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백수의 유익한 백수 생활

자발적 가택 연금과 번역가 코스프레

by JEMMA

덥다. 에어컨을 계속 켜고 있으면 전기세가 많이 나올 텐데. 백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껐던 에어컨을 다시 킨다. 가끔씩은 에어컨이 빵빵한 동네 대형 카페에 가서 최대한 버티다 온다. 백수라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밖에 못 사 마셨다. 그러나 그동안 내가 이 카페에서 쓴 금액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넓은 아량으로 봐주길 바란다.


자체 감금되어 집에 틀어박힌 채 번역 수업을 들었다. 번역은 어린 시절 나의 꿈이었다. 그러나 방황하며 인생을 돌아가느라 이루지 못했다. 이제는 멀어진 꿈이지만 본업이 아니라 부업, 아니면 취미로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에 수업을 듣기로 했다. 매주 과제가 있었고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꽤 많은 시간이 들었다. 공들여 번역 과제를 하고 나면 나름대로 뿌듯한 마음이 들지만, 그다음 시간에 피드백을 듣고 내 번역이 정말 구리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는 영어만 못하는 게 아니라 한국어도 못하는구나. 0개 국어를 하는구나. 하하하.


화가 나지만 누굴 탓하랴. 그래도 행복하다. 일할 땐 엄두도 못 내던 일이 아닌가. 내 번역 실력이 형편없다는 것만 빼면 즐겁다. 어릴 때 진작 시작했더라면 지금쯤 본업으로 하고 있었겠지? 그랬으면 지금보다 훨씬 즐겁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힘들고 싶고 화내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화내고 싶다. 때려치울 거라고 투덜거리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투덜거리고 싶다.


여러 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흥미도 없는 일을 업으로 삼으며 사는 삶은 마치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 결혼해서 억지로 결혼 생활을 이어가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착하고 말았다. 천성이 겁과 걱정이 많은 편이라 함부로 도전하거나 악바리 같이 물고 늘어지지도 못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뛰어들진 못해도, 발이라도 살짝 담그고 싶은 마음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다.


번역을 하려면 영어 실력뿐만 아니라 국어 실력도 있어야 한다. 함께 수업을 듣는 사람들 중에는 에디터 등 글을 많이 쓰고 다듬는 일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이 번역한 것을 보면 우물에서 나와 바깥세상을 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생각도 못한 단어와 표현을 써서 맛깔스럽게 번역해 놓은 글들을 보자니 초라한 내 실력에 시무룩해졌다. 그래도 남들이 한 번역을 열심히 주워 담아 컴퓨터에 저장해서 모두 읽어보았다. 이 사람은 어디서 이런 표현을 배웠을까? 이런 문장은 어떻게 쓸 수 있었을까? 궁금했다. 독서와 글쓰기를 더 많이 하기로 다짐해 본다.


그렇게 나의 백수 생활은 끝나가고 있었다. 약 3개월 동안 집에 틀어박혀 번역가 코스프레를 하며 알찬 시간을 보냈다. 6개월 할부로 이북 리더기도 사서 독서도 했다. 돈 걱정만 아니라면 주욱 이대로 살아도 될 것 같은데. 그놈의 돈. 밖에는 거의 나가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얼음을 띄운 미숫가루와 카누로 만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면서, 전기세 걱정을 하며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하며 자가 격리 생활을 하는 동안 어느덧 여름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왔을 때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쌀쌀한 어느 가을날이었다. 도무지 갈 것 같지 않던 무더위가 마침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백수 종료 D-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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