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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서공 Nov 22. 2022

EP 03: 향 Scent 香

[서촌 예찬] 차와 책과 커피와 향

[서촌 예찬] EP 03: 향 Scent 香

서촌 3년 차. 지낼수록 정이 들고, 발견할 매력은 많다. 서촌을 살아가는 일상에 대한 에세이.


내자상회

  비록 지금 환기도 잘 되지 않는 답답한 사무실 파티션 뒤에 숨어 퇴근을 간절히 기다리는 심정이라고 하더라도 한 번 상상이라도 해보자. 가로수와 기와가 있는 담벼락을 지나 사거리의 한 귀퉁이에는 새로생긴 커다란 카페가 있고 반대쪽으로는 사직동주민센터와 인왕산으로 통하는 오르막길이 있다. 오래된 순댓국집을 지나 올라가다 보면 나즈막한 한옥주택들이 이어지고 도자기 공방, 퀼트 공방, 향초 공방, 작은 갤러리까지 한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 길에서는 어떤 향이 날 것 같은가?

  향, Scent, 香 이라고 적어본 것은 특별한 이유는 없다. '향'이라고 한글자 쓰자니 허전한 것 같기도하고, 그럴듯하게 꾸며놓으면서도 강조하고 싶어 쓴 것이니 세종대왕님이 노할지언정 꾸밈이 있는 제목을 쓰고 싶었다. 같은 뜻이지만 말이 주는 어감이나 뉘앙스는 조금씩 다르다.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으로는 '향'은 딸기향, 바나나향 처럼 무언가 향기가 나는 제품들 그러니까 자연의 향기보다는 세제나 페브리즈 같은 것이 떠오른다. Scent는 영어라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향수, 캔들, 디퓨저의 향. 조말론처럼 흰색 배경에 금발머리 여성이 럭셔리한 자태로 있는 꽃, 파우더리, 머스크한 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香은 나그참파나 인센스 스틱의 절간이나 나무 향기가 떠오른다. 공통적으로는 그래도 '향'이란 긍정적인 뉘앙스가 강해서 대체로 '이 곳에서는 무언가 좋은 향이 난다' 고 하면 그 공간에 대한 이미지와 인상에도 큰 기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서촌으로 돌아와보면. 서촌 거리에서는 서촌 특유의 향이 난다. 봄에는 거리에 가득한 꽃과 햇살, 여름에는 긴긴 장마 속 비 냄새, 가을에 가면 쿰쿰한 은행 냄새, 겨울은 차가운 공기에 섞인 연말 냄새. 이런 계절의 향들이 보편적인 것이라면 서촌에서는 대체로 나무향과 페인트 냄새가 더해지는데, 낮은 한옥에서는 오래된 건물이나 나무에 베어진 향들이 나고, 늘 골목 한켠에서는 새로운 가게나 집들이 리모델링을 하고 있다. 실제로는 그렇다고 할 지언정, 상상 속의 거리는 어떤가. 거리를 걷더라도 어딘가 LP 판에서 은은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올 것 같고, 괜찮은 동네 서점에서 책을 하나 골라 아늑한 카페에 앉아 가득한 커피향을 맡으며 그 자체 만으로도 휴식이 될 시간을 보낼 것 같지 않은가. 사실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바람직하고 감사한 가게들이 서촌에도 있다. 

카페 베란다

  카페로 향하기 전에 서점이나 문구점에 들러보는 것이 좋다. 여행을 가더라도 동네에 특이한 서점이나 소품샵이 있다면 찾아보는 것 처럼 말이다. 사실 나는 책보다도 서점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 마치 작품보다 갤러리 그 자체가, 영화보다도 영화관이 좋은 것처럼. 그래서 취향으로 가득찬 공간을 만나면 반갑고 고맙고 설레인다. 누군가가 획일화 된 삶의 형태를 일정부분 포기하면서도 자신의 가치를 따라 서점을 만들어주었다는 사실이 고맙고, 나와 비슷한 취향으로 큐레이션 된 책장에서 생각지도 못한 책을 만나는 것이 설레인다. 동네 서점은 어느날 문득 생기고 어느날 문득 없어지기도 하지만, 오래오래 그 자리에 있어주었으면 한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서점들이 훨씬 많기 때문에 한 곳을 추천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는 것 같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서촌거리를 거닐다가 자연스럽게 마음에 드는 서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대형서점이 아닌 독립서점들, 예술관련 서적, 잡지 전문 서점 등 재미있는 테마의 서점들이 골목 마다 숨겨져있다. 힌트를 하나 주자면 골목의 이름을 딴 새로 생긴 작은 서점 하나가 어느 가정집 지하에 있는데, 귀여운 책갈피와 파우치를 주는 곳이 있다. 독서모임을 여는 서촌 이름을 딴 그 책방도 있는데, 주인장이 직접 고른 책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귀여운 소품이나 노트를 사서 끄적거리는 것, 서촌의 기억을 담을 포스트카드를 사고 싶다면 소품샵이나 문구점으로 향해보자. 연신 "귀여워~"를 연발하게 될 것이다. 아기자기한 스티커, 소품, 노트, 필기구라면 환장한다. 늘 열려 있는 곳은 아니고 주인장이 종종 휴가를 떠나는 아기자기한 문구점이 있다. 다이어리와 노트, 마스킹테이프는 갈 때마다 참새방앗간 처럼 하나씩 사게 된다. 티셔츠, 맨투맨, 후디, 에코백이 상당히 예쁘기도하고 서촌에서 파리의 정취를 느껴볼 수 있는 편집샵도 있다.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와 콜라보하여 다이어리꾸미기를 하고 싶어지는 문구점도 있다.  

  서촌의 서점, 소품샵, 문구점까지 들린 후에는 걸음을 총총 옮겨 카페로 향한다. 가정집을 개조한 카페, 한옥 카페, 다방과 카페의 경계에 있는 장소, 갤러리같은 카페, 인왕산 전망이 펼쳐지는 카페, 디저트가 맛있는 카페. 카페의 종류는 무궁무진하여 한 곳을 정할 수는 없다. 그저 그날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간다. 요즘 같이 살짝 쌀쌀해지는 가을날에는 따뜻한 라떼나, 카푸치노도 잘 어울리겠다. 문구점에서 사온 포스트카드를 열고 편지를 끄적거린다. 스케줄러나 다이어리를 펼쳐도 좋다. 특별한 말은 아니더라도 그냥 끄적임 그 자체가 여유가 된다. 그 순간의 향에 집중한다. 크게 쉼호흡하고, 한 글자 적어내리고, 괜히 창밖을 쳐다보기도하고, 코끝의 공기를 느껴볼 틈이 얼마나 있던가. 그럴 수 있는, 때때로 그렇게 해보고 싶은 서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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