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누나

미산트로피를 소멸하는 마법의 주문

by JEMMA

부글부글 끓는 마그마가 튀어나와 용암이 되려고 한다.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은 요즘, 나는 강강약강의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혼자 있고 싶다. 혼자 일하고 싶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고 싶다. 나의 미산트로피(misanthropy)가 살아나려고 한다. 잘난 체하느라 신나서 남들 마음 상처 주는 게 싫다. 견해가 달라도 존중해주려고 한 건데 눈새처럼 자기가 더 우월하고 남이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게 싫다. 좁은 식견으로 선무당처럼 설치면서 남 흠만 지적질해 대는 게 싫다. 본인이 먼저 무례하게 행동한 건 알지도 못하고 남이 화내면 상처받거나 마음 상해하는 게 싫다. 정말이지 넌덜머리가 난다.


출근길에 자그마한 공방들이 늘어서 있는 구역을 지나간다. 그곳에서는 옷, 그림, 책, 꽃, 핸드폰 케이스 등 다양한 것들을 팔거나 전시하고 있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을 때 일부러 이곳을 지나치며 주변을 둘러본다. 모두 각자의 고충은 있겠지만, 좋아 보인다. 저기 종이로 만든 제품들을 늘어놓은 어떤 공방 주인은 믹스커피를 홀짝거리며 열심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다.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월세나 생활비 걱정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기가 재능이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삶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왜 이렇게 부러운지 모르겠다. 당장 사표를 던지고 나도 나만의 공간을 차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아직 때가 아니다. 홀가분하게 날아가버리기 위해 버텨야 하는 시간이 있다. 이를 악물자. 마그마 밀어 넣어라. 무조건 참아야 한다. 인생길이란, 인내의 연속이다. 갈등의 연속이다. 정신줄을 확 놔버려? 참아? 놔버려? 참아? 그러다 온갖 힘을 끌어모아 인내한다. 초인적인 힘이다. 밑천 없어 보여도 어디서든 모르는 곳에 숨겨진 힘이 있나 보다. 공방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걷는다. 이상하게 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혼자가 되는 날을 위해, 좀 더 힘을 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오늘도 무표정으로 수업에 들어간다. 요즘 중력이 더 세졌나? 입꼬리 올리기가 쉽지 않다. 걸어오는 천진난만한 장난에도 안면 근육이 좀처럼 올라가지 않는다. 늙어서 살이 처지는 건가? 아무튼 웃기 힘들어졌다.

징징이.jpg 혼자 있고 싶어요.


"선생님, 저 말해도 되나요?"

"아니요."

"할 말 있는데..."

"중요한 말인가요? 수업과 관련된 말인가요?"

"아니요."

"네, 안 됩니다."


그러자 시무룩해진 두더지는 입을 비죽거린다. 하지만 나는 오늘 두더지 게임을 하고 싶지 않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두더지들을 후려칠 힘이 없기 때문이다. 종종 학생들에게 내가 꼭 두더지 게임을 하는 것 같다며 너희들은 다 두더지라고 얘기하곤 하는데, 그러면 이 이상한 아이들은 더욱 신이 나서 그러면 다음 시간에 뿅망치를 가져오라고 한다. 어떤 놈은 본인이 직접 뿅망치를 사 오겠다고 한다. 두더지라는 말 괜히 했다. 기가 더욱 빨린다. 이 디멘터 두더지들 같으니라고.


디멘터 두더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부작사부작 까불 준비를 한다. 분노 게이지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두더지를 메두사처럼 노려본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두더지는 완전히 쪼그라들어서 풀이 죽은 표정으로 책에 코를 박고 얌전해진다.


"놓친 거 있으면 바로 손들고 얘기하세요. 이따가 검사할 때 오답 수정 안 되어 있으면 여기서 못 나갑니다. 잘못 고친 거 있으면 비포 용지에 빽빽이 씁니다."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며 오답 수정을 하던 두더지는 내가 말한 정답을 놓치자 다급히 손을 들며 외친다.


"저 다시요, 다시 말해주세요! 이모!!"


3초 정도 정적이 흐른 후 학생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뜨린다. 나를 이모라고 잘못 부른 두더지는 당황해서 황급히 두 손을 입을 틀어막는다. 일부러 시비 걸려고 한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 뭐. 엄마라고 안 한 게 어디야. 사실 별로 화가 나거나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는데, 그냥 요즘 무거워진 중력 때문에 입꼬리가 안 올라간 것뿐인데 내가 웃지 않으니 불쌍한 두더지는 걱정스러운 듯 내 얼굴을 한번 바라본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두더지가 너는 어떻게 그런 것도 모르냐는 투로 속삭인다.


"야... 누나라고 했었어야지."


아, 방심했다. 회심의 공격을 맞은 나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자 공격에 성공한 두더지는 잠시 깜짝 놀라더니 곧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다. 과연 내 제자가 될 만한 두더지다. 명석하고 훌륭한 사람이라며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자 더욱 뿌듯한 얼굴로 헤헤 웃는다. 그러자 두더지들이 와글와글 외친다.


"누나!! 누나!!"


중력이 다시 가벼워진 것 같다. 입꼬리와 광대가 승천한다. 이놈의 두더지들이 오늘 좀 귀엽네.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오랜만에 상냥한 쌤이 되었다. 두더지처럼 나대는 철부지들이 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 때문에 넌더리 난 마음이 사람 때문에 누그러졌다. 나를 꾸준히 화나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정하지 못한 내게 조건 없는 다정함을 베풀어주는 사람도 있다. 조무래기가 던진 가벼운 한 마디에, 인류애가 하루 더 수명을 연장한다.


어떤 사람은 타인을 화나게 하고, 어떤 사람은 타인이 화나게 한다며 화를 낸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화병 난 사람까지도 웃게 한다. 나는 그중 어디에 속할지 생각해 보니, 어디에나 모두 속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누군가를 화나게 하기도, 누군가 때문에 화가 나기도, 또 때때로 남을 웃게 하기도 한다. (그럴 거라고 믿겠다.) 남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인간혐오증이란 돌고 돌며 방황하게 된다. 누군가를 혐오했다가, 다 부질없다는 생각에 포기했다가, 또 격렬히 미워했다가, 그럴 자격 없는 내 모습에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저런 에피소드를 겪으며 미산트로피가 깜빡깜빡 꺼졌다 켜졌다 하는 요즘이다. 희한하게도 등대의 불빛이 떠올랐다. 암흑의 바다 같은 내 마음속에서 붉은빛이 소리 없이 번쩍거린다. 타인의 추함과 나의 추함이 번갈아 떠오른다. 뒤섞인다. 미움 속에서 실체가 낱낱이 보인다. 파헤치는 것까지는 좋다. 이제 그러한 미산트로피로 어떻게 할 것인가. 내 혐오로 타인의 혐오를 후려쳐서 같이 무너질 것인가. 아니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재료로 쓸 것인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마음이라면 등대 불빛 삼아 나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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