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월드컵
붉은 악마가 온 거리를 뒤덮던 2002년의 열기가 조금 사그라들었다고 하지만, 거리 응원의 재미와 흥미를 맛본 대한민국 붉은 악마들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거리로 나섰고, 나도 인턴기자라는 직함을 갖고 그 열광의 도가니 한복판에 있었다.
한 매체의 정치사회부 인턴 기자로 근무하던 때였고, '거리 스케치'를 해 오라는 데스크의 명을 받아 동료 인턴 기자들과 거리로 나온 참이었다.
그날 밤에 예정된 경기 응원차 나온 시민들로 광화문 온 거리가 가득했고, 높은 건물 위 전광판마다 우리 태극전사들의 모습이 비쳤다. 축구를 잘 모른다고 해도, 축구에 별 관심이 없다고 해도, 그 날 만큼은 흥분 게이지가 최고조였다. '거리 스케치'를 할 때 무엇을, 어떤 느낌을 잡아내야 하는지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몸과 마음이 신이 나 있는 사람들 모습을 하나하나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미션은 성공이었다.
사무실에서 주신 수첩과 펜을 들고 이 골목길을 따라 내려와 인파에 밀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맞은편 '동화면세점' 앞까지는 어찌어찌 진출하였는데, 더 이상 이동하기는 어렵겠다는 판단이 서자마자 각자 한 자리씩 잡고 취재를 시작하였다. 동료들의 눈과 손은 빠르게 움직였다. 일종의 경쟁심도 작용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어버렸다.
자고로 기자라 하면, 본능적으로 이슈를 포착해서 무엇이든 써 내려가야 할 텐데, 나는 그러한 내적 기질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동료들에 비해 매우 보잘것없는 결과를 제출했던 것 같고, 당연하게도, 동료의 제출본이 선배의 기사에 일부 포함이 되어 기사화되었던 것 같다.
대신, 그날, 나는 광화문 한 구석에 서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이 거리에서 내뿜는 열정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였다.
그때까지 살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간절하게 염원하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 기자의 길에서 한 발짝 더 멀어졌지만), 초여름 저녁녘 습하고 더운 공기마저 무력화시키는, 무엇인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기대감에 한껏 부푼 사람들의 생기 있는 표정과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희망의 염력이 마음속 깊이 새겨져 저기 저 골목길과 함께 이렇게 이따금씩 떠오르는 추억의 한 조각으로 남았으니, 그나마 다행이고,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