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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미사마 jemisama Apr 08. 2024

잔과 도쿠리 등의 주기(酒器)의 이해

여덟 번째 악기

> 사케를 소주잔에 마실 수는 없잖아? 


사케바나 이자카야에 가보면 단순히 라벨이 붙은 병과 잔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종류의 돗쿠리와 잔과 전용 용기가 등장하는 등 생각보다 술을 담는 주기(酒器)가 많음에 놀랍니다. 


와인도 와인의 종류별로 글라스가 바뀌고 디캔터가 필요하듯, 와인만큼은 아니더라도 와인에 필적할 만큼의 다양성에 놀라곤 합니다. 


사케와 요리 말고도 의외의 스토리가 있는 이 주기에 대해서 다뤄보겠습니다. 




가장 먼저 눈과 손에 익은 '오쵸코'(お猪口)라는 잔부터 설명해 보기로 합니다. 

오쵸코란 한자만 보면 '돼지 입'이라는 뜻인데 일본에서는 전혀 돼지와는 관계가 없고 어원은 작은 물건 (ちょっとしたもの)이라는 뜻으로 작은 잔을 뜻합니다. 


사케를 마실 때 가장 많이 쓰이는 잔이며 나름 임팩트도 강합니다. 주로 하얀 사기 잔의 안쪽 가운데 바닥에 파란색의 원이 두 개 그려져 있습니다. 이게 최근 가장 일반적인 오쵸코의 형태이며, 일반적인 작은 술잔을 대부분 오쵸코라고 부릅니다.  


가운데의 파란색 두줄은 뱀의 눈이라는 뜻으로 쟈노메(蛇の目)라고 불리며, 사케를 상징하는 모양으로도 인식됩니다. 이 잔은 감별용으로도 사용되는데, 사케의 침전물 감별과, 색깔, 농담, 투명도의 구별 등에도 쓰입니다. 


오쵸코 사이즈별 종류 - 사케공구 인용 편집

크기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부분 180ml의 이치고(1合) 이하입니다. 참고로 잇샤쿠(1勺)가 한 숟갈 정도의 18ml인데 니샤쿠(2勺)에서 이치고(1合)까지 다양합니다. 


비슷한 잔으로 구이노미(ぐい呑み)가 있는데, 사케를 마실 때 쓰는 잔으로 오쵸코와 상당히 비슷하나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사이즈입니다. 


구이노미가 좀 더 크고 깊습니다. 원래는 해삼의 내장인 코노와타나 연어의 머리연골로 만든 히에나마스(氷頭膾) 같은 진미를 담는 용기였으나 다 먹고 남은 용기에 사케를 조금씩 먹기 시작한 것이 구이노미의 유래라고 합니다. 


구이노미는 일본어로 그냥 '벌컥 들이킨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오쵸코가 일반인 기준으로 원샷이 가능한 크기라면 구이노미는 2~3번 나눠서 마실 수 있는 크기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이시카와 현의 사케 '노구치 나오히코 켄큐죠'의 상징적 마크도 이 쟈노메에서 따왔습니다.

다음은 돗쿠리(徳利)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사케의 주기라 하면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오쵸코와 돗쿠리라고 생각됩니다. 대부분 손님들이 주문하는 양이 이치고(1合)나 니고(2合)인 점을 감안하면 병보다는 작은 디캔터 역할을 하는 중간사이즈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이 돗쿠리가 되겠습니다. 


이자카야에서 주문을 하면 대개 돗쿠리의 형태로 담아서 가지고 오거나 잇쇼빙(一升瓶)을 가져와서 함께 가져온 돗쿠리에 따라줍니다. 이치고의 경우는 병을 가져와서 바로 손님의 잔에 직접 넘치도록 따라주는 퍼포먼스도 있습니다만, 돗쿠리로 마시는 것이 가장 일반적입니다. 


돗쿠리(徳利)라는 단어의 어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는데, 한자는 그 발음을 가차한 것으로 보입니다. 먼저 일본어로 술을 따를 때 나는 소리가 '도쿠리도쿠리'라고 들려서 돗쿠리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한국의 항아리를 독이라고 부르는데 그게 음이 와전되어 돗쿠리로 변했다는 설입니다. 


돗쿠리와 오쵸코, 카타쿠치와 구이노미


병에서 오쵸코로 가는 도중에 디캔터 역할을 하는 카타쿠치(片口)라는 주기도 있는데 

니고(2合) 정도로 담을 수 있는 양은 돗쿠리와 비슷합니다. 


돗쿠리는 목이 좁고 호리병처럼 생긴데 반해 카타쿠치는 목이 없고, 사케를 따르는 입이 하나밖에 없어서 카타쿠치라고 불립니다. 


그리고 치로리라는 것도 있는데 원래는 아츠캉을 만들 때, 데우기 위한 용도로 나온 것이지만 최근엔 얼음 속에다가 이 치로리 용기를 박아 넣고 그 안에 사케를 부어 레이슈를 만드는 용도로도 쓰입니다. 


치로리 - 아사히주조 인용 편집


다음은 이치고마스(一合升)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마스는 1800ml의 나무로 된 용기를 말하고 우리의 '되'에 해당됩니다. 이게 병이 개발되면서 단위로서의 의미보다는 디자인과 상징적인 이미지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이즈가 크다 보니 최근엔 10분의 1에 해당하는 이치고마스가 가장 대표적인 사이즈로 유통되고 있습니다. 


정학하게는 이치고마스가 맞는 표현입니다만 길다 보니 그냥 마스라고만 부르기도 해서 다소 혼동을 가져오곤 합니다.


재질은 주로 나무인데 나무 그대로 출시가 되거나 옻칠을 해서 나오는 두 가지가 메인입니다. 최근은 대량생산으로 플라스틱제로 나온 것도 있기는 하나 전통방식은 아닙니다. 



이 이치고마스에는 상당히 재미난 표현이 있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몇 가지의 일본어와 배경지식을 조금 동원해야 합니다. 


먼저 1800ml의 잇쇼빙(一升瓶)은 쥬고(10合)에 해당됩니다. 참고로 사케에 관련된 용기의 사이즈를 간략히 설명드리겠습니다. 


10배가 될 때마다 단위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18ml가 샤쿠(勺), 180ml가 고(合), 1.8리터가 쇼(升), 18리터가 토(斗), 180리터가 고쿠(石)에 해당됩니다. 


여기서 1.8리터의 쇼(升)는 음읽기인데 훈으로 읽으면 마스가 됩니다. 


지금이야 창업을 하면 화환을 보내기도 하고, 여러 축하할 아이템이 많지만 옛날에는 주로 사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어로 '일익번창'이라는 단어가 '마스마스 한죠'(益益 繁盛)인데 이를 상기 사케 단위를 참고로 음과 훈으로 섞어서 치환을 하면 다른 한자의 '마스마스 한죠'(升升 半升)가 됩니다. 즉 1.8리터 + 1.8리터 + 900ml가 되어 다 합하면 4.5리터가 됩니다. 


즉, 4.5리터의 특별 용기에 그 가게나 이름 등을 쓰고 일익번창의 '益々繁盛' 글자를 넣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습니다. 설명하기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지만 사케문화를 이해한다는 관점에선 알아놓으면 상당히 많은 도움이 됩니다. 



이 외에도 술을 받으면 원샷을 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코치현 베구하이(べぐ杯)나 특별 제작되어 돗쿠리와 오쵸코에서 꾀꼬리의 우는 소리가 나는 주기, 한가운데 얼음을 채워 계속 레이슈로 마실 수 있는 돗쿠리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종류가 있습니다. 



주기의 재질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유리, 도자기, 주석, 철기, 목기 등으로 다양합니다. 

도자기는 잔이 두텁고 열전도율이 낮아서 데워 마시는 아츠캉 등에 적합하고, 반대로 주석으로 만들어진 잔은 열전도율이 높아서 얼음 속에 묻거나 하는 방식으로 차게 해서 마시는 레이슈(冷酒)에 아주 적합합니다.  


오리가라미나 긴죠 등의 술 색깔과 술이 가진 향에 집중하고 싶을 때는 유리로 된 잔이 좋습니다. 재료 자체에 아무런 향이 없기에 긴죠의 향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사케의 트렌드는 와인글라스로도 맛있는 사케가 주 콘셉트입니다. 열처리를 하지 않은 나마자케, 여과를 하지 않은 무로카, 물을 타지 않은 겐슈, 그리고 긴죠 이상의 정미비율을 가진 사케가 대표적입니다. 


그래서 최근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브랜드는 쥰마이긴죠 무로카 나마 겐슈 (純米吟醸 無濾過 生 原酒)가 많습니다. 


야마하이나 키모토 같은 숙성주 향을 즐기고 싶은 분은 표면적이 넓은 잔이 좋고, 긴죠향 계열은 와인글라스처럼 마시는 부분이 좁은 잔이 향을 강하게 모아줘서 좋습니다. 


목재로 된 잔과 다시 목재에 옻칠을 한 잔은 목재의 향과 어울리는 사케와 마시는 것이 좋다고는 하나, 주로 축하연을 담당하는 주최 측에서 제공해 주는 경우가 많아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경우는 잘 없는 듯합니다.   


열전도율이 높은 주석 잔



필자가 예전에 지방의 이자카야를 갔는데, 같은 술도 마시는 잔에 따라 그 느낌이 다르다고 주인이 계속 얘기를 해서 권하는 대로 마셔본 적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맛이 다르다는 걸 확실히 느꼈지만 어디까지나 기분 탓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본 내용을 정리하다 보니 과학적 근거도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열전도율, 입을 대는 부분의 크기, 주기의 재료에 따른 향의 차이, 입이 닿는 부분의 두께 등으로 맛도 달라지기에 주기의 선정에도 조금만 공부하면 보다 더 사케를 즐겁게 마실 수가 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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