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공간의 경계
벽화 그리면서 생각한 이야기
1. 계절의 국경 위
날씨가 너무 가파르게 추워진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옷을 선녀옷에 비유해서 천의무봉 - 하늘이 만든 옷처럼 바느질 자국이 없다 - 고 하는데, 요새 가을 겨울의 경계선은 무봉이라기엔 너무 경계가 뚜렷하다. 그저께부터가 이어 붙인 자국인 걸 나도 알고 내 콧구멍도 아는 것 같다. 콧물이 인중을 가르며 내려오기를 시도하는데, 마스크 때문에 공공장소에서 인공적인 처치는 다 무용지물이다. 월요일, 밖에서 유리벽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는 코를 연신 흠칫거리며 지금 선 곳이 계절의 국경인 걸까 하고 생각했다.
2. 국경 그리고 공간의 경계
우리나라는 삼면은 바다고 한 면은 북한과의 국경이라 국경을 넘나드는 것이 다소 낯설다. 지난번 김정은 국방위원장이 판문점을 넘어오는 것을 보며 다들 역사적 순간이라고 입을 모았다. 유럽은 좀 달라서 나라들이 땅과 땅을 맞대고 있어 서로의 국경을 넘기가 우리나라보다 쉽다. 10년 전 혼자 유럽에 갔을 때 스위스에서 택스 리펀(세금 환급) 받겠다고 바젤이었나 국경이 있는 도시를 간 적이 있었다. 담당자를 찾으려고 역 안을 왔다 갔다 했는데, 알고 보니 나는 독일과 스위스의 국경을 계속 넘나들고 있었다. 간판만 보고 다녔는데 바닥 타일에 국경 표시가 붙어있었다... 담당자가 와서 손짓하며 그곳은 독일이라고 말했다. 도장을 받고 돌아가며 우리나라 생각이 나서 뭔가 아찔했던 기억이 있다. 공간의 국경은 사람의 것이고, 내가 본 것들은 실선으로 명료하게 나뉘어 있었다.
아무튼 나는 독일과의 국경에서 발을 빼서 스위스로, 마침내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3. 공간 위에 시간이 더해진 국경
돌아와서 한동안은 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하고 다녔다. 실제로 유럽여행에서 스위스가 마지막 관광지인 사람들이 알아야 할 정보가 되기도 했다. 내 무용담에 친구들은 웃으면서 택스 리펀(돈)을 받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전쟁을 겪었던 어른들은 내가 무사히 돌아왔다고 안도하셨고 앞으로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그때는 웃고 말았는데, 한참 후에 드라마 도깨비에서 한 에피소드를 보고 그때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다.
드라마에는 저승사자가 운영하는 '망자의 찻집'이라는 공간이 나온다. 죽은 후 저승에 가기 전 들르는 곳이다. 이 에피소드에는 한국전쟁 시절 신혼 때 헤어져 죽은 후에야 다시 만난 이산 부부가 나온다.
공간 자체는 되돌아오는 것이 가능하지만 공간 위에 시간이 더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국경은 점차 진해지고 사람들은 기다리며 마음만 닳아간다. 그리워하는 것은 뒤에 있는데 기다릴 것은 앞으로 올 일뿐이라는 것이 이상하다. 시간은 꿰맨 자국도 없어서 바뀌는 줄 모르게 계절이 바뀌고 또 해가 바뀌고 그렇게 어제가 되고 오늘이 된다.
4. 다시 시간의 국경
월요일과 화요일, 수요일까지 정말 바빴다. 앞으로도 당분간 바쁠 예정이지만 좀 쉬어야 바쁠 힘도 생길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다. 콧구멍 때문에 마스크를 다시 쓰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침대에 가만 앉아서 시계가 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시계는 침으로 선을 그으며 새로운 경계를 만든다. 분침은 몇 번이나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온전히 같은 자리인 것은 아니다. 이렇게 보니 천의무봉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나고 보니 이은 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긴 망토처럼 이어 붙인 자국도 없이 이어 붙은 과거를 두르고 바늘은 자꾸자꾸 나아간다. 가만히 그그저께와 그저께, 어저께를 생각했다. 경계를 지나고 보니 시간이 국경보다 경계가 지엄해서 결코 돌아갈 수 없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