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우는 가을밤
몇 개월 전, 이 드라마 관련해서 '추앙하다'라는 단어가 여기저기 SNS에 도배가 되는 걸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빠른 시일 내 봐야겠구나라고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주행을 시작했고, 10화를 보는 중, 이 드라마는 나의 인생 드라마라며 극찬을 날렸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얼마 전까지는 '나의 아저씨'가 인생 드라마라고 하지 않았어?라고 비웃었지만, 뭐 상관없다. 인생 드라마는 갱신되는 법.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한다는 설정 자체가 바로 나의 이야기였고, 주인공 염미정(김지원 역)의 대사 마디마디가 과거의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아파했던 거의 모든 기억의 편린이었고, 염미정의 언니 염기정(이엘 역)의 툴툴거림 역시 과거의 내 모습을 빼다 박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퇴근하니 밤이네. 나의 저녁은 어디로 사라졌지..." 하는 푸념은 셀 수없이 여러 번 했고,
야근에 당첨되었을 때, "일이 힘들 때는 내 옆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있다고 생각하고 일하면 힘이 나요."라고 생각했던 적 솔직히 있었고,
서울의 도심지에서 경기도 동부 끝으로 퇴근하는 버스 안, 기본 1시간은 걸리는 터라, 취향저격의 브금 리스트는 상시 준비해야 했고, 양 쪽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착잡한 마음이 동하여 창 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눈물을 머금은 적도 있었고,
서울로 출근하는 경의중앙선을 타고 도심지로 들어서기 직전까지 펼쳐지는 논밭 뷰 한가운데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거예요."라는 투의 어떤 교회 간판을 본 기억이 있는 것도 같고,
서울 사람들은 “지하철”이라고 한다는데, 나는 “전철”이라고 종종 얘기했고,
귀뚜라미가 세차게 울기 시작하는 부쩍 선선한 가을밤, 퇴근길 우리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리자마자, "코에 들어오는 공기의 신선함은 서울에 비할바가 아니다."는 느낌 역시 매일 체험했던 바였다.
드라마 속에서 묘사하듯, 오늘도, 내일도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아침, 저녁, 붐비는 버스와 지하철에 고단한 몸을 싣고 노른자(서울)와 이를 빙 둘러싼 흰자(경기도) 사이를 오간다. 결혼하기 전까지 대략 10년을 그렇게 출퇴근했던 사람으로서 당당히 얘기할 수 있는데, 그거 정말 고되다. 게다가 날씨가 궂기라도 하면..., 눈 내리고, 비가 퍼붓는 출퇴근 길은 평소보다 1.5배는 더 걸린다.
천만다행으로 회사 근처에서 편하게 출퇴근하는 지금 나는 이상하게도 그때 그 시절이 참 그립다.
그 시절 나는 퇴근길 한 시간 동안 눈을 지그시 감고(잠든 것 아님) 진지하게 고민하며 당면한 문제를 침착하게 정리해 보기도 했고, 경기도 집까지 가는 버스 밖에 펼쳐지는 야경을 바라보며 감성적인 상상을 하기도 했는데, 서울살이 수년만에 마음의 여유는 싹 사라지고, 일상은 무미건조해졌다.
"귀뚜라미가 울 땐 24 도래. 안 단다. 지들도.
조금 있으면 겨울이 온다는 거를.
그래서 저렇게 간절히 구애 중이라는 거다. 겨울을 혼자 있지 않으려고."
1화에서 염기정이 올 겨울엔 아무나하고 사랑할 거라며 읊조렸던 대사처럼, 나도 간절하게 바란다.
가을 지나 겨울이 오고, 다시 봄이 오기 전에 헛헛한 마음을 채워줄 곳을 변두리에서 찾아봐야겠다. 이왕이면 초록색 들판 너머 바다가 보이는 사람들이 덜 찾는 곳으로. 나에게 어울리는 곳으로 가자. 노른자보다 흰자, 복잡한 곳보다 한적한 곳에 마음을 두고 몇몇 사람을 끔찍이 사랑하며 고요하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