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가울, 아빠와 책

by 최우주

최수일

내 이름은 최수일, 전라남도 신안군의 하의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하의도라는 섬은 작은 섬이 아니었다. 육지 사람들은 제주도가 아닌 이상 한수백 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서로 알고 지내며 살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 섬은 웅곡선착장이라는 곳에 내려서도 집까지 20분은 차를 타고 가야 할 만큼 꽤 큰 규모였다. 서울에서 목포까지 가려면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광주 시내를 한참 돌아 나주, 목포까지 간다. 그리고 목포 여객선 터미널에서 6시간은 배를 타고 들어간다. 그리고 아까 말했듯이 다시 차를 타고 20분을 가야 하는 오지에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도 전쟁의 여파가 있었는지, 농협 창고에는 ‘김일성을 때려잡자’라는 빨간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 집은 하의도의 마지막 선착장에 있었다. 그렇다. 집 대문을 나서면 아주 드넓은 서해 바다와 갯벌이 감싸 안고 있었다. 갯벌은 썰물일 때는 1km 정도 훤히 드러났다. 뻘밭 사이로 난 구멍을 파면 갯지렁이가 가득했고, 손가락만 한 게 들이 뻘 위를 스케이트 타듯 옆으로 지나갔다. 나는 갯지렁이의 목 부분을 낚싯바늘에 찔러 보이지 않게 만들고 대나무와 연결해서 낚시를 즐겼다. 대부분은 망둥어라 불리는 문저리가 많이 낚였지만, 운이 좋으면 우럭이나 도미도 낚을 수 있었다.


바닷물은 수문을 통하여 섬의 내부까지 연결되었다. 그 물줄기는 우리 집 위에 위치한 염전에 모세혈관처럼 뻗어 있었다. 그 혈관에 가득 찼던 바닷물이 찬란한 햇빛을 머금었다가 토해내면 하얀색 소금만 남았다.


우리 가족은 총 9명, 아들 4명에 딸 3명이었다. 방이 2개, 마루가 하나 있는 초가집에서 다 함께 살았다. 방 2개에 나눠서 생활한 것이 아니라 모두 한 방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모방은 아버지의 동생 가족이 살았다. 즉 15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비좁은 집에 웅크리고 살았던 것이다. 그마저도 마루는 점빵 역할을 했다. 물건을 목포에서 사 와 이 섬사람들에게 진열하고 판매했다. 슈퍼에서 볼 수 있는 생필품이나 과자 같은 먹거리로, 유통기한이 오래되어도 문제없는 것들만 팔았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 번씩 목포를 왕래하며 물건을 사 오고 팔기를 반복했다.


우리 집의 생업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바로 농사였다. 의외로 이 섬은 바닷일을 하는 사람보다 농사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만큼 섬이 크고 평지도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우리는 주로 고추와 고구마 등 밭작물을 중심으로 키웠고, 어머니는 그것을 시장에서 팔거나 다른 물건으로 바꿔 왔다.


나는 중·고등학교가 하나로 합쳐진 학교를 간신히 졸업했다. 형은 어릴 적 꿈이었던 해군에 입대했고, 나도 군에 입대할 시기가 되었다. 그런데 시력 문제로 군에 갈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야맹증이 있어 다른 친구들처럼 밖에 잘 나오지 못했고, 입대할 때쯤에는 급격한 시력 저하로 목포에서 맞춘 두꺼운 안경을 착용했다. 그래도 군대에서 고생하기보다는 빨리 사회에 나가 돈을 벌고 싶은 생각이 컸다. 이제는 식구들도 몸이 다 커져서 한 방에서 잠을 잘 수도 없었고, 모방에서도 전부 수용할 수 없었다. 몸과 마음이 다 자란 사람들은 빨리 자기 살길을 찾아야 했다.


나는 스무 살 겨울, 얼음보다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목포에 도착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부담은 부모님과 손잡고 나왔던 때와는 공기의 무게부터 달랐다. 학교를 갓 졸업한 키 작고 빼적마르고 시커먼 사내를 반기는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해 봄날, 지안의 소개로 목포 북항에 있는 농협 배에 짐을 싣는 일부터 시작했다. 주로 각 섬에 배달될 쌀을 분류하고 선적하는 일이었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창고에 쌓인 쌀을 수레에 싣고 배 안의 적재실로 옮겼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야맹증으로 인해 해가 떨어지면 일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남들은 낮과 상관없이 오히려 선선하다는 이유로 밤에 일하는 것이 낫다고 말했지만, 나는 밤이 창고에 쌓인 수많은 쌀 포대보다 더 보기 싫었다. 작업반장에게 야간 근무가 어렵겠다는 말을 전한 후, 숙소에 가서 낮과 밤과 상관없이 일할 수 있는 직업을 생각해 보았다.


“내일부터 나오지 마세요.”


다음 날 작업반장은 갑작스럽게 퇴사를 통보했다. 아무래도 야간작업이 어려운 탓에 그런 결정이 내려진 것 같았다. 오히려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실내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던 중, 목포 시내에서 학교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다음 달에 안성으로 일하러 가는데 생각 있으면 같이 가 보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 막노동은 못 해.”


친구는 내 사정을 듣고 야간작업이 없고 실내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겠다고 했다.


막 개발되기 시작한 안성 공도라는 낯선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부고속도로 안성 IC를 바로 돌아 나오면 있는 도시였다. 목포보다는 서울과 가까웠지만 풍경은 우리 섬처럼 논과 밭밖에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평야 사이로 뱀처럼 긴 비현실적인 콘크리트 도로가 가로질렀다. 이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역시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그러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공사장이 맞긴 했지만, 그 옆에 있는 식당에 취직하게 되었다. 함바집이라고 불리는 곳인데, 주변 공사장 인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다. 식당 일은 적성에 맞았다. 큰 힘을 쓰지 않아도 되고 무엇보다 밤늦게까지 실내에서 일할 수 있었다. 숙소는 바로 위층에 위치해 있어 퇴근길에 논두렁에 빠지는 일도 막을 수 있었다. 중학교 시절, 어두운 논길을 지나다가 발을 헛디뎌 수로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 이후 밤에 다니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 왔다. 다행히 목포 같은 도시는 밤에도 환한 가로등이 있어 그래도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공도 함바집에서 요리 실력을 쌓고 작지만 돈을 벌 수 있었다. 이 돈으로 좀 더 큰 도시로 나아가 식당을 차려 보겠다는 생각을 했다. 20대 후반, 구로공단 빵공장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소개받았다. 사실 20대 내내 연애조차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아가씨는 전라북도 정읍 출신이라고 했다. 전라도 출신이니 최소한 박정희나 전두환 같은 놈들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태어난 섬은 김대중 선생님이 태어난 곳이 아닌가. 여러모로 그 아가씨를 만나기 전부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앞으로 이룰 가정과 식당에 대해 상상했다.


“안녕하세요? 최수일이라고 합니다.”

“아, 네…”


그러나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첫 대화를 시작하고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나의 어린 시절과 목포, 안성에서 일했던 경험, 그리고 모은 돈으로 식당을 할 것이라는 계획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옥선 씨는 그러한 이야기도 별로 흥미 없어 보였다. 아니, 본래 살가운 성격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 기회가 아니면 결혼을 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끈질기게 설득했다.


1983년, 서울 청량리 명문예식장에서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약속대로 그동안 모은 돈으로 안양에 중국집을 개업했다. 안양까지 가게 된 이유는 함바집을 소개해 준 친구의 지인을 통해 아주 싼값에 인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업종이 중국집이었기 때문에 그대로 물려받기로 했다.


우주 엄마는 하루에도 세 번씩 짜장면을 먹었다. 그리고 식당을 한 것이 정말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산모를 위해 뭐라도 풍족하게 먹일 수 있었다. 우주 엄마도 산만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붙잡고 출산 전날까지 일을 했다.


드디어 1984년 3월, 우주가 태어났다. 나는 거의 하루 내내 산고를 겪은 산모를 위해 바깥에 나가 간식을 사러 나갔다. 빵과 우유, 그리고 여러 가지 음식을 양손 가득 들고 병원으로 가던 중 골목길에서 깡패를 만났다.


“야, 너 이리 와 봐.”

“저요?”

“그래,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있냐. 돈 좀 내놔.”


세 명의 험상궂은 깡패들이 나를 둘러싸고 돈을 요구했다. 돈이야 털어 주면 되지만 혹시나 상해를 입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산모와 아기를 위해 위기를 얼른 모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아들이 태어나서 산모에게 줄 음식을 사서 가는 길입니다. 돈은 드릴 테니 제발 지나가게 해 주세요.”


고개를 숙이고 간절히 빌었더니 그중 덩치가 가장 큰 놈이 말했다.


“그래. 그럼 그냥 가.”


병원에 도착해서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깡패를 만난 이야기를 우주 엄마에게 했더니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죽을 뻔했는데.


우리 가족은 1980년대 말까지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연고가 있다기보다는 가까운 친척이 살고 있는 곳으로 권유받아 이사했다. 봉천동에 살 때는 우주 엄마의 동생들과 함께 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작은아버지 식구들의 권유로 부천시에 이사하기로 결심했다. 작은아버지 가족은 어릴 때 하의도 초가집 모방에서 살던 식구들이다.


우리 네 식구는 비로소 이곳에서 새로운 식당을 하나 열게 되었다. 함바집에서 일했던 경험, 중국집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 누구나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분식을 하기로 했다. 우주 엄마의 의견에 따라 ‘곰분식’이라고 이름을 짓고, 드디어 나만의 가게를 제대로 운영해 본다는 생각에 설렜다.


우주 엄마는 주로 조리를 담당했고, 나는 배달을 했다. 중고 오토바이 가게에서 쥐색 오토바이를 하나 구입했다. 그리고 발밑에 끼울 수 있는 철가방 하나를 서울 경동시장에서 구매했다. 이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기도 하고 우주를 아침에 학교에 데려다주기도 했다.


우주는 굉장히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 오면 내가 주머니에서 꼬깃한 천 원짜리 한 장을 주었다. 배달을 위해 그릇에 랩을 싸고 있으면 옆에서 한참이나 그 광경을 지켜보기도 했다. 그리고 구름을 만들겠다며 엄마가 끓이고 있는 라면 냄비 위에서 수증기를 그릇에 담아 냉장고에 넣기도 했다. 물론 그것을 가만히 지켜볼 우주 엄마가 아니었다. 그렇게 혼나면서도 온갖 궁금한 것을 물어보거나 흥미를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나는 스무 살 이후로 공부를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시원하게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나는 책이 좋았다. 왜 좋은지 물어본다면 속 시원하게 답을 알려 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특히 친구네 집에서 보았던 ‘과학앨범’이라는 전집은 내가 가장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다. 친구 집을 놀러 가는 이유는 그 과학앨범을 읽기 위해서였다. 친구는 과학앨범에 충격적인 장면이 있다며 내게 이야기했다.


“너 이거 보면 계란 못 먹을걸?”


친구가 보여 준 장면은 계란에서 병아리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사진이었다. 심지어 그 사진 위에는 계란 안에서 어떻게 병아리로 성장하는지 차례차례 설명해 놓았다. 과연 그 사진을 보고 나니 계란을 입에 대기 싫어졌다. 그러다가 엄마가 준 찐 계란을 먹고 급체를 했다. 토하고 설사를 반복하면서 계란의 비릿한 냄새를 거부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엄마에게 과학앨범을 사 달라고 졸랐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전집의 가격은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엄마는 과학앨범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하면서도 크기는 두 배나 큰 ‘표준 백과사전’이라는 전집을 사 주었다. 꼭 과학적인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 건물, 인체 등 다양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토바이’는 ‘오-오토바이’처럼 우리가 실제로 말하지 않는 발음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항목은 ‘백화점’이었다. 백화점 그림은 실제 백화점 그림을 반으로 잘라 내부를 탐색하는 것처럼 구성되어 있었다. 마치 수박을 반으로, 또 반으로 잘라 내부를 보는 것 같았다. 그 내부에는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그리고 각 상점의 모습이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그 백화점은 지하철과 연결되었는지 지하에는 지하철역까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빼곡한 그림을 보면서 상점 하나하나,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신기하게도 그 상점에서 파는 상품이 달랐고 사람들의 표정도 개성 있었다.


하나 더 좋아하는 책이 있었다. 그 책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다룬 것이었는데, 그중 몸이 작아진 아이와 작은 쥐에 관한 이야기였다. 어느 날 마법으로 몸이 작아진 소년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작아져 있었고 아무리 엄마를 불러도 엄마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벽에 기대어 울고 있던 중, 벽에 난 조그마한 구멍 사이로 작은 쥐 한 마리를 발견했다. 몸이 커졌더라면 분명 징그러운 녀석이었을 텐데, 자신이 쥐와 같은 몸이 되니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졌다.


“너 왜 울고 있니? 우리 집에 와 볼래?”


그 작은 쥐는 구멍 사이로 난 자기 집 입구로 소년을 초대했다. 소년은 작은 쥐의 집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왜냐하면 너무나 훌륭하게 잘 꾸며져 있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엄마가 찾던 성냥갑은 침대가 되었고, 병뚜껑은 의자가 되었으며, 물컵은 훌륭한 탁자가 되어 있었다.


“침대 옆에 성냥을 대어 봐.”


작은 성냥 하나를 가지고 침대에 그으니 곧바로 불꽃이 튀었다. 작은 쥐는 재빨리 벽돌 조각으로 만든 벽난로에 불을 붙여 몸을 따뜻하게 했다.


소년과 작은쥐.png


“여기 있으니 너무 기분이 좋아.”


소년은 벽난로 앞에 솜뭉치로 만들어진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작은 쥐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낄낄 웃었다.


“차 한 잔 먹을래?”


귀한 손님에게만 준다는 코코아는 분명 엄마가 매일 밤마다 주던 것과 같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향과 맛은 작은 쥐의 집에서 먹는 것이 더 좋았다.


소년은 코코아를 마시고 쥐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니 몸이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나를 발견했다.


소년은 황급히 일어나 침대 밑 작은 쥐구멍을 확인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한 번 읽고, 두 번 읽고, 학교를 다녀오고, 밤에 잠을 잘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 스스로도 나 역시 몸이 작아져 작은 쥐 같은 친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바퀴벌레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이제는 제법 날씨가 차가워졌다. 책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우리 반에 나 말고도 여럿 있었다. 특히 까치울 국민학교부터 같이 넘어왔던 윤수 역시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친구는 특히 만화를 좋아했는데, 그 친구가 가져온 ‘만화 삼국지’는 반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나도 그 책이 읽고 싶어서 반을 돌아다니며 빌려 보았다. 물론 쉬는 시간마다 잠깐 읽었기 때문에 유비가 사방에 붙은 방을 확인하고 관우와 장비를 만나는 부분까지밖에 읽지 못하고 돌려주어야 했다. 나는 그 뒷부분이 매우 궁금했다.


나는 집에 있는 책만 읽었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사는 방법을 몰랐다. 친구는 까치울 사거리에 있는 까치울 서점에서 샀다고 했다. 문제는 책이 한 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권으로 되어 보였다는 점이었다.


나는 엄마보다는 아빠에게 부탁해 보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빠는 오토바이를 타고 많이 돌아다니니 책을 사 오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배달로 바쁘게 움직이는 아빠를 붙잡고 만화 삼국지 이야기를 했다.


“아빠, 친구들이 많이 보는 책이 있는데 삼국지 사 주세요.”


아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삼국지의 종류가 많을 텐데, 아들이 원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나는 배달을 다녀오는 오토바이 소리만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이 철가방만 내려놓고 고개를 푹 숙이면, 아빠는 다시 배달을 나섰다. 그렇게 세다섯 번 반복한 후 드디어 품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까끌하고 누런 서류 봉투가 나왔고, 그 봉투를 열어 보니 윤수가 가지고 있던 바로 그 ‘만화 삼국지’였다.


“와!!!!!!”


나는 그 자리에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아빠에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조리실 옆 살림방에 들어가 책을 펼쳤다. 방금 지은 밥처럼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고, 좋은 냄새가 감싸는 것 같았다. 내가 중단했던 부분을 정확히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읽는 것이 아까워서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읽기로 했다.


이야기는 여포와 동탁의 이야기에서 끝이 났다. 솔직히 더 읽고 싶었지만 다시 아빠에게 부탁하기가 어려웠다. 아빠는 그 책을 사기 위해 일부러 서점에 갔을 것이고, 혹시 시간에 쫓기다 사고라도 난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전집을 산다는 것은 매우 비싼 값이 될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만화 삼국지 1권을 여러 번 읽기로 했다. 작은 쥐와 소년의 이야기처럼 여러 번 읽는 것도 나름 재미있는 일이었다. 여러 번 읽다 보면 모르던 장면도 보이고, 혹시 성냥갑 침대가 아니라 아빠가 피우던 담뱃갑 침대라면 어떨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혹시나 그 작은 쥐가 해 주는 이야기가 삼국지보다 더 재미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요일 연재
이전 09화1991년, 가을 : 호렙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