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파업의 메인디쉬, 제주도 한달살기 시작

장마 끝, 폭염 시작!

by JEMMA

한달살기는 충동적으로 결정되었다. 퇴사 두 달을 앞두고 하루하루 버티기가 너무 힘들어졌다. 처리해야 할 일도 미적대면서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뤘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일도, 좋아하던 취미 생활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씻지도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고 멍하니 드러누워 있다가 잠들었다. 나의 귀가 시간은 보통 밤 11시쯤이었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빨래, 설거지, 청소를 하고 씻은 후 밀린 일도 처리하면서 취미 생활까지 하던 나는 더 이상 없었다. 설거지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고 욕실 청소도 하지 않아서 세면대엔 곰팡이가 피었다. 매일같이 똥 씹은 얼굴로 다녔다. 분노 조절 장애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고 누구에게나 격발 할 수 있도록 장전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 중 누군가 제주도 한달살기를 갔다는 말을 듣고 무심코 검색을 해보았다.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 가면 보통 뭘 하는지 처음엔 그냥 호기심으로 찾아봤을 뿐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남긴 숙소 후기가 눈길을 끌었다. 찬찬히 읽어보니 사연이 다양했다. 은퇴한 후 지난날의 수고를 보상하려고 온 사람, 가족끼리 좋은 추억을 남기려고 온 사람, 또 나처럼 지친 삶에서 잠시 벗어나 인생의 휴식기를 보내려고 온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후기를 읽고 나니 갑자기 종소리가 '뎅!'하고 들렸다. 바로 이거다. 제주도 한달살기를 하는 거야.


바로 숙소 찾기에 돌입했다. 백수이므로 너무 비싼 숙소는 안 된다. 장롱면허 뚜벅이라 너무 외진 곳도 안 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며 힐링이 절실한 상처 입은 영혼이니 너무 무드 없는 곳도 안 된다. 열심히 찾아보니 알맞은 곳이 있었다. 적당한 가격에 바다도 가깝고 초록색 경치도 펼쳐진 곳. 버스 노선도 충분히 있고 생필품 쇼핑을 하러 걸어서 갈 수 있는 곳. 게다가 시집간 동생이 살고 있는 동네와 버스로 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었다. 이미 예약이 찬 숙소들이 많았기 때문에 고민하다가 놓칠까 봐 주인에게 바로 전화해서 예약을 하고 예약금을 보냈다. 오랜만에 벅차올랐다. 남은 두 달은 지옥 같겠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시간은 가겠지. 어서 그 순간이 오기를!


그동안 해외여행은커녕 국내 여행도 제대로 간 적이 없다. 나 홀로 한 달이나 어디론가로 떠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여행 준비, 비행기표 예약, 공항 수속 등은 해본 적이 많이 없어서 서툴다. 그러나 다가올 낯선 경험이 설레어 온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시간이 흘러갔다. 마치 학창 시절 단거리 선수였던 내가 선수가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장거리 종목에 출전했을 때, 마지막 한 바퀴를 남겨두었던 순간이 생각났다. 문득 화가 치밀어 올라서 뛰는 걸 멈추고 걸었는데, 선생님이 트랙으로 나를 데리러 왔다. 그러나 이젠 아무도 나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 마지막 힘을 쥐어짜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제주도로 떠나는 날은 맑았다. 뉴스에선 장마가 끝이라고 했다. 공항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좋아하는 글레이즈드 도넛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늘 배웅만 하러 왔지 직접 떠나지는 못했던 지박령 같았던 나. 그러나 오늘은 내가 떠나는 날이다. 행복한 백수는 택시 기사님이 들다가 깜짝 놀란, 6 킬로그램이나 초과되어 추가 금액을 내야 했던 캐리어를 톡톡 두드리며, 아침 햇살을 가득 맞으며 '하하하!'하고 크게 웃고 싶었다. 사람들이 놀랄까 봐 마음으로만 웃었지만, 입꼬리가 자꾸만 찢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제주도에 도착하니 장마가 언제였냐는 듯 뜨거운 햇살이 온 세상을 내리쬐고 있었다. 폭염. 그것도 좋지. 찬란하기만 하다면 폭염 따위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이 빛나는 여름날에, 오래 눅눅했던 지친 나의 마음을 한번 바짝 말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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