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살기 종료
시간은 야속하게도 잘도 흘러가 어느새 숙소 체크아웃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올 때 캐리어가 너무 무거워서 오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짐을 대부분 택배로 부쳤다. 마지막으로 동생 집에서 며칠 묵었다. 한달살기 기간에 완전히 혼자였다면 나름 고독한 맛이 있었겠지만 가끔씩 동생과 제부와 만나서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외롭지 않고 좋았다. 동생은 내가 제주도에서 지내는 동안 출산을 했다. 그래서 갓 태어난 조카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이제 육지로 나가면 자주 보기 어려울 테니 아쉬웠다.
동생 집에서 묵은 후에는 제주 시내 호텔에서 며칠 지내고 집으로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좋은 호텔에서 호캉스를 하며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카페와 식당을 돌아다니며 먹부림을 하느라 예산을 훨씬 초과했기에 비싼 호텔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저렴한 호텔에서 2박 3일 동안 묵기로 했다. 호텔에 들어서니 단체 관광객들이 캐리어를 주욱 세워놓고 퍼질러 앉아 수다를 떨고 있다. 외국인 내국인 할 것 없이 다들 일행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나는 혼자 체크인을 하고 숙소에 짐을 풀었다. 생애 첫 나 홀로 호텔 묵기인데 외롭다기보단 뭔가 설레고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과 함께 여행을 오면 일정이 있는데 난 일정도 없다.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여기서 그냥 퍼질러 자도 되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서 아무거나 사 먹어도 되고 몇 시에 들어오든 내 마음이다. 일할 때 그놈의 일정과 마감일에 환멸이 났는데, 지금 나는 호텔 침대에 드러누워 마음껏 시간낭비를 하고 있다.
느긋하게 짐을 풀고 본격적으로 제주 시내를 돌아다니려고 밖으로 나왔다. 인스타에서 점찍어 둔 디저트 가게에 갔다가 지하상가에 가서 지인들에게 줄 기념품을 샀다. 마지막 도서관. 마지막 카페 투어. 마지막 제주도 시내버스. 아쉽다. 아쉬워서 계속 여기저기 어슬렁거리다가 호텔 주변으로 가서 저녁을 먹을 곳을 찾았다. 치킨이 먹고 싶은데 왠지 치킨집에는 혼자 들어가면 주목받을 것 같아서 포기했다. 조금 더 기웃거리다가 결국 그랜드 하얏트 호텔의 거대한 전광판이 내다보이는 맥도널드에 가서 상하이스파이시를 주문했다. 사방에 온통 중국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한국어는 들리지 않았다. 떠들썩한 중국인 관광객들 사이에서 고독을 씹으며 햄버거를 먹었다.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에 호텔의 휘황찬란한 불빛이 번쩍이는 광경을 보며 햄버거를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상쾌하고 좋다. 수다 떨 상대가 없어서 심심하긴 하지만 그만큼 주변 경치를 더 세세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어서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한달살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주일살기'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에서 그냥 시간 보내기는 아쉬워서 편의점에 들어가서 편육과 감자칩과 레몬이 들어있는 하이볼을 샀다. 나는 평소에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다. 대놓고 술을 마구 마실 수는 없는 배경에서 살고 있고, 딱히 그것을 거스를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끔씩 몰래 혼자 한 캔 정도 마신다. 나만의 소소한 일탈 방식이다. 야식거리를 사들고 호텔에 돌아와서 텔레비전을 켰다. 채널을 돌리니 내가 좋아하는 '풀어파일러'가 나온다. 후다닥 씻고 나와서 야식을 먹으면서 풀어파일러를 봤다. 이번 한달살기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고 하면 첫 번째는 노을 투어, 두 번째는 숙소 근처 샌드위치 파는 카페, 그리고 세 번째는 희한하지만 돌아가기 전 호텔방에서 편육과 하이볼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본 바로 이 시간이다. 왜 이게 좋았을까. 이때 들었던 기분 때문인 것 같다. 외롭지만 홀가분하고, 심심하지만 왠지 설레었다. 혼자서 호캉스를 하며 힐링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었다. 앞으로 이따금씩 비싼 호텔은 아니더라도 이렇게 나름의 호캉스를 해야겠다.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이륙 시간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녁이었다. 비행기를 타며 마지막 제주도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나를 사로잡았던 그 주황빛이 정다운 제주도의 경치를 가득 물들이고 있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제주도의 노을. 이 치유의 빛을 잊지 않고 마음속에 오래 간직해 두어야지.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하고, 이내 전속력으로 달린다. 그리고 바다 위로 날아오른다. 내가 사랑했던 한치잡이 배의 불빛들 위로. 아쉽고 아쉽다.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쉬었던 나날이 이제 끝이 났다.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사랑했던 경치를 선물로 안겨주는 제주도의 다정함을 마음 가득 채우고 돌아간다.
착륙.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와서 불을 킨다. 꿈을 꾼 것 같다. 내일 아침부터는 다시 파란 바다와 알록달록한 지붕 없이, 야자수 정원과 초록색 풀밭 없이 빽빽한 주거지의 작은 방에서 하루를 시작하겠지. 그러나 눈을 감으면 무수한 수딩 시너리들이 펼쳐질 것이다. 그러니 잘 살아보자.
브라보, 마이 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