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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필재 Aug 31. 2020

12. 촌지를 받지 않겠다는 초심  

고스톱, 사우나, 보신탕 3종 세트,  촌지는 선배가 내는 문화 하부구조

“서울 지하철역사의 엘리베이터는 노약자용입니다. 노약자용인 만큼 운행 속도가 너무 빠르면 안 되고, 운행 구간 자체가 짧아 빨라 봤자 잘 체감이 안 되죠. 당초 구매하겠다고 결재 올린 기종 대신 저속의 기종으로 바꾸라고 해 예산을 대폭 절감했어요.”  

 이명박 서울시장은 “CEO 시장은 뭐가 다르냐”는 나의 질문에 “비용 마인드가 다르다”며 서울 지하철역사에 엘리베이터를 놓을 때 자신이 한 의사결정을 예로 들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했다.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도 그는 CEO 대통령을 부르짖었지만 대통령은 경제적 접근을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는 한나라당 대표 시절, 고 노무현 대통형과는 대통령 후보 시절 인터뷰했다.

 나는 훗날 대통령이 된 이들 세 정치인과 인터뷰했다. 박근혜 당 대표의 경우 인터뷰를 거절당한 후 “커버 스토리라 사진은 꼭 찍어야 한다”고 우겨 사진기자와 당사로 갔다. 어렵사리 기사에 쓸 사진만 찍기로 했었다. 사진 찍는 동안 옆에서 한두 가지 질문을 던진 후 그러지 말고 전화 인터뷰라도 하자고 했더니 박 대표가 저녁에 전화를 하겠다고 했다. 긴가민가하며 회사로 돌아왔는데 그가 전화를 걸어와 40분가량 통화했다.  

 고 김대중 대통령은 청와대 내외신 기자회견에 참여해 만나 봤다. 기자회견장 통로 옆자리에 앉으려 하자 청와대 직원이 질문자 석이니 옮겨달라고 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마치고 나오는 길에 마주친 김성훈 당시 농림부 장관에게 “정치부 기자들이 청와대를 출입해 질문이 정치 문제에 편중된다”고 했더니 그도 수긍했다.     

 나는 7년 전 첫 직장인 신문사에서 정년퇴직한 후 두 경제 주간지에서 인터뷰 전문기자로 일했다. 주로 인터뷰 기사를 쓴 기간까지 합치면 10여 년 간 인터뷰어로 살았다. 기자 생활 하는 동안 전현직 장관 30여 명, CEO 약 350명과 인터뷰했다. 하루에 장관 두 사람과 인터뷰한 일도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이는 남승우 풀무원재단 상근고문이다. 그는 명문 경복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지만 사법시험에서 네 번 떨어졌다. 현대건설에 들어가 도피하듯 해외현장인 사우디아라비아로 떠났다. 귀국 후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때 반장 원혜영 전 의원의 권유로 풀무원에 투자했다. 당시 시국사범이었던 원 의원이 풀무원농장을 차린 사회운동가 고 원경선의 아들이다. 친구 따라 강남에 갔는데 정작 친구는 정치에 뛰어들었다. 낮엔 현대건설, 밤엔 풀무원 사람으로 살다 현대건설을 그만두고 전업으로 풀무원 경영을 떠맡았다. 국내 첫 생식품 기업인 풀무원을 경영하느라 일본 회사들을 벤치마킹하는 한편 식품공학을 공부했다. 식품공학 석사를 마친 후 교수들의 권유로 식품생물공학 박사학위도 땄다. 법대 출신 공학박사가 된 것이다. 

 그의 서울 법대 동기 중 현역은 이낙연 민주당 대표 정도이다. 7선의 선출직 공직을 지냈고 21대 국회의장이 유력했던 원 전 의원도 20대 국회를 마지막으로 정계 은퇴했다. 오너가 좋은 점은 은퇴 시점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65세에 전문경영인에게 경영권을 넘겼지만 여전히 풀무원 오너이다.

 외교학과에 가고 싶었던 그가 법대에 진학한 건 고등학교 때 성적이 썩 좋았기 때문이었다. 현대건설에 들어간 건 사법시험에 낙방한 탓이었다. 현대건설에서 별을 달 줄 알았다는 그가 사표를 던진 건 물정 모르고 풀무원에 투자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경영을 맡았기에 풀무원은 소비자들이 신뢰하는 브랜드 밸류 높은 기업이 됐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는 ‘수영장 이론’이다. 어쩌다 수영장 옆을 지나다 떠밀려 물에 빠지면 생존형 수영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공 선택, 직업·직장의 결정, 배우자 선택 같은 인생 결정이 그렇게 필연적이지 않다는 이야기다. 은퇴를 앞두고 나와 마지막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글로벌 기업 CEO들이 대부분 65세에 은퇴합니다. 열정도 기민성·기억력도 떨어져 은퇴하기에 적당한 나이죠. 정치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CEO는 과중한 업무량 때문에도 더 하기 어려워요.”

 중앙일보 시절 나는 신문에 근무하다 사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로 파견을 나갔다. 1년만 가 있으라던 편집국장은 회사를 떠났고 나는 신문으로 돌아갈 기회를 잃었다. 내가 훗날 짧게 편집장을 지낸 이코노미스트엔 주간과 편집장이 인터뷰어를 맡은 고정난이 있었다. 인터뷰이 섭외부터 인터뷰용 질문서 및 기사 작성까지 인터뷰 진행을 제외한 나머지 전 과정을 담당하는 기자의 바이라인은 정리 기자라고 나갔다. 그래서 기자들이 이 일을 잘 맡으려 들지 않았다. 그런데 주간과 편집장이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밸류가 높은 사람들이었다. 쭐래쭐래 따라다니다 보니 인터뷰 좀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인터뷰의 주인공은 인터뷰이이지만 인터뷰의 주도권은 인터뷰어가 행사해야 한다. 

 인터뷰어로서의 성가는 인터뷰 강의로도 이어졌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수습기자 위탁교육 인터뷰 강사를 했고, 파이낸셜뉴스 창간 당시엔 전 편집국원을 대상으로 인터뷰 특강을 했다. 

 최단명 편집장에 그친 후 다시 기자 성명 주도로 보직에서 멀어지고 나서는 정년 때까지 기사를 썼다. 나는 기사만 쓰는 시니어로서 전범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정년을 앞뒀을 땐 박근혜 정부 첫 내각의 장관 여덟 명과 릴레이 인터뷰를 했다. 아홉 권의 졸저는 대부분 기획 인터뷰 시리즈를 단행본으로 엮은 인터뷰집이다. 

 인터뷰라는 장르는 적성에도 잘 맞았다. 호기심 부족 등 기자로서의 여러 약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상대가 누구든 위축되지 않았다. 그 덕에 평기자 시절부터 장관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어로서의 나의 강점은 섭외력이다. 섭외는 인터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70%라고 할 만큼 압도적으로 중요하다. 아무나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기삿거리가 아니다. 누구도 못 만나는 사람이 기사다. 나는 기자로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과 처음 인터뷰했다.

 외환위기 당시 경제 사령탑이었던 강경식 전 경제부총리와 퇴임 후에 인터뷰했을 때의 일이다. 공세적으로 질문을 던지자 그가 인터뷰를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어본다고 다 쓰는 건 아니라고 했지만 그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기사의 초고를 보내겠다고 얘기해 겨우 인터뷰를 마쳤고 약속대로 초고를 보냈다. 그가 빨간 플러스펜으로 기사를 딸기밭으로 만들어 다시 보냈다. 기자가 기사화되기 전에 초고를 보내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보신탕은 고스톱, 사우나와 더불어 기자들의 3종 세트였다. 촌지는 밥값, 술값을 선배들이 내는 언론사 문화의 하부구조였다.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 나는 촌지를 받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잘나가는 기자는 내 의지만으로 안 되지만 깨끗한 기자는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자 생활하는 동안 이 결심을 지켰다. 그러느라 여러 번 실랑이를 했다. 모 공사에 출입할 때의 일이다. 사장이 출입기자들에게 저녁을 산 후 노래방 노래값이라고 하면서 봉투를 돌렸다. 사장이 자리를 떠난 후 홍보실장에게 돌려줬다. 사장이 준 봉투를 무심히 돌려받고 난감했던 그는 그날 밤 집 앞까지 쫓아와 한사코 다시 주려 들었다. 그의 입장을 모르지 않았지만 한마디 했다. 

“기어코 이 봉투를 주겠다면 내일 사장실에 가 면전에서 뿌리겠습니다.”   

 IMF 체제 당시 몰락한 한 모 재벌 회장은 봉투에 넣지도 않은 은행 띠지 두른 지폐 다발을 안주머니에서 꺼내 건넸다. 나는 “젊은 놈이 생긴 대로 살도록 내버려둬 달라”고 말했다. 앞서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는 기사가 나간 후 나를 불러 근래 자기 그룹을 다룬 기사 중 자신의 의중을 가장 잘 짚었다고 얘기했다.  

 고교 선배였던 모 장관은 인터뷰 전 집무실로 불러 “몇 회야” 하고 물은 후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호기롭게 거절했다. 내가 인터뷰한 모 중견 기업 오너 회장도 고교 24년 선배였다. 그 회사 로비에서 처음 마주쳤을 때 나는 쫓아가 대뜸 “형님”이라고 불렀다. 흘끗 쳐다보는 그에게 나는 “저도 효령대군 19대 손”이라고 얘기했다. 나는 그의 경영론을 중앙선데이에 3회에 걸쳐 연재했다. 마지막 취재 후 그와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봉투를 내밀기에 거절했더니 그가 말했다. 

“자네는 형님이 주는 것도 안 받나?” 

 일단 받은 후 부회장인 딸에게 돌려줬다. 내가 제의받은 촌지 중 가장 거액이었다. 

“죄송하지만, 회장님이 주신 것을 제가 돌려받을 순 없습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럼 다 우리 회사 잘 되라고 주신 걸 테니 그 돈으로 정기구독을 하시죠.”

 나의 연조에서 촌지를 받은 적이 없다면 거의 천연기념물이다. 촌지는 밥값·술값을 선배들이 내는 언론사 문화를 지탱하는 하부구조이기도 했다. 그 시대 기자들은 고스톱, 사우나, 보신탕을 즐겼다. 3종 세트라고 할 만했다. 나는 이 세 가지를 다 하지 않는다. 보신탕은 한 번 먹어 본 일이 있다. 초년생 시절 출입처를 옮기게 돼 같이 출입하던 선배들과 회식을 했다. 나에게 묻지도 않고 보신탕집으로 향했다. 속으로 ‘도둑질 말고는 다 해보라고 했지’ 하고 한 점 입에 넣었다. 내키지 않는 음식을 먹으려니 맛이 안 느껴졌다. ‘얼마나 살겠다고 당기지 않는 음식을 먹나.’ 더 이상 먹지 않았다. 그 후로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나는 58년 개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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