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의 영감을 사랑한다
아무 일정도 없는 토요일 아침, 이른 폭염에 일찍 눈을 떴다. 주중에 계속 하천길 생각이 났었다. 산책을 못 한지 꽤 되었기 때문에 일하면서 주말에 산책로를 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37도에 달하는 살인 더위지만, 오늘 가지 못하면 또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가보기로 했다.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면 1인용 스터디 좌석이 있는 카페가 있으니 거기서 쉬면서 독서와 글쓰기를 하고 오기로 했다.
하천길로 들어서니 5차선의 매연과 도시의 소음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풀과 나무와 물과 새들이 가득한 세상이 펼쳐져 있다. 강렬한 햇살이 사방으로 부서져 내리고, 빛나는 파편은 나뭇잎에, 개울물에, 길 위에 떨어져 만물을 반짝반짝 빛낸다. 평소에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이런 날에 무지막지한 더위를 뚫고 나온 사람은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이어폰을 뺐다. 간간이 새소리와 물소리가 들리는 것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지난겨울에 그리워서 간절히 기다렸던 눈부신 대낮의 적막이다.
여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덥다고 여름을 좋아하지 않아서 혼자 좋아하기 외롭다. 하지만 여름은 초록빛 풍경들로 가득 차 있고, 사계절 중 가장 강렬하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의 때라고 할 수 있겠다. 한 해의 절정인 이 계절의 뜨거운 열기가 때로는 버티기 힘들지만 이 강렬한 햇살의 반짝임과 무성한 초록색 잎사귀들, 그리고 생기가 돋아난 만물의 생명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메마른 감성이 다시 푸릇푸릇 돋아나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계절이다. 언제부턴가 바싹 말라비틀어져, 영감이라고는 한 톨도 나지 않는 삶에 던져져 있었다. 글쓰기를 좋아하고 여기저기서 아름다운 것들을 끌어모으기를 좋아했던 나는 언제부턴가 사라져 버렸다. 소설을 좋아하던 나는 어느새 신문기사나 비문학 장르만 골라 읽었고 책꽂이의 책들은 먼지가 쌓인 채 방치되어 있었다. 전에는 새벽까지 글을 쓰며 설레곤 했다. 글쓰기란 내 회색빛 삶을 이런저런 색깔로 물들여주는 물감과 빛이었다. 그러나 삶에 크게 실망한 이후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일기장은 하얀 여백으로 남아 있었고, 블로그는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여름이 오는지 겨울이 오는지도 모를 정도로 무심히 살아가던 나날들.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삶이었다. 마음껏 발산하고 싶던 영감과 에너지는 깊은 잠에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긴 터널 밖으로 나온 날에 오랜만에 여름날의 햇살을 만끽해 보았다. 따사롭다. 뜨겁다. 꿈틀꿈틀 잎사귀들이 뚫고 나오려고 한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던 내 안에서 영혼이 깨어나고 싶어 했다. 내 설렘. 내 영감. 산산이 부서진 줄 알았던 나의 소망. 다시 돌려받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름이 오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글을 쓰고 싶다.'
다시 살아나고 싶다. 다시 발산하고 싶다. 다시 이 삶을, 영원을, 영혼으로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추한 것들을 바라보고, 흡수하고, 내보내고 싶다. 사랑했지만 미워했던 모든 일들을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
마음을 먹으니 열망은 더욱 강렬해졌다. 계절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저 쓰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한참 동안이나 쓰지 못했다. 마치 실어증에 걸린 듯 글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내 안 어디선가 걸린 채 너덜거리기만 했다. 어느 날은 날이 밝도록 키보드를 두드려대며 써내려 갔지만, 아침이 밝아올 때 화가 나서 전부 지워버리고 말았다. 다시 깊은 절망에 빠졌다.
일 년 전 제주도 한달살기를 갔을 때, 숙소에서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저 소파에 앉아 창 밖 경치만 주야장천 바라보았다. 카페에서 먼바다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에 홀로 걸으며 노을을 응시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상처 입은 영감을 소생시킬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다. 분명 저절로 삐져나올 순간이 올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침묵의 시간이 흘러갔다.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올해 봄, 브런치에 첫 글을 썼다. 그로부터 3개월 정도가 지나 다시 여름이 되었다. 다시 조금씩 글이 쌓여가고 있다. 아직 내 글은 '실어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생각대로 글이 써지지 않아 답답하고 괴로울 때가 많다. 하지만 계속 쓸 생각이다. 글쓰기는 내게 유한한 것 너머 무한한 것을 보게 하는 영혼의 창문이며, 고질적인 염세를 녹여 자신과 타인을 향한 상냥한 마음으로 바꾸어주는 보호 장치이기 때문이다.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며 독서에도 다시 관심이 생겼다. 특히 예전에는 관심이 없던 다른 사람이 쓴 수필에 마음이 생겼다. 앞으로 더욱 풍성한 글을 쓰기 위해 훌륭한 수필과 에세이를 많이 읽어보려고 한다. 브런치에도 좋은 글들이 많이 있다. 모든 글을 다 읽지는 못하지만, 내가 라이킷을 누르는 글들 중 대충 읽는 글은 없다. 글을 쓰는 것도, 다른 작가들의 글을 소중히 읽는 것도 내 삶을 정화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내가 쓴 글이 대박이 나고 소문나기를 바라지 않는다. 아직은. 아직은 멀었다. 사실 그런 날이 오지 않는다 해도 별로 상관이 없다. 나의 목적은 언젠가 영혼의 실어증을 극복하는 것이다. 극복하기까지 이런저런 옹알이를 하는 중이다. 그러니 브런치의 내 글들은 '실어증 극복기'이다. 나의 옹알이를 함께 해 주시는 분들께 순간순간 삶의 다정함이 깃들기를 기원한다.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