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치는 세상과 플랜 A
늦은 밤 핸드폰이 울렸다. 낮에 면접을 보고 온 곳이다. 발표 울렁증 때문에 면접을 기대보다 못 봐서 기분이 별로였는데 연락이 와서 출근하라고 한다. 이틀 후에 가서 계약서를 쓰고 약 2주 후인 11월부터 정식 출근하기로 했다. 퇴사한 지 4개월 만에 백수 생활은 끝이 났다. 이제 2주 동안은 아무 걱정 없이 놀아야겠다.
40이 몇 년 남지 않은 이 시점에 결국 맨땅에 헤딩할 용기는 내지 못했다.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기에 고민 끝에 결국 하던 일을 이어나가면서 여러 가지 배우고 싶은 것들을 공부해 보기로 했다. 영어 번역이나 글쓰기를 비롯하여 흥미 있는 분야들을 조금씩 도전해서 최종적으로는 독립해서 N잡러의 삶을 살고 싶다. 그러려면 자기 계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는 곳을 직장으로 선택해야 했다. 지난 직장에서는 퇴근 후 내 생활이란 꿈도 꾸지 못했다. 자기 계발은커녕 집안일과 생필품 쇼핑 등 기본적인 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새로 얻은 직장은 업무 강도가 훨씬 상식적이라 좀 더 사람답게 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열심히 일하고 40대가 되면 독립하고 싶다.
오랜만에 지인들과 교외로 놀러 가려고 집을 나섰다. 어둑어둑한 게 어째 날씨가 좋지 않은 것 같다. 현관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마자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폭풍 같은 바람이 불어닥쳐 머리카락이 드래곤볼의 초사이언처럼 솟구쳐 올랐다. 마구 내리는 비가 바람을 타고 달려들어 고데기로 말아 올린 내 앞머리를 공격해서 다 망쳐버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을 트네 마네 하며 궁상을 떨었는데 이젠 긴 팔에 점퍼까지 입었는데 너무 춥다. 달달 떨면서 약속 장소로 향했다.
경치가 좋은 감성 카페에서 햇살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고 캠핑장 느낌이 나는 식당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로 했는데 날씨 때문에 다 망했다. 오늘을 정말 기대하고 있었는데 도대체 왜 놀러 갈 때마다 이러는지 모르겠다. 항상 내가 쉬는 날마다 비가 오는 것 같다. 예전에 친구 한 명은 나를 놀리려고 비 오는 날에 연락해서 혹시 자기네 동네에 왔냐고 물어보고, 본인이 놀러 가는 날에 그 지역에 오지 말라고 카톡을 보내곤 했다. 웃기면서도 약이 오른다.
"... 참 나. 내 인생 같네."
중얼거리며 흐린 날씨를 내다본다. 나름 운치가 있다고 애써 쉴드를 쳐 주려고 했는데 파라솔이 날아가 버린다. 음, 쉴드 실패. 예쁜 감나무와 시골길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 있는 날씨가 아니다. 그렇다고 사진을 찍지 못할까?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래도 사진을 찍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예쁘게 나오려고 모자도 벗고 포즈도 취하고 정성을 들였지만 점점 모자를 뒤집어쓰고 앞머리 정리도 하지 않고 그냥 찍었다. 그런데 사진마다 웃느라 광대뼈가 승천해 있다. 진짜 못생겼다.
날씨는 구리고, 내 사진은 못생겼고. 그래도 난 즐거워서 광대가 튀어나오도록 웃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사진을 찍었다. 삼겹살도 배 터지게 먹었다. 이만하면 좋은 하루를 보낸 거라고 할 수 있다. 솔직히 날씨가 좋으면 좋겠다. 날씨든 계획이든 기대했던 대로 좀 흘러갔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긍정적으로!'라는 태도는 모범적이긴 하지만 이젠 지긋지긋하다. 그렇게 사는 삶은 여전히 차선일 뿐이다. 난 여전히 앞으로 펼쳐질 삶이 플랜 B, 플랜 C, 플랜 D가 아닌 플랜 A로 전개되기를 바란다.
"비 좀 내리지 마!"
앞으로도 계속 외칠 말이다. 그러나 비 오는 날을 두려워하지는 말자. 이제 또 흐린 날을 헤치며 살아가야 한다. 잘 될까? 또 실패할까? 조바심이 난다. 하지만 일단 발을 내딛지 않으면 결과조차 알 수 없다. 험한 날씨에도 밖을 나서지 않으면 광대가 승천할 일도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나쁜 날씨 때문에 플랜 B가 되어버린 내 삶을 긍정적으로 보듬어서 플랜 A로 끌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방법이라는 걸 깨달았다. 삶의 폭풍우는 뭔가를 고려하며 찾아오지 않는다. 온실 속 화초를 계속 그대로 평온히 내버려 둘 수도 있고, 안 그래도 서러운 잡초만 집중공격해서 두들겨 팰 수도 있다. 복불복일 수도 있고, 인과응보일 수도 있고, 한없이 공평할 수도 또는 불공평할 수도 있다.
플랜 A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그러니 플랜 A대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좌절하여 쓰러지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플랜 A가 실패하면 화를 내자. 화내는 건 내 마음이니까. 그리고 플랜 B를 만들자. 플랜 B, C, D로 되지 않는다면 플랜 Z까지 만들자. 모자라면 플랜 가, 나, 다, 라, 1, 2, 3, 4까지도 만들자.
좋은 날. 비 와서 화낸 날, 달달 떤 날, 광대 승천한 날, 앞머리 망한 날, 빗발치는 날씨에 점퍼 모자를 둘러쓰고 사진 찍은 날. 날씨는 좋지 않았다. 오늘은 플랜 B였다. 그러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