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이 부서지고 난 후에

가장 사랑했던 순간

by JEMMA

하늘이 조금씩 붉어진다. 카페 안에서 책을 읽거나 바다를 내다보다가 슬슬 짐을 챙겨 일어난다. 제주도를 떠날 날이 점차 다가오자 숙소 안에서만 감상하던 노을을 더 가까이서 보려고 어느덧 이 시간이 되면 바닷가에 나오기 시작했다. 7시가 훌쩍 넘어 일몰 시간이 되어도 폭염은 여전하다. 밖으로 나오니 더위에 몸이 짓눌리는 것 같다. 양산을 쓰고 걷는다. 이 더위에 걷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서 온 사방이 고요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정적 속에서 해만 조금씩, 조금씩 아래로 내려온다.


바닷길을 따라 걷는다. 아무도 없는 밭, 인기척 없는 민가를 지나간다. 바다엔 저 멀리 배들이 소리 없이 일렁일렁 떠 있다. 가끔씩 비행기도 지나간다. 카페나 식당이 있는 곳엔 간간이 사람들이 보인다. 계속 걷는다. 갯강구들이 이리저리 빠릿빠릿 움직인다. 가끔씩 보이는 작은 게는 느릿느릿 필사적으로 달아난다.


마침내 온통 붉어지면 걸음을 멈추고 해가 사라지는 모습을 본다. 해는 소리 없이 불타며 서서히 지평선 아래로 사라지려고 한다. 부서져 내리는 하늘의 주황빛이 바다와 방파제와 담벼락과 지붕과 내 몸에 튄다. 온통 붉은 세상이 음소거가 된 듯 숨을 죽이고 아래로 고요히 가라앉는 해를 지켜보는 것 같다. 해는 그렇게 저물어 갔다.


조금씩 사라지는 해의 동그란 몸을 갑자기 붙잡고 싶었다. 붉은빛에 갑자기 타오른 찰나의 절망. 그 감정은 뭐였을까. 이 기분이 들던 때가 있었다. 화장터 가마의 시뻘건 불 속으로 관을 보내주어야 했을 때. 때가 되었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붉은빛을 보는 순간 붙들고 싶은 마음이 체념 속에서 돌연 불똥처럼 튀어 올랐다. 그러나 막을 수 없었다. 그대로 사라지도록 보내야 했다.


그런 마음이 드는 때는 그 이후에도 있었다. 노을을 볼수록 기억이 났다. 지난날의 붙들고 싶던 마음. 반짝 타올랐다 사그라진 불티들. 허락되지 않아서, 용기가 없어서, 나약해서, 빼앗겨서, 그 정도까지는 사랑하지 않아서 놓쳐버린 모든 것들. 노을은 그 모든 기억을 되살려 놓고 대지를 붉게 물들이고는 바다로 조금씩 스며들어 간다. 노을의 주황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려고 한다. 가지 마라. 가지 마. 무력하게 만류해 본다. 소용없다. 보랏빛 어둠이 점점 짙어진다.


바로 이때, 지평선 여기저기서 불빛이 켜진다. 한치잡이 배의 집어등이다. 불빛은 캄캄한 밤 내내 머물러 있다. 숙소로 들어가 창문을 내다보아도, 새벽에 자다가 깨서 거실 커튼을 젖히고 바라보아도 여전히 있었다. 하늘이 다시 밝아올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숨 막히는 더위. 사방에 가득한 붉은빛과 정적. 해가 사라질 때 떠오르는 불빛들. 붉은빛이 부서지고 난 후에는 밤새도록 사라지지 않는 한치잡이 배의 불빛들이 있다. 제주도에서 내가 가장 사랑했던 광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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