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수와 하얀 바다

객수(客水 ): 쓸데없이 내리는 비, 가을비.

by JEMMA

긴 더위가 끝나고 드디어 가을이 왔다. 옛말에 빗자루로도 피한다던 가을비는 올해 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리라 다짐한 듯 기나긴 추석 연휴 내내 내렸는데, 지난주에도 그리고 오늘도 내렸다. 습도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다. 한 주 내내 90%가 넘더니 며칠 지나니 99%라고 한다. 여름 동안 창문을 열어두면 오히려 습기가 들어와서 창문을 닫고 갑갑하게 지내느라 가을이 오면 얼른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키고 싶었는데, 이 말도 안 되는 습도 때문에 여간 조바심 나는 게 아니다. 제습기도 초비상이다. 여름 내내 열심히 돌아가느라 기진맥진해 어서 들어가 쉬어야 하는데, 아직도 빨아들여야 할 습기가 무한 생성되고 있다. 물을 비운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자꾸만 물이 다 찼다며 삐빅거린다.


더위가 가시길 하루하루 기다리다 보니 어느덧 명절 연휴가 왔다. 명절에는 출근도 하고 본가도 다녀오고 바다도 보고 왔다. 비가 계속 내려서, 비 내리는 바다를 구경하고 우산을 쓰고 바닷가를 걸었다. 사방이 새하얘서 마치 흑백사진 속에 갇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얀 하늘과 하얀 비와 하얀 안개. 그리고 검은 바다와 검은 길과 검은 나. 모두 뒤섞여 회색 세상을 만들어 낸다. 내일은 비가 그칠까? 그다음 날은 비가 그칠까? 매일같이 날씨를 확인해 본다. 끊임없이 내려오는 가을비에 빗자루는 진작부터 축축해져 물감 묻은 붓처럼 휘둘러 사방을 칠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간절히 기다렸던 여름날의 비가 이제 온 걸까. 사실은 가을비가 아니라 늦게 온 장맛비일지도 모른다. 야속하다. 여름비인지 가을비인지 알 수 없는 정체 모를 비처럼, 삶의 기억들과 갈증이 목 빼고 간절히 기다리던 지난날을 지나 다른 계절에 다다른 내게 야속히도 늦게 닿는다. 퍼붓는 비에도 사그라들지 않는 강렬한 열기는 이제 없다. 그런데도 아직 여름인 줄 알고 쏟아져 내리는 이 세찬 비를 어찌할까. 그저 걷는 것 밖에는 방도가 없다. 내릴수록 힘을 잃어 쪼그라들고 결국 서늘해지는 계절에, 우산을 쓰고 길을 걷는다.


요즘 글을 쓰기보다는 읽으며 지낸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초고를 조금씩 쓰는 것 외에는 독서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독서 시간을 많이 낼 수는 없지만 수필 잡지 여러 권, 경제·정치·사회 관련 서적, 국내 또는 영어 신문과 주간지, 세계문학전집, 종교 서적 등 읽을 수 있는 건 다 읽고 있다. 글쓰기가 동적이고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내보내는 시간이라면 독서는 정적이고 내 안으로 외부의 것들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다. 둘 중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독서하는 시간이 없으면 글쓰기로 내보낼 것들이 만들어지지 않을 테고, 독서로 아무리 많은 것을 받아들여도 내면에만 머물러 있고 글쓰기와 같은 행위로 내보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글을 쓰지 않고 독서에 집중한다는 것은 대화할 때 내 말을 멈추고 남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과 비슷하다. 일할 때나 사적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고 자기 얘기만 계속하면 화가 난다. 반대의 경우에는 내가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할 것이다. 또 조금 듣다가 성급하게 말을 잘라도 불쾌함이 생긴다. 상대방의 말을 끈기 있게 끝까지 들어야 의도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경청에는 기다림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 삶과 이 세상이 내게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지도 않고 밀어붙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잘 나아가지지 않는다며 화를 내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반갑지 않은 객수라며 비에게 역정을 내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니 이제는 글을 읽으며, 또 세상을 들으며 기다림의 시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조바심이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노랗고 빨간 나뭇잎과 파랗고 높은 하늘. 청명한 날씨. 투명한 바람. 내게 그런 순간들이 왔으면 좋겠다. 간절히 창 밖을 바라본다. 흑과 백, 흑백이 뒤섞인 잿빛 세상이 뉘엿뉘엿 해가 지며 점차 어두워진다. 좀처럼 낮아지지 않는 습도와 좀처럼 멎지 않는 비. 그러나 그런 오늘도 우산을 쓰고 산책을 하고 커피를 마시고 글을 읽었다. 나는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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