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쿠히메 (菊姫, きくひめ)
- 키쿠히메 합자회사, 이시카와현 하쿠산시
- 1570년 창업, 이시카와현답게 노토토지의 영향으로 클래식한 사케
- 주조 책임자인 토지(杜氏) 제도의 붕괴를 염려해 사케마이스터 제도를 도입한 양조장
- 브랜드명은 인근 신사에 모셔진 쿠쿠리히메와 키쿠자케 전설에서 명명
역사가 너무 오래된 사케는 기본적으로 그 역사만큼이나 스토리도 있고, 변하지 않는 양조장 만의 철학도 있을 수 있습니다. 너무 변화를 하지 않아 그냥 오래되기만 해 버린 곳이 있는가 하면 지속적으로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해 오면서 최신의 트렌드에도 맞추면서 전통도 지켜나가는 양조업계의 어른 같은 곳도 있습니다.
그리고 비단 양조장뿐만 아니라 양조책임자인 토지(杜氏)도 집단을 이루며 같은 단체 및 출신끼리는 정보를 공유하며 같은 양조법과 같은 맛을 내기도 하는데 브랜드보다 지역으로 맛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어느 한 지역에 대해서 이제는 선입견이 아닌 작은 빅데이터로 생겨버린 고정관념에 가까운 편견이 있습니다. 이 지역의 사케는 대부분 현재의 트렌드에 맞추질 못하고 있으며 전통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는다는 일념으로 이겨낸다고는 하는데 공감을 많이 받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구글검색 사이트에서도 이 지역사케를 입력하면 맛없다는 표현이 자동으로 따라 나올 정도로 저 개인뿐만 아니라 일반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그렇게 굳어져가는 느낌입니다.
일본의 전형적인 바뀌지 않는 구시대적인 마인드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면세점에 가면 늘 놓여있지만 솔직히 추천하기는 어려운 사케 중 하나이며 조금만 사케에 관심이 계신 분이라면 한번쯤은 접해 보셨을 브랜드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호불호가 갈리는 내용이며, 저와 최근의 트렌드에 맞지 않다는 것이지 나쁘다는 표현은 절대 아님을 먼저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사케 입문자나 여성에게는 추천하기가 머뭇거려지는 이 지역은 바로 일본의 이시카와현입니다. 옛 지명이 노토라고 불리는 지역이었는데 이 지역의 토지집단을 노토토지라고 합니다. 타 토지들과 달리 상당히 클래식한 양조와 농후한 맛이 특징이며 음용방법으로는 와인글라스로 마시기보다는 데워마시는 것을 추천하는 사케입니다.
이 지역의 사케들로는 죠키겐(常きげん), 카가토비(加賀鳶), 노구치나오히코 켄큐죠(農口尚彦研究所), 텐구마이(天狗舞), 소겐(宗玄), 유호(遊穂) 등이 있습니다.
이 지역의 사케 중 가장 유명하게 알려진 사케가 바로 키쿠히메(菊姫)입니다.
키쿠히메는 이시카와현의 하쿠산시라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노토토지가 가장 왕성하게 자리 잡은 곳입니다. 인근의 토야마현, 후쿠이현도 마찬가지로 노토토지의 영향을 받았고 역으로 이 지역에서 노토토지의 특징을 벗어나서 최근의 트렌드를 맞춘 양조장은 상당히 주목받습니다.
전국 1~3위와 이시카와현 상위랭킹 맛의 차트
'사케노와'라는 사이트에서 가져와 편집한 상기 그림을 잠시 보시면, 상단은 전국의 사케 랭킹 1위 아라마사부터 2위 카제노모리, 3위 지콘은 맛의 차트를 보시면 아주 비슷한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의 트렌드를 그대로 반영한 것인데 그래프 상으로는 역삼각형으로 그려지며 화려(華やか)하고 경쾌(軽快)하면서 향이 진한(芳醇) 것이 특징입니다.
반면 이시카와현의 사케들을 보면 그래프상으로 중간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치우치고 있습니다. 경쾌하기보다는 바디감 있는 중후(重厚)한 맛과 묵직한 맛이 특징입니다. 클래식한 맛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고 겨울의 아츠칸으로 추천되는 맛이기도 합니다. 최근 트렌드에는 맞지 않는다 하여도 전국 랭킹에서 나쁘지 않은 순위에 있는 것을 보면 좋고 나쁘다고 판단하기보다 하나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런데 가장 왼쪽의 사케 하나는 최근 트렌드에 맞춘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지난번 소개해드린 '테도리가와'입니다. 인근 토야마현에서는 마찬가지로 '하네야'라는 사케가 마찬가지로 저렇게 주위와 달리 군계일학처럼 최근 트렌드에 맞추고 있습니다.
키쿠히메는 이시카와현의 하쿠산시(白山市)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후지산, 타테야마, 하쿠산의 일본의 3대 명산(日本三名山) 중 하나인 하쿠산 기슭에서 1570년 창업했습니다. 현재 사장이 17대에 해당하니 상당히 오래된 노포입니다.
브랜드명은 양조장 인근의 시라야마 히메 신사(白山比咩神社)에 모셔진 쿠쿠리히메(菊理媛)와 국화꽃의 물방울이 떨어진 강의 물을 마시면 장수한다는 키쿠자케 전설(菊酒伝説)에서 명명되었습니다.
키쿠히메의 기본 주조의 콘셉트는 육아를 하듯이 양조한다는 것입니다. 애정을 쏟고 사랑을 듬뿍 주면서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최상급 원료 쌀을 선정하고 매입하며 최신 창고 설비 등을 갖추는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양조책임자인 토지와 직원들의 높은 기술과 팀워크라고 생각합니다.
키쿠히메 야마하이 쥰마이슈
그리고 이런 생각들에 절대 타협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번의 타협이 또 다른 타협으로 이어지는 것을 지극히 두려워하며 시대에 휩쓸리지 않겠다고는 하는데, 이런 생각이 지금의 키쿠히메를 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사케를 하나의 무형문화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대의 요구를 떠나서 오로지 자신들만의 길로 간다는 것 좋은데 국경이 무너진 글로벌 시대에 이런 생각들이 바로 도태를 초래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키쿠히메는 한마디로 하면 화려함을 억제한 성인들이 즐길 수 있는 사케입니다.
이 말이 여러 의미를 내포합니다만 기존 전통 사케의 특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1967년에 출품한 후로 23년간 수상하기도 했고 1983년에 일본 최초로 야마하이 쥰마이슈 출품하기도 한 선구자와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만 최근의 사케의 품평회와 트렌드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것도 사실입니다.
타협하지 않는 키쿠히메의 여러 부분 중 몇 가지만 언급해 보겠습니다.
먼저 쌀에 대한 고집입니다. 주조호적미의 왕이라고 불리는 야마다니시키를 고집하는데 그것도 최고급중의 최고급 야마다니시키 산지인 효고현 요시카와쵸의 특 A 중에서도 A급만을 고집해서 사입하고 있습니다. 이것도 돌려 말하면 최근 기후가 변하면서 예전의 야마다니시키 재배지역보다 북쪽에 위치한 곳에서의 야마다니시키가 더 훌륭한 맛을 구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이 시대에 타협하지 않는다는 말로 설득하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키쿠히메 라인업
그리고 매년 양조책임자인 토지들이 점점 나이가 들고 신입 토지가 배출되지 않는 점에 주목해서 1988년부터 '사케마이스터'라는 주조기술자를 육성시키고 있습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은 인정을 해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의외로 최근의 직원들은 20~30대가 중심입니다.
그리고 키쿠히메가 국화공주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케는 당연히 지녀야 할 국화처럼 노란색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최근 트렌드인 활성탄을 이용한 주조를 키쿠히메는 진한 화장을 한다는 표현을 합니다. 이에 키쿠히메는 연한 화장을 주 콘셉트로 양조에 임한다고 합니다. 원래 사케가 가져야 할 색깔을 포기하고 진한 화장을 해서 물과 구별되지도 않는 사케는 단순 색만 빼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사케의 독특한 향기와 맛의 성분까지도 빠진다는 것에 상당한 염려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맥주나 와인이 하얀색이 되어버리면 원래 그 가치도 사라지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숙성에 상당한 고집과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 양조장과 비교도 안될 정도의 몇천 평 규모의 어마어마하게 넓은 숙성 스페이스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키쿠히메 - 홈페이지 인용
키쿠히메는 각각의 사케에 맞는 숙성 기간을 설정하여 관리 및 출하하고 있습니다. 숙성은 쌀의 정미비율과 주조방법에 따라 숙성 기간이 다릅니다. 이 다양한 종류의 사케를 제 각각 숙성시키기 위해서 넓은 공간을 마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고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수작업 양조를 위한 장치라는 생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비효율이라 하더라도 가능하면 전통적 수작업에 의한 양조를 고집하는 것입니다.
온도 측정이나 누룩실의 온도 및 습도 관리는 24시간 컴퓨터가 관리하지만 판단과 대처는 결국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듯 하이테크는 최고의 수제를 하기 위한 백업 역할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크게 수작업 양조에 신경을 쓰는 것은 쌀을 씻는 세미, 물을 먹이는 침지 작업은 매우 민감한 과정이라 기계화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 근본적 생각은 당장의 주조를 위해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겠다는 의지에 있습니다.
간단히 키쿠히메의 라인업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쿠쿠리히메 (菊理媛)
- 10년 숙성사케
- 주조호적미 효고현 특 A지구 야마다니시키
- 정미비율 50%
- 알코올 17도
* 다이긴죠 (大吟醸)
- 5년 숙성사케로 캐러멜과 흑당의 맛이 나는 키쿠히메의 대표적인 사케
- 주조호적미 효고현 특 A지구 야마다니시키
- 정미비율 50%
- 알코올 17도
* 쿠로긴 (黒吟)
- 3년 숙성사케로 멜론이나 바나나를 연상시키는 달콤한 향과 고소한 풍미가 특징
- 주조호적미 효고현 특 A지구 야마다니시키
- 정미비율 40%
- 알코올 17도
* 마즈잇파이 (先一杯)
- 1년 숙성사케로 '일단 한잔'이라는 뜻의 네이밍과 갓 지은 밥을 연상시키는 고소함과 달콤한 향이 잔잔한 궁극의 식중주
- 주조호적미 효고현 특 A지구 야마다니시키
- 정미비율 65%
- 알코올 14도
* 토쿠센 쥰마이 (特撰純米)
- 2~3년 숙성사케로 쌀의 단맛과 감칠맛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쥰마이슈로 부드럽고 깊이 있는 맛이 특징 견과류 맛과 묵직함이 특징
- 주조호적미 효고현 특 A지구 야마다니시키
- 정미비율 65%
- 알코올 16도
가장 좋아하는 사케가 무엇인지 필자에게 물어보면 늘 저의 대답은 '아직 마셔보지 않은 사케'라고 자신 있게 대답합니다. 그래서 맛이 없더라도 마셔보지 않은 사케를 주문하게 되는데, 전국의 사케를 다 구비해 놓은 곳으로 가도 손님이 가장 찾지 않는 사케들이 이시카와현의 사케인 경우가 많고 그래서 회전율이 떨어져서 다시 이자카야에서도 의도하지 않은 숙성(?)을 거치기도 합니다.
다소 이 지역의 사케들을 폄하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만, 정확한 소비자의 입장에서 단순히 맛만 가지고 평가하게 되는 점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올해 초에 큰 지진이 터지면서 일본에서 이 지역의 사케와 특산물들을 소비해 주자는 움직임이 일기도 해서 저 역시 관심을 가지고 주문하기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만, 역시 맛은 기대대로였습니다. 호불호가 있으니 이런 류의 사케를 좋아하시는 분에게는 역으로 추천드릴 수도 있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