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경주의 여름

백만 년 만의 평일 여행

by JEMMA

간절히 기다리던 경주 방문인데, 아침부터 비가 억수같이 내린다. 약속을 취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퍼부어대는 게 야속하기만 하다. 평일에 출근이 아닌 나들이를 가려고 아껴 둔 새 검은색 리본 샌들을 개시하려고 했는데. 햇살을 가득 받으며 경주의 초록색을 마음껏 즐기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그러나 여태까지 기다리던 것이 억울해서 그냥 강행하기로 했다. 새 샌들도 그냥 신었다. 분노 조절 장애에 걸린 직장인이었다면 지금쯤 벌써 벌컥 화를 냈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 천사와 거의 동급인 새내기 백수다. 그러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떠나기로 한다. 이렇게 화를 안 내기가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왕 억수같이 내리는 비라면 분위기 있게 즐겨볼까. 고전미 덕분에 힙해진 그 아이러니한 핫플에서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맛집과 카페를 찾았다. 백수 입장에선 조금 비싸긴 했지만 비 내리는 풍경을 운치 있게 감상할 수 있는 한옥집에 들어가서 전복 솥밥, 전복, 전복죽이 있는 세트 메뉴를 시켰다. 식당의 작은 연못에 툭툭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면서 식사를 하자니 비 내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 약속을 취소하지 않고 만나준 지인이 고마워서 몰래 식사비를 결제했는데, 지인은 경주까지 와서 무슨 짓이냐며 식당 주인에게 결제 취소를 해달라고 하고는 본인 카드로 다시 결제를 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고마운 역정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으슬으슬 추워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싶었다. 경주 오는 버스에서 열심히 검색한 카페들 중 전통 찻집 느낌이 나는 곳을 골랐다. 나무로 된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옛날 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문 밖 정원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떡과 차가 예쁜 쟁반에 담겨 나왔다. 내리는 비를 감상하며 따뜻한 차를 마시니 기분이 좋아졌다. 이렇게 아무 걱정 없이 차를 마시며 오롯이 경치를 즐기는 시간이 귀하다. 일할 때라면 지금이 가장 바쁜 요일에 가장 바쁜 시간인데 이렇게 타지에서 즐기고 있으니 꿈 같다.


카페에서 나오니 어느 새 비가 그쳤다. 본격적으로 돌아다녀 보기로 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중심가를 벗어나 초록색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을 걸어서 탐방하기로 했다. 오기로 신고 나온 새 샌들은 억수 같이 내리는 비에 흠뻑 젖어서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미끄러졌는데, 비가 완전히 그치고 나서는 그나마 걷기가 편해졌다. 연꽃과 해바라기가 가득한 들판으로 들어갔다. 관광객을 위해서 야심차게 만든 듯 했으나 세찬 비에 잔뜩 두드려 맞은 연꽃과 해바라기는 처참하게 뭉개져서 땅에 고꾸라져 있었다. 이제 막 피어나서 마음껏 아름다움을 뽐내려 하던 차에 무지막지한 비에 당해버렸다. 안타까운 그 광경에 마음이 슬퍼졌다. 이토록 처량한 풍경을 남겨두고 빌런 같은 비는 떠나버렸는데, 이제는 눈부신 햇살이 그 위를 찬란히 비추고 있다.


널찍한 연잎의 쨍한 초록색이 눈길을 끈다. 홀리듯 다가서니 연잎마다 빗물이 고여 있다. 연잎이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구슬같은 빗물이 뒤뚱뒤뚱 움직이고,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은빛으로 빛났다. 그 덕분에 풍경은 황량해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꽃이 망가져버려 참담한 마음은 잊고 아, 예쁘다를 남발하며 사진을 찍어댔다. 연잎의 의지력이 온 힘을 다해 빗물을 떠받치고, 연잎의 생명력이 자신의 초록색으로 빗물을 빛나게 한다.


경주는 늘 가고 싶은 곳이다.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어느새 수많은 이들을 계절마다 끌어당기고 있다. 경주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맛집과 카페와 수많은 핫플레이스가 잔뜩 생겨나 어느새 촌스러운 나는 따라잡기 힘들게 되었다. 너도 나도 향하는 경주에서, 이런저런 핫플에 어리둥절하고, 원치 않는 폭우에 잔뜩 기대하던 경치가 망가져 실망한다. 꼭 내 지난 삶과 닮았다.


언젠가 부푼 맘으로 들어선 길은 우산 없는 빗길이었다. 나는 그 장맛비를 견디지 못하고 비켜설 수 밖에 없었다. 내리는 비를 하릴없이 바라보는 기분은 비참했다. 아직 피어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약하디 약한 해바라기였다. 연꽃이었다. 마구 두드려맞고 고개를 숙였다. 아직 내 마음엔 그날의 빗물이 고여 있다.


그러나 초록은 바로 그곳에 있다. 비가 그치면 물방울과 햇살을 들이마시고 더 선명해지는 초록빛. 연잎에 맺힌 빗물로 더욱 반짝이는 초록빛. 경주의 여름날은 내 삶에서 초록을 돌아보게 했다. 나에게 초록이란 무엇일까. 달아날 용기, 휴식, 글을 쓰는 것.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들. 아니, 어쩌면 지난 날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아팠던 마음일지도 모른다. 실망과 울분일지도 모른다. 쑥대밭이 되어버린 들판에 여전히 남아 빛나는 초록은 빗물을 품고 있다. 그렇게 순순히 바래지는 않겠다는 듯 초록빛을 발산하면서.


삶에서 초록을 찾아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함께 찾아보도록 하자. 비오는 날이나 맑은 날이나, 햇살이 부서지나 세찬 비가 두드려대나 여전히 당신 삶에 펼쳐진 초록이 당신을 더욱 찬란히 빛나게 하기를. 그래서 우리가 황폐한 땅에서조차 환히 웃으며 달려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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