의 법칙과 합의 법칙을 써 놓고, 어떤 유형에 자주 쓰이는지와 그 차이를 설명하고 있었다.
애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눈은 이미 딴 데 가 있었다 - 그리고 나는 그 눈을 안다.
동태가 되지 못해 죽어 있는 듯한 눈.
그래서 말을 바꿨다.
“너희가 좋아하는 아이돌이 다섯 명인데, 팬싸에 세 명만 갈 수 있으면,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TMI : 실제 그룹과 멤버들을 갖다 비유했었는데 혹시 몰라 여기는 익명으로 쓴다.
그제야 판서 속 공식들이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날 처음 느꼈다. 수학이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이 애들한테 수학이 ‘낯선 언어’였을지도 모른다고.
번역이라는 일
교육열 높은 동네에서 자랐고, 강사 일은 전혀 다른 곳에서 하고 있지만 지역 불문하고 아이들은 수학을 싫어한다기보다 수학이 자기 언어가 아니라고 느끼는 것 같았다. 공식은 외워도, 문장을, 또 그 속에 담긴 출제자의 의도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번역을 시작했다.
함수는 “포카 수가 늘어남에 따라 나의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기록하는 그래프”로,
확률은 “나만의 연합 유닛 만들기 프로젝트"로,
경우의 수는 “콘서트 좌석 배치”로 말이다.
처음엔 장난처럼 시작했다. 비유만 저렇게 하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이들이 더 오래 기억했다. 공식보다 이야기로.
웃음은 신호다
수업 시간에 웃음이 터지면 나는 안심한다. 최소한 내 눈앞의 아이들이 지금 '이 시간을 꾸역꾸역 버티는 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물론 학원은, 또 이 시험의 나라에선 결국 성적이 중요하다. 대학원까지 온 입장에서 그건 너무나도 잘 안다. 하지만 또 아는 게 있다. 점수는 결과고, 수업은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과정이 싫으면, 의지로 버티는 건 한계가 있다. 그렇게 해서 올린 결과는 오래 가지 못한다.
그걸 여러 아이들을 보며 배웠고, 그래서 어떻게 해야 가랑비에 옷 젖듯 공부를 습관화하고, 조금이라도 재미있게 알려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시험의 나라에서
어떤 아이들은 중학생인데 이미 입시 전략을 안다. '못해도 서성한은 가야 해요'라고 얘기하고, 고등학생이 되면 수능 날짜를 세며 산다. 수학 문제 하나를 틀리면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저는 수학 머리가 아닌가 봐요.” "아 나는 (비속어)야" 등등.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조금씩 불편해진다.
수학 한 과목이 사람의 능력을 설명하는 나라에서, 나는 돈을 벌고 있다. 이 모순을 완전히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그래서 조금 이상하게 가르친다.
나는 완전히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다.
수능이나 모의고사 같은 제도를 없앨 수도 없고, 내신을 바꿀 수도 없다. 대신 나는 내 수업시간만큼은 아이들이 자기 자신을 문제와 동일시하지 않도록, 또 과목을 조금이라도 즐기는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버틴다.
“여기까지 이해했네. 마지막에 실수한 것 뿐이야, 너가 틀린 게 아니야.”
“공식 모를 수 있어. 그렇지만 어떻게 할지 생각은 해볼 수 있잖아?”
“수학은 계산보다 질문이 먼저야.”
이 말들이 점수를 올려주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이 수학을 자기 정체성과 분리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다.
나는 어떤 어른인가
가끔 묻는다.
나는 이 구조에 순응하는 어른인가, 아니면 아주 작은 균열을 내는 사람인가.
솔직히 말하면 둘 다다. 이 구조에 순응해 대학을 가고 대학원을 왔고, 이 구조로 돈을 번다. 하지만 동시에 시험을 대비시키면서 시험을 절대화하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모순적이다.
그래도 나는 이 모순을 안고 서 있으려고 한다. 웃으면서 말이다.
칠판 앞에서, 아이돌 이야기를 하면서, 수학은 결국 이해의 문제라고 믿고 싶어서.
그리고 이 아이들이 언젠가 시험이 끝난 뒤에도 스스로를 깎아내리거나 미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나는 여전히 수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사실은 다른 걸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에는 선택지가 생각보다 많다”는 것.
다음 글에서는 왜 ‘웃음’이 수업의 가장 중요한 신호인지에 대해 써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