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코스

파란만장했던 운전면허 취득기 2

by JEMMA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에 운전면허 시험 스트레스까지 겹쳤다. 피난처가 없는 기분이다. 퇴근해 봤자 일해야 하니 퇴근하는 낙도 없고, 주말이 와 봤자 운전면허 시험 치러 왕복 2시간이 넘는 거리를 꾸역꾸역 갔다가 또 일을 해야 하니 주말을 기다리는 낙도 없다. 이번에 또 떨어지면 시험관이 날 계속 구박한 것을 컴플레인 걸어서 다른 학원에서 시험을 치게 해달라고 할 생각이다. 찾아보니까 가능하기는 한데 잘 안 해주는 모양이다. 하지만 진상을 부려서라도 반드시 시험장을 옮길 것이다.


하지만 시험장을 옮겨달라고 진상 부릴 힘도 없다. 그러니 꼭 합격하자는 마음으로 유튜브를 찾아보니 내가 다니는 학원에서 도로 주행 코스인 A, B, C, D 코스를 올려놓았다. 주중에 보려고 했지만 시간이 안 났다. 결국 금요일 퇴근 후 일을 좀 하고 자정이 넘어서야 영상을 볼 수 있었다. 영상 속 차의 주행을 외워서 그대로 따라 하려고 어디서 몇 차로로 가는지, 언제 차선을 바꾸는지 등을 계속 반복 재생해서 봤다. 코스 별로 외울 때까지 보다가 C코스까지 봤는데 벌써 새벽 3시 반이었다. 내일 7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D코스는 내일 버스에서 봐야지. 결국 잠이 들었다.


다음날 면허 시험을 치러 가려고 버스를 탔다. 그런데 D코스 영상은 보지 못했다. 버스 안에서 1시간 동안 곯아떨어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어깨와 목이 불편하기도 하고 심리적으로 신경이 쓰여서 평소 시내버스에서는 한 번도 잔 적이 없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중요한 날에 아예 기절을 해 버렸다. 눈을 뜨니 모르는 곳이었다. 아니야, 아니지? 설마. 간절한 마음으로 버스의 안내 음성을 들었다. 운전면허 학원을 훨씬 지나친 역이다. 도대체 나에게 왜 자꾸 이런 시련이 닥치는 건지.


일단 내렸다. 버스에서 내리는데 두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리고 입가가 저절로 실룩거렸다. 30대 중반 나이에 길바닥에서 울게 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 아니다, 난 우는 게 아니다. 그냥 눈물이 나는 거야. 일단 카카오 택시를 부르자. 다행히 택시는 곧 잡혔고, 간당간당하게 시험장에 도착해서 헐레벌떡 들어갔다. 가자마자 내 차례여서 D코스 영상은 끝내 볼 수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서 랜덤으로 코스를 뽑았다. 제발 D코스만 안 나오게 해 주세요. A, B, C코스 세 개나 있잖아요. D코스만 안 나오면 되잖아요. 제발, 제발.


D.


화면에 얄밉도록 대문짝만 한 알파벳 대문자가 떴다. 어처구니가 없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새벽 3시 반까지 버티지 말고 그냥 잠이나 잘 걸 그랬다. 오늘도 불합격이네. 정말 웃기는 인생이다. 운전면허 시험에 이렇게 많이 떨어진 사람이 또 있을까. 한숨을 내쉬며 출발했다. 어차피 떨어졌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D코스는 유턴이 없고 우회전만 잔뜩 해야 한다. 나는 유턴은 괜찮은데 우회전을 못해서 D코스를 제일 싫어했다. 망할 D코스. 화가 난다. 그래도 화내지 말자. 어차피 불합격이니까. 이따가 시험장 바꿔달라고 싸우려면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니까.


그런데 시험관은 오늘 날 붙여 주려고 단단히 결심을 한 모양이다. 옆에서 못마땅하다는 눈총과 무언가 억누르는 콧김을 내뿜는 게 느껴지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실수를 하려고 할 때마다 브레이크를 턱, 턱 밟았다. 그러고는 옆에서 따가운 시선을 보낸다. 내가 너무 많이 떨어지면 학원의 합격률이 떨어질까 봐 그런 걸까? 아무튼 시험관은 오늘 나를 구박하지 않았다.


자포자기하고 난 후 찾아온 평안함과 시험관의 인내와 침묵 덕분인지 우회전 구간들도 무사히 지나갔다. 마지막 신호등. 마지막 직진. 마지막 깜빡이. 마지막 파킹. 합격했다는 음성이 들린다. 그제야 시험관이 축하한다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서 차 몰기 전에 연습 많이 하라고 한다. 어안이 벙벙하지만 합격이라는 생각에 모든 시름이 날아간다. 나는 신이 나서 인사를 하고 데스크로 날듯이 뛰어갔다. 내가 합격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데스크에 앉아 있던 직원들이 웃으면서 다 일어나서 "축하드립니다!" 하고 외친다. 그러더니 휴지와 물티슈 같은 선물을 잔뜩 챙겨주며 박수를 쳐주었다. 이거 원래 이렇게 해주는 걸까, 아니면 나 많이 떨어진 거 소문난 걸까. 시험 후에 진상 부리면서 싸우려고 단단히 마음먹었던 나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감사합니다앙~ 호호홍!"


운전면허증 수령에 대해 안내를 받고 학원을 나왔다. 학원 주변에 있는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핸드드립 커피와 감자 샐러드가 잔뜩 올려진 빵을 사 먹었다. 강을 바라보면서 마시는 아이스커피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미처 준비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던 내게 들이닥친 D코스. 그러나 오히려 평안했고, 오히려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D코스는 내게 시련의 코스이자 환희의 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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