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석주 Jan 12. 2019

당신의 가족은 안녕하신가요

당신의 이십 대는 안녕하신가요

강박적인 사랑보다 느슨한 방임이 더 나으려나

지금에 와서야 생각해보건대, 가족만큼 폭력적인 집단이 있나 싶다. 바닷물 같은 양수 속에서 제 어미를 고통스럽게 만든 나의 발길질을 생각한다면, 애초에 가족이라는 구성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럼에도 가정에는 늘 평화가 깃들어야 한다. 이 평화는 폭력적이지 않은, 화목한 가정을 뜻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예컨대 금실 좋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매일 밤 서로를 달래주는 키스를 하고, 긴 식탁에서 서로의 일과를 보고하며 웃음이 끊이질 않는 모습. 그리고 그런 모습을 보며 자식인 나는 철없는 목소리로 그 날 있었던 일을 자랑스러운 설화처럼 얘기하는 풍경. 뭐 그런 게 아닐까. 물론 이는 내 생각이 아니라, 통념이 그렇다.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고, 모든 이의 희망이 투영된 일종의 허상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문제는 늘 그렇듯 나의 가정은 이런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게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각각 다르다’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위화감 느껴지게 다가올 정도로, 나의 가족은 클리셰 덩어리였다. 뻔하다. 허름한 집, 한 때 잘 나갔던 자신을 곱씹으며 도박 혹은 술에 미쳐 사는 아버지, 결혼 전에는 누구보다 매혹적이었으나 남편을 잘못 만나 신세를 조졌다 생각하는 어머니, 불행한 그들 밑에서 성년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나. 이보다 완벽한 불행 클리셰를 가진 가족이 어디 있을까.


그런 그들은 나에게 무한한 사랑을 베풀었다 자부한다.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다 사줬고,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먹여줬다. 그게 그들의 사랑이었다. 그들도 부모가 처음이라, 그들도 자식을 가져본 게 처음이라 그랬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대단히 폭력적이었다. 본인들이 주고 싶어 하는 형태의 사랑만 주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았을까.  그 강박적인 사랑은 나를 끊임없이 토막 냈고, 나의 십 대는 목줄에 묶여 산책하는 개 마냥 지나갔다.


좋은 가족은 산타클로스 같아


이십 대가 되고 나서 뼛속 깊숙이 새긴 말 중 하나가 바로 '가족을 갖지 말자'였다. 누군가에게 내 모든 것을 내보이는 것, 그건 정말 할 짓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내 퍼스널 스페이스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 내 비밀들을 모두 알아버릴 것만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가족 아닌가. 난 그런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가정을 꾸릴 자신이 없었다.


좋지 않은 가정에서 자란 내가, 내 가족 구성원이 될 누군가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는 좋은 가족을 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좋은 가족이란 산타클로스와도 같았다. 분명 입방아에 오르내리는데, 그리고 종종 본 사람도 있다고들 하는데, 실존의 근거는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허상이라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러니 좋은 가족을 꾸리는 것이란 나에게 택도 없는 일이었고, 그러니 차라리 가족을 꾸리는 것을 체념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의 세뱃돈은 안녕하신가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