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여서 다행입니다.
미국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잠시 한국에 방문해서 만난 자리, 이 얘기, 저 얘기 끝에, 이번 한국 방문 길에 제주도를 한번 가보려고 했는데 여정이 짧아서 가보지 못할 것 같다고 아쉬워하며, 아직 한 번도 못 가봤다길래, 한국에서 대학교까지 나오고 직장 생활도 하다가 대학원을 미국으로 가서 정착한 건데, 제주도를 못 가봤다고? 싶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실은 나도 살면서 제주도에 처음 갔던 때가, 서른이 훌쩍 너머 지금의 남편과 결혼 준비하던 즈음이다.
지금으로부터 7년 전, 태어나서 제주도를 한 번도 못 가봤다고 했더니 토끼눈이 되어 놀라던 그. 말도 안 된다며, 그럼 당연히 거기부터 가야지 했다.
그렇게 시작된 여정. 초행길인 나로서는 전적으로 당신의 안내에 따르겠노라 한터, 비행기 이륙 시간이 남아 잠깐 들른 김포공항 카페에서 그의 가방이 열린 틈으로 빼꼼히 보이는 노트에 뭔가 한가득 적혀있었고, ‘음 그렇지, 암, 역시 믿을만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했다.
제주공항에 내려서 밖을 나서자마자 보이는 야자수 나무를 보고, 대한민국 땅에 야자수 나무가 식생하고 있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저건 야자수 나무랑 되게 비슷하게 생겼다.”라고 하자, 1초도 지나지 않아 그는 “응, 야자수 나무가 맞아^^”라고 했다. 렌트한 차를 타고 체크인할 호텔로 가는 길가 곳곳과 어느 집 마당 한쪽에도 야자수 나무가 있었다.
아, 여기가 제주도구나!
설렘과 기대를 한가득 실은 우리 차는 용담해안도로를 달리며 여정을 시작했고, 나의 첫 제주 여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마음 가는 곳 어디든 차를 멈춰 세우고 걷거나 쉬었다. 밭과 밭의 경계를 이루는 거무스름한 돌로 나지막이 쌓아 올린 밭담과 눈이 시리도록 선명한 초록 밭의 쨍한 대비, 밭담길 따라 이어지는 에메랄드 빛 바다, 고깃배가 드나드는 작은 항구에서 뜻하지 않게 만난 황금빛 노을이며, 평대리 어느 방파제 둑에 앉아 멍하니 바라본 하늘, 풍력발전기가 줄지어 서 있는 월정리 해변 근처 벤치 몇 개가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공원까지.
한 때 이곳에 정착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제주도의 땅과 자연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여자 친구이자 현재 아내가 된 나 역시 여행을 통해 본인이 이곳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을 그대로 느껴보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한다.
김포공항에서 몰래 훔쳐봤던 그의 노트 한가득 적혀있던 건 다름 아니라 제주도 곳곳에 숨겨진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남몰래 아껴두었던 곳.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 진짜 제주.
여행의 마지막 날, 그가 데려간 작은 무인카페.
들어서자마자 눈에 띈 건 모든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던 포스트잇이었다. 그가 능숙한 솜씨로 타 준 커피를 들고 일어서서 한 걸음, 두 걸음 포스트잇으로 가득 찬 공간을 둘러보며 포스트잇에 쓰인 메모들을 찬찬히 읽어 보았다. 커피가 담긴 컵의 온기가 감싸 안은 두 손 그대로 전해지면서, 이토록 고요하고 평온한 제주 여행을 선사한 그가 고마워서, 이 작은 공간을 찾아왔던 따뜻한 사람들이 생각나서 갑자기 두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책상에 놓인 포스트잇을 하나 떼어서 이렇게 적었다.
‘나의 첫 제주 여행이 당신과 함께여서 참 다행이다. 참 잘 왔다. 참 좋다.’
7년이 지났지만, 구석에 붙여 둔 그대로 붙어 있을까? 올 가을, 한번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