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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젬툰 Jul 06. 2017

내리는 비는 잘 못이 없어요. 문제는 땅이지.

요 며칠 소나기가 왔다. 자주 다니던 지하통로가 푹 젖어있다. 통로에 들어서자 아주 낯익은 냄새가 난다. 물에 젖은 콘크리트 냄새. 비 냄새. 어린 시절 시골에 살았을 때는 비에 젖은 흙 냄새가 비 냄새였는데 어느 덧 서울 생활 15년 차에 이르다 보니 흙 냄새는 잊혀지고 콘크리트 냄새에 익숙해졌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 무렵의 퇴근길이었지만 그 비 냄새가 어찌도 향긋하고 반갑던지 지하 통로가 아주 길었으면 하고 바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냄새도 잠시, 스쿠터를 타고 지하 통로를 벗어나니 비 냄새도 함께 나를 벗어 났다. 그리고 곧 터널을 지나는데, 터널 안 아스팔트도 군데군데 비에 젖어 있었지만 비 냄새는 나지 않았다. 비에 젖은 아스팔트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나보다. 아니면 냄새가 희미하거나. 기억할 정도로 냄새가 특별하지 않거나.


똑같은 비가 어디에 적셔지냐에 따라서 냄새가 달라진다는 사실. 흙이냐 콘크리트냐 아스팔트냐. 그에 따라 냄새와 그 냄새가 주는 느낌까지 확연히 달라진다. 친한 형은 요즘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전 여자 친구의 냉랭한 태도 때문에 마음에 상채기가 많이 났다. 시도 때도 없이 나에게 전화하고 메시지를 보낸다. 안다. 다들 그렇다. 실연의 아픔에 몸서리 칠 때는 누군가와의 대화가 절실하다. 그 형은 언제든 어떤 여자 친구를 만나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한다. 정말 유치하기 짝이 없을 정도로 애정을 표현하고 구구절절한 사랑의 문자를 하루에도 몇 통씩 보낸다. 그렇게 뜨겁고 유치하게 사랑하다가 끝낸 연애가 여러번. 그 형의 사랑은 언제나 똑같은데 그 사랑이 스며드는 상대방의 마음이 죄다 아스팔트 같았다. 사랑이 스며든 자리에 향긋한 냄새가 남지 않았고 그저 땅 속으로 흡수되기만 했다. 그리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분명히 몇 달동안 새찬 구애의 비가 내렸는데 그녀들의 마음은 마치 여러날 가물었던 것처럼 메마른 아스팔트일 뿐이었다.


나는 형의 연애 방식이 잘못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비에게는 잘 못이 없다. 어디에 내리느냐가 중요했을 뿐. 아직 향긋한 비 냄새를 풍길 흙을, 콘크리트을 못 만났을 뿐이다. 지금도 밖에는 예고없는 차가운 소나기가 내리고 있다. 비오기가 그치면 나의 퇴근길 지하 통로는 또 반가운 비 냄새로 가득 차겠지. 행복할 것 같다. 비 냄새를 맡으며 퇴근하는 길은. 그리고 그 형도 언젠가 비 냄새가 나는 사랑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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