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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석주 Feb 27. 2019

무화과 숲

초단편소설

감정이랑 당연하다는 말은 너무 어색하잖아. 당연한 감정.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러니까, 감정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고 하는 게 맞지.

선배는 술버릇으로 이런 말을 즐겨했다.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선배는 말과 말 사이의 어색함을 누구보다 잘 발견하고, 그걸 자랑처럼 늘어놓는 걸 즐겨했다. 선배의 이런 말을 싫어하는 사람은 부지기수였지만, 나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나와 선배는 같은 시 낭독 동아리였다. 이름만 시 낭독 동아리였지, 우리는 아무거나 다 낭독했다. 시도 좋았고, 소설의 한 구절도 좋았고, 에세이의 한 문단도 좋았다. 심지어 교양서적의 한 문장도 괜찮았다. 그저 우리가 읽었던, 혹은 읽고 있는 책 중에서 그럴싸한 문장을 낭독했을 뿐이었다. 매주 수요일 6교시가 끝나고, 우리는 지하에 있는 미술실에서 만났다. 미술실에는 오래된 석고상이니 해진 그림이니 하는 것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어, 꽤 음침했다. 그나마 오후에 만나서 다행이지, 해가 지고 여기서 만났으면 귀신도 한 번쯤은 봤을 듯싶었다. 입시에 별 도움도 되지 않는, 그래 봐야 국문과나 문창과 같은 곳을 지원할 때나 유의미한 동아리여서, 선생님들은 우리에게 따로 교실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옛날에 해체된 미술부가 비워둔 미술실에서 만났다.
나는 문학을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책을 즐겨 읽지도 않았다. 활자라고 해봐야 공부할 때 읽는 것만으로도 버거웠고, 굳이 내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더 많은 활자를 읽고 싶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도, 꼭 마음에 드는 시가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황인찬의 『무화과 숲』이었다. 언젠가 스쳐 지나가며 읽었던 이 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나는 들고 다니던 영어 단어장 한 편에 이 시를 써놓았다. 단어장을 보며 걷다 기분이 꿀꿀해지거나 단어가 요란해져 눈에 들어오지 않으면, 나는 이 시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읽었다. 그러면 기분은 차분해졌고, 단어는 다시 올바르게 정돈돼서 한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단어장을 보지 않고도 시를 읊을 수 있을 때 즈음, 나는 학년 대표로 상을 탔다. 자신이 좋아하는 문학작품을 읽고 감상평을 쓰는 글쓰기 대회였는데, 이 시에 대한 느낌을 써서 상을 받았다. 덕분에 학교 신문에 내가 쓴 글이 올라갔는데, 선배는 그 글을 보고 나한테 찾아왔다. 황인찬을 좋아하는 사람은 진정한 문학인이라며, 뭘 좀 아는 사람이라며, 나에게 시 낭독 동아리에 가입하라고 했다. 나는 이 시만 좋아한다고, 문학에 대해선 문외한이라며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선배는 매번 쉬는 시간마다 교실에 찾아와 나를 설득했다. 2학년 교실에 웬 3학년이 쉬는 시간마다 오니, 반 애들도 불편한 듯 나와 선배에게 눈치를 줬다. 그럼에도 선배는 집요했다. 수업 종료 종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 교실로 달려와 내 자리 앞에 쪼그려 앉아 천진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야, 들어와라 진짜, 너는 그냥 그 시만 낭독해도 돼, 그냥 들어오기만 해라. 처음에는 싫다고 소리라도 칠까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선배 얼굴에는 뭔지 모를 기운 같은 게 있었다. 도저히 쓴소리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그런 기운이. 결국 나는 못 이기는 척 동아리에 가입했다.

술에 취한 선배를 챙기는 건, 매번 내 몫이었다. 우리가 살던 지방에서 운영하는 학사에 같이 살아, 나는 항상 취한 선배를 택시에 밀어 넣고 우리가 사는 학사로 갔다.
그날도, 선배는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 혼자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선배의 동기들은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나를 불러내 선배를 부탁했다. 나는 알겠다며, 어김없이 선배를 택시에 밀어 넣고 XX학사요,라고 기사님께 말했다.

- 어, 뭐야. 너냐? 흐흐. 매번 미안하다. 아 빨리 내가 연애를 하든, 네가 연애를 하든 해야 네가 좀 편해질 텐데.

- 괜찮아요.

- 하긴 이 새끼 덩치는 알아주지. 덩치는 곰 같이 커가지고는. 진짜 여자 친구 안 사귀냐? 요즘 그 뭐야, 그래. 조진웅! 그런 스타일 먹어주잖아. 소개팅이라도 어떻게 잡아줘?

아, 곰이라. 언젠가 낭독 시간에, 선배는 웬일로 소설 한 구절을 가져왔다. 매번 시를 가져오던 양반이 소설 구절을 가져와 모두가 의아해했다. 그 소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였다.


“네가 너무 좋아, 미도리.”
“얼마만큼 좋아?”
“봄철의 곰만큼.”
“봄철의 곰?” 하고 미도리가 또 얼굴을 들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봄철의 곰이라니?”
“봄철의 들판을 네가 혼자 거닐고 있으면 말이지, 저쪽에서 벨벳 같이 털이 부드럽고 눈이 똘망똘망한 새끼곰이 다가오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러는 거야. ‘안녕하세요, 아가씨. 나와 함께 뒹굴기 안 하겠어요?’ 하고, 그래서 너와 새끼곰은 부둥켜안고 클로버가 무성한 언덕을 데굴데굴 구르면서 온종일 노는 거야. 그거 참 멋지지?”
“정말 멋져.”
“그만큼 네가 좋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가슴이 쿵쿵거렸다. 낭독하는 내내, 선배의 풍경은 이리저리 뒤섞여 추상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듯했다.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그건 완연한 봄의 느낌이었다. 그 완연한 봄기운 가운데 서있는 건, 곰 한 마리와 선배겠지. 그 풍경은 정말이지 황홀했다.
낭독이 끝나고, 선배는 쑥스러운 듯 괜스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다른 부원들은 무슨 소설이냐며, 표현이 참 예쁘다고 말했다. 그러자 선배가, 무슨 학생이 하루키도 모르냐며, 윽박을 질렀다. 다들 알만한 작품을 가져와 읽은 건데, 이것도 모르면 어떡하냐며. 갑자기 선배가 내 쪽으로 고개를 획 돌려, 야 너는 알지,라고 물었다. 나는 머뭇거리며 고개를 살짝 까닥거렸고,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선배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에게 조용히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러고 자신은, 만약 나중에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이렇게 말해줄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모임이 끝나고, 나는 야자를 하지 않고 조퇴를 했다. 그리곤 서점으로 달려가 『상실의 시대』를 집어 들고 그 구절을 찾아댔다. 거짓말을 한 탓에, 그 구절이 어디쯤에 있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 자리에 서서 빠르게 책을 읽어갔고, 세 시간 정도 읽고 나서야 그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미친 듯이 그 구절을 찾아서, 기어코 찾아내 읽어냈건만, 아까의 그 감흥을 받을 수 없었다. 대신 와타나베가 무슨 연유에서 그런 말을 했고, 미도리가 어떤 이유에서 멋지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건,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의 암호 였던 것이었다. 서로의 마음을 활짝 보여주는, 감정을 열어재끼는, 그런 암호.
그때부터, 나의 단어장에는 『무화과 숲』 대신, 저 구절이 적혀있었다. 단어장을 보지 않고 저 구절을 읊을 수 있을 때 즈음, 선배는 수능을 봤다. 평소보다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성적이 나왔고, 선배는 원하는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선배가 간 대학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진학을 핑계로, 한창 새내기 생활을 즐기고 있을 선배에게 나는 계속해서 연락을 했다. 종종 선배가 고향에 온다고 하면, 나는 악착 같이 캠퍼스 라이프에 대해 알려달라고 떼를 써서 선배를 만나 시간을 보냈다. 그럼 선배는 너 때문에 친구들을 못 만난다고 투덜거리다가도 나를 만나줬다. 선배는 엠티에 다녀온 얘기, 중간고사에서 컨닝한 사람을 본 얘기, 생각보다 대학의 인간생활이 어렵다는 얘기 같은 걸 했다. 나는 선배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얘기를 들어만 줬다.
나는 목표한 대로 선배가 있는 대학에 붙게 되었다. 선배는 축하한다며, 이제 같은 대학생이냐며 낄낄 대며 축하해줬다. 선배는 다음 학기 휴학 예정이어서, 나는 새내기여서, 생각보다 붙어 다니는 시간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떻게 해서든 선배를 따라다니며 선배의 동기들과도 친해졌고, 선배의 술버릇 같은 것도 알게 되었다. 선배를 이루는 어떤 속성들을 하나씩 알 때마다, 예전에 본 그 풍경이 눈앞에 휘몰아쳤다. 완연한 봄기운, 선배와 곰 한 마리. 그 풍경은 점점 구체적인 어떤 것으로 변모해갔다. 신기하게도 그것이 선명해지면 해질수록, 선배와 곰 한 마리 사이의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이다. 둘이 부둥켜안고 뒹굴기는커녕, 둘 사이에 보이지 않는 경계 같은 게 있어 도저히 그 경계를 넘어가지를 않았다. 그리고 그 경계는 종잡을 수 없이 커져, 어느 순간부터는 각각의 형체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택시에서 내려, 조금 산책을 하다 들어가기로 했다. 벚꽃은 이미 지고, 그 시체들만 나무 밑에 수북했다. 그럼에도, 봄기운은 충만했다. 밤이라 기온이 맞아떨어져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 건지.
우리는 떨어져 걸었다. 그러기로 합의한 것도 아닌데, 자연스레 떨어져 걸었다. 나는 선배의 술버릇을 떠올렸다. 그래, 어색한 단어 짝 중에 제일 어색한 건, 선배와 곰이지 않을까. 선배와 곰은 어울릴 수 없지 아닐까. 그 클로버 무성한 언덕을, 같이 노닐며 뒹굴 수 없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본 그 풍경도 사실, 무화과 숲인지 몰라. 그러니까 선배는 그 숲에서 나온 적이 없는 거야. 그 무화과 숲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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