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십 대는 안녕하신가요
내 나이 또래든 나보다 연배가 높든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열이면 열 묻는 질문은 비슷하다.
혹시 애인있어요?
질문이 불쾌하게 다가올 때도 종종 있지만, 질문의 의도가 불순하다고 느껴지지 않는 이상, 질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뒤따라오는 대답이다.
왜 연애 안 해요? 한창 좋은 나이잖아요. 누구 소개 받고 싶으면 말해요(혹은 옆에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때요 라고 말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일단, 나는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운이 좋게 연애를 몇 번 해본 적은 있다. 나에게 호감이 있다며, 연애 한 번 해보지 않겠냐며 선뜻 고백해준 심성 고운 사람. 이게 말로만 듣던 썸인지, 뭔지는 모르겠는데 둘이 영화도 몇 편보고, 집도 좀 바래다주고, 자기 전에 통화도 한 삼십분 정도 해서 어쩌다 사귀게 된 사람. 그 외에도 사람은 달랐지만 양상은 비슷한 연애가 몇 번 있었다. 근데 나는 헤어졌을 때 그 나쁜 새끼 하면서 운적도 없고, 거나하게 취해서 자니 라는 문자를 해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이별의 후유증을 겪지 않았다.
처음엔 내가 쿨병(?)에 걸린 줄 알았다. 내가 일종의 패배자가 되기 싫어서, 혹은 내가 저 사람보다 잘 난 사람으로 남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연애라는 것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내가 이 사람을 좋아했던 게 맞나 라는 생각의 부피만 커질 뿐이었다.
좋아한다는 건 도대체 뭘까. 침대에 누워 휴대폰을 보다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면 그 사람도 같이 생각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프레임 단위로 조각내서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단순하게 그냥 자기 전에 갑자기 온 몸이 저릿해지면서 그 사람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나에게는 연애 관음증觀淫證이라는 이상한 병이 생겼다. 그게 영화든, 드라마든, 소설이든, 하물며 유튜브에 번번이 뜨는 웹드라마든, 그 텍스트 속에 녹아든 등장인물들은 모두 사랑을 한다. 그것들을 보고 또 보며 사랑이 뭔지 알아내려고 부단히 애썼다. 설레는 장면이 나오면 오두방정을 떨며 베개를 부둥켜안았고, 이별하는 장면이 나오면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그들의 관계를 절절히 응원했다.
좋아하는 게 뭔데?
아는 형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니, 한심한 듯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냐. 그냥 그렇게 느끼면 느끼는 거지. 감정을 앎의 영역으로 끌고 오지 마. 아, 그런 건가. 좋아한다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건데, 쓸데없는 걸 생각한 건가.
아니, 그래서 좋아하는 게 뭐냐고
솔직히 말하면, 형의 말이 이해는 됐지만 전혀 와 닿지 않았다. 형 말대로라면 직감적으로 아 이건 좋아하는 거구나라는 걸 알아야 했지만, 그런 낌새는 전혀 없었다. 그때쯤부터 연애와 사랑에 강박적으로 집착했다. 연애와 사랑이 뭔지, 도대체 어떤 느낌인지 사람들에게 묻고 다녔고 그걸 알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허구의 사랑을 만들어 내서 글을 썼다. 내가 사랑을 한다면 이러지 않을까. 전무한 경험을 경험한 것처럼, 실재하지 않는 존재를 실재하는 것처럼 글을 썼다.
자기야, 자기야.
나는 이따금 너와 함께 자는 상상을 한다. 나는 너의 살짝 통통한 몸을 부둥켜안고 잔다. 넌 내 차가운 손을 꼭 붙잡고 차분히 숨을 내뱉는다.
난 너의 언어가 좋다. 그게 소리든, 잉크든, 어떤 형태로 드러나든 좋다. 그리고 난 너의 눈이 좋다. 눈동자의 청명함도 좋지만, 눈동자 뒤의 세계가 더 좋다. 넌 어떤 세계를 눈 뒤에 담고 있는 거니.
나는 이따금 너와 결혼하는 미래를 그려본다. 같이 감바스도 해 먹고, 같이 된장찌개도 끓여먹는 우리의 모습. 가끔씩 다투기도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너나 할 거 없이 서로가 좋아하는 간식을 사들고 와 화해를 할 걸. 아, 좋다.
난 너의 생각이 좋다. 누군가에게 언제나 배울 게 있다는 건 황홀하니까. 그리고 난 너의 옷맵시가 좋다. 특히 넌 청바지가 그렇게 잘 어울린다. 다리가 예뻐서 그런가.
나는 항상 네 생각을 한다. 내가 네 생각을 하는 만큼 너도 내 생각을 해주면 좋으련만. 그건 사치인가. 아무튼, 난 너가 좋아. 정말로 너가 좋아. 그러니까 난 너의 전부가 되고 싶어.
나는 꾸준히 이성친구의 관계에 대해 꽤 비관적이었다. 적어도 이성애자인 이상, 남과 여라는 상이한 성별을 가진 친구 관계는 FWB가 되거나, 한쪽이 좋아한다는 감정을 베일에 씌운 채 평생 지내거나. 웃긴 건, 나의 이런 선언이자 단언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친구라는 관계의 이름을 씌우고 친하게 지낸 A는, 적어도 나에게는 그저 친구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단 둘이 만나 밥도 먹었고, 단 둘이 만나 영화도 봤고, 가끔씩은 술도 먹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술을 먹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선언이 A에게 해당되는지는 관심 없었다. 나는 해당되지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A와 FWB가 되는 것, 내가 A를 짝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평생 친구로 지낼 수 있다는 말이지.
어느 순간부터 A와의 연락이 뜸해졌다. 서로 그다지 바쁘지 않았음에도 물리적 거리가 멀어지니 자연스레 관계의 거리도 마치 척력을 행사한 것처럼 멀어졌다. 동시에 인간관계에 대해 회의감이 불어 닥친 나에게, A와의 관계 역시 오묘하게 다가왔다. 그 오묘함이란, 얘가 도대체 나에게 뭘까 라는 아주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관계와 감정에 대한 물음이었다.
의심은 확신이 되고, 확신은 이내 믿음이 된다. A와의 관계를 의심하자 마음에 안개가 아주 두껍게 드리웠다. 나는 A를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 A는 나에게 도대체 뭘까. A와 같은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살펴본다. 그래, 얘는 이런 사진을 찍을 때 표정을 지었지. 맞아, 얘는 카페를 좋아해. 그치, 얘는 꽤 예쁘지. 항상 했던 생각이었지만, A는 예쁘다. 물론 이 가치평가에 내 사심이 들어갔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그냥, 예쁘니까 예쁘다고 말한 거라고. 이게 단순한 감상일 뿐인 걸까. 생각해보니 난 A에 대해 참 많이도 알고 있다. A가 좋아하는 음식, A가 못 먹는 음식, A의 술버릇, A의 이상형 등. 그냥 얘를 많이 봐서, 친한 친구쯤으로 생각해서 이렇게 많이 아는 것일까. 아, 나 얘 좋아하는 구나. 이게 좋아하는 거구나. 그래, 나 얘 좋아했고, 지금도 좋아해.
쿨병도, 뭣도 아니다. 그냥 난 내 감정에 상당히 서툴렀다. 감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을 몰랐던 것이다. 감정은 감정일 뿐인데. 거기에 온갖 의미를 부여해가며, 온갖 변명들을 붙여가며, 온갖 핑계들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십대의 치기가 딱 이런 것이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한 것. 아니, 솔직하다고 믿게 만드는 것. 아주 짙게 드리운 안개는 안개로 내비 두면 되는 문제다. 굳이 그걸 걷어내고, 이 우중충함을 견디지 못해 허접한 손전등을 들고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감정의 편린만 느끼고 모든 것을 아는 양 굴 필요가 없던 것이다.
아, 이게 좋아하는 거구나.
형의 말이 맞았다. 좋아한다는 건, 그냥 좋아하는 거다. 뭘 재고 뭐고 할 필요가 없는, 아주 직관적으로 느껴지는 날것 그대로의 감정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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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를 놓친 언어들을 한 데 모아 독백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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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좀 더 내 감정에 솔직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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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좀 더 용기 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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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때 좀 더 내 마음을 확실히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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