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십 대는 안녕하신가요
내 버킷리스트 중 하나는, 영화관 알바를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이것만큼 이십 대의 정취를 잘 느낄 수 있는 알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니까 청춘이고, 전 재산을 바쳐서라도 사고 싶은 청춘이니, 그 청춘의 초입을 느끼고 싶었다.
영화관 알바는 생각보다 힘들었고 기대한 만큼 재밌었다. 그 어렵다는 사회생활이었지만 나름대로 잘 처신했다. 친절한 손님을 보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고, 진상인 손님을 보면 고개를 팍 숙이고 눈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죄송합니다,라고 몇 번 외치면 됐다. 이것이 내 노동력과 친절함을 파는 것이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오히려 자존심을, 내 자아를, 더 나아가 내 존재를 파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청춘이라는 수식어와 이십 대라는 시간은 이것들을 유쾌하게 넘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넌 꿈이 뭐야?
다 내 또래들이어서, 누구랑 얘기하든 주제든 대체로 비슷했고 시시했다. 하지만 이 시시한 얘기 중에서도 말 꼬를 트는 순간 뭔가 엄숙해지는 느낌을 강하게 주는 주제도 있었는데, 바로 꿈에 관한 얘기였다. 넌 졸업하고 뭐할 거야, 넌 뭘 하고 싶은 거야, 이런 얘기들이었다. 내가 일했던 곳이 유별난 것인지, 아니면 원래 다들 그 정도 생각은 하고 사는지는 몰라도 나와 몇몇 애들을 제외한 애들은 삶의 방향성이 뚜렷했다. 걔 중에는 이미 사회적 성취를 이루어낸 애들도 더러 있었다.
난 아이돌 같이 이른 나이에 그럴싸한 업적을 쌓아 올린 사람을 미워했다. 그들과 나의 시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아직도 부모의 등골을 빼먹는 나와 달리, 부모에게 평생 돈을 벌어도 사기 힘들다는 집을 척척 사주는 그들. 모두에게 귀감이 되어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그들. 물론 그들이 이 업적을 이루기 위해 쌓아 올린 노력까지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그들의 행성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정말 좋은 위치에 있어서 그들의 나라에 태양이 작열하고 있는 청량한 낮이었고, 나의 행성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영 좋지 못한 위치에 있어서 나의 나라에는 한 줌의 빛도 비치지 않는 먹물 같은 밤이었다.
언젠가 두 귀에 넘치도록 이어폰 볼륨을 키워 걷던 기억이 난다. 가사가 대충, 왜 치기 때문에 젊음을 낭비 하나요 신이시여, 이랬다. 그래, 난 젊음을 낭비하고 있지. 그렇게 눈 앞에 펼쳐진 장면이 바로 푸른색을 살짝 머금은 새침한 새벽하늘이었고, 이에 곧장 몰려왔던 풍경은 어딘가 설익고 얕았다.
생각해보면, 내 세상은 언제나 새벽이었다. 시간은 내 세상을 이때 즈음에 떨궈놨다. 언제나 새침하고, 설익었으며, 얕지.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근데 당신들의 세상은 정오 같더라. 온 동네에 edm이 가득했고 쏟아지는 일조량으로 태양의 왕국을 만들고 있었지. 그건 분명히 진득했어. 또 피톤치드 내음은 어떻고. 그 활력은 분명히 농익었고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었지.
왜 나만 한밤일까. 당신들은 한낮인데. 왜 당신과 나의 시차는 다를까. 당신의 그리니치 천문대는 나보다 더 서쪽에 있어서 그런가. 나도 광합성을 받아 역동하는 젊음을 느껴보고 싶다. 나도 내리쬐는 빛에 온 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고 싶다. 나의 낮은 도대체 언제 올까. 아니, 오기나 할까.
그 결이 사뭇 달랐지만 어느 정도 삶에 확신이 찬 걔네도, 나에게는 아이돌과 비슷했지만 현실적인 상황만 놓고 보자면 나와 다를 바는 없었다. 하지만 나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삶의 태도였다. 걔네는 확신이 있었다. 자신의 나라에 태양빛이 직각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확신. 그 확신은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다. 자신의 능력은 충분하니 이런 능력을 알아줄 누군가만 나타나면 된다는 믿음.
나에게는 두 가지가 모두 부재했다. 내 능력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혹여나 그런 능력이 있다 한들 그것이 충분한다는 믿음은 추호도 없었다. 애당초 걔네에 대한 믿음은 질투와 시기였고, 그 질투와 시기의 대상은 저 두 가지였으리라. 돌이켜 생각해보자면, 걔네에게 능력의 존재 유무를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도리어 걔네에게 정말 그만한 능력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 능력이란, 적어도 이십 대에게 있어서는 믿음의 영역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능력에 대한 그들의 교조적 믿음이 부러웠던 것이었다.
그래서 우울해.
이 믿음이 부재한 나에게, 미래는 대단히 아득하게 다가왔다. 아득한 미래는 현재를 붕괴시키고 나를 무너뜨렸다. 나는 뭐가 될 수 있을까, 도대체 난 뭘까. 청춘의 도입을 느끼기 위한 알바는 이것이 청춘이라며 도무지 삼킬 수 없는 쓴 맛을 선사했다.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내 삶을 가만히 조망하자니, 해일처럼 덮치는 우울을 피할 수가 없었다.
우울은 이내 내 삶에서 희망을 거세시켰다. 그간 어렵사리 붙잡고 있던 나라는 존재의 특별함, 뭐라도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없어진 것이다. 다만 우울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어쩌면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구체적인 불행만 끊임없이 주입시켰다. 이런 상황은 내 삶의 질감을 꽤 많이 구겨놓았다.
‘힘들다’
만약 태어나기 전에 삶이 이렇게나 힘들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태어났을까 싶다. 훌쩍 떠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떠나지 못하고, 다 놓아버리고 싶어도 날 자랑거리로 내세우는 사람이 있어서 놓질 못한다. 그저 새벽 공기가 주는 취기를 빌려, 엉엉 우는 수밖에.
‘힘내자’
그럼에도 힘을 내야 한다. 언젠가 해 뜰 날이 온다는, 그런 막연한 희망 섞인 말 때문이 아니야. 그냥, 정말 그냥 힘을 내서 살아야 한다. 그러니까 약속 하나 하자. 첫눈 오는 어느 날, 그 날에 웃고 있다면 그 날에서야 짐을 챙겨 아무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기로.
그때까지는 묵묵히, 그리고 종종 울면서 살기로.우울함으로 범벅된 삶에서 나는 예전과 같은 유쾌함을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예견된 순리였다. 나는 어떻게든 이 우울을 타개해야 한다는 분노와 어쩌면 이것이 내 숙명이니 받아들여야 한다는 체념을 동시에 느꼈다. 이 두 개의 감정이 끊임없이 부딪히면서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내가 느끼는 삶의 염증은, 체념보다 분노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분노는, 죽고 싶다는 말보다 이렇게 살기 싫다는 말이었다. 우울은 희망을 거세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울은 희망의 바짓가랑이를 처절하게 붙잡게 했고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그러니까, 난 아직도 내가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음을 자부하고 있었고 이를 위해 가지고 있을 법한 애매한 능력을 끊임없이 의심한 것이었다.
미래의 막연한 행복은 현재의 구체적인 불행을 먹이로 삼는다. 적어도 내가 현재 삶에 큰 불만을 느껴 이를 불행으로 치환한다면 말이다. 나는 꽤 희망찬 미래를 애매한 능력으로 꿈꾸고 있으며, 이것이 좌초될까 봐 불안한 그 마음이 내가 지금 불행하다고 속삭이고 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