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속으로
25년 만의 경주 여행이었다. 최소한 학창 시절 수학여행 코스와는 달라야 하지 않겠어?라는 마음으로 제일 먼저 찾은 곳.
경주 옥산서원. 맑은 계곡 물이 흐르는 한적한 마을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는 학업에 전념하기에 딱 좋은 곳이었다.
속세의 인연을 멀리하고 자연을 벗 삼아 글을 짓고 탐독하는 유유자적한 삶을 꿈꾸는 자, 옥산서원, 그리고 옥산 세심마을로 내려오심이 마땅하옵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 당도하면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무조건 말에서 내려 지나가도록 했다는 옥산서원의 맞은편에서 발견한 ‘하마비(下馬碑)’앞에 서니, 문득, 사극에서 도포 자락 휘날리며 인물이 훤한(*꽤 중요) 양반댁 자제가 학업에 정진할 뜻을 품고 서원을 찾아왔고, 하마비 앞에서 (*슬로 모션 화면 전환) 천천히 내리며, “아… 바로 이곳이로구나!”라고 낮은 목소리로 내뱉는 장면이 떠올랐다면, 아무래도 과몰입이겠지.
걷기 좋아하는 우리 부부는 부릉부릉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세상에 이렇게 한적하고,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이 있었단 말이야? 연신 외치며, 서원 바로 앞에 계곡가로 내려가 산책을 시작했다. ‘세심대’라고 새겨진 큰 바위 주변으로 너럭바위가 넓게 펼쳐져 있는 풍광. 지금이 봄, 아니, 여름, 아니, 가을이 아니라서 다소 빛바래고 황량한 느낌이겠지. 다른 계절에 왔더라면 ‘월매나’ 아름다울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렇게, 계곡가를 따라 윗마을 쪽으로 쉬엄쉬엄 15분 정도를 걸었던가. 조선중기 중종 때의 문신, 회재 이언적李彦迪(1491~1553)이 개인 거처로 지었다던 ‘독락당’이 나타났다. 외롭게 즐기는 공간이라는 뜻일까? 자고로 진리를 깨닫는 길은 외로운 법. 계곡 풍경을 조망하도록 계곡 쪽으로 도드라지게 세워진 정자(계정)가 딸린 곳으로, 사시사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하는 자연 풍광이 정자를 통해 자연스럽게 집안으로 들어온다고 상상하니 이곳 주인은 외로울 틈이 전혀 없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 나오는 길, 산수유나무에 꽃봉오리가 맺힌 것을 보았다. 겨울의 끄트머리인 2월의 마지막 주말, 여기는 벌써 봄을 시작하는구나.
이제 차를 세워둔 옥산서원 주차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는 길은 계곡 길로 왔으니 가는 길은 동네를 지나가 보기로 했다. 봄이 오는 길목이라 정원을 가꾸는데 여념이 없는 어르신의 모습이 빼꼼히 보이는 예쁜 단독주택을 지나 한가롭게 한낮의 볕을 쬐는 동네 고양이를 뒤로 하고, 주차장에 이르렀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고 시동을 건 순간, 생각이 났다. “아 맞다. 근처에 볼 게 하나 더 있어! 아까 다녀온 독락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숨겨진 국보가 있다는데 가 볼래요?” ‘정혜사지십삼층석탑’. 세심마을이 경주 시내와 떨어져 있다 보니 찾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한다. 국보를 독차지하러 슬슬 가 볼까나.
우선, 정말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놀랐고(국보가 있는 곳인데 주차장이 따로 없다.), 근처에 차 한 대를 댈 수 있는, 다들 으레 여기다가 주차한 듯 평평해진 모서리 공간에 주차하고 내리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위엄 있는 탑의 모습. 아…
바로 여기네. 고즈넉한 경주를 기대했다면 반드시 이곳을 들려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찾지 않은 덕분인지 보존이 잘 되어 있고, 켜켜이 13층까지 쌓인 정교한 석탑이 장관인데,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내가 보고 싶은 만큼, 바라보고 싶은 만큼 머무를 수 있어서 좋았다.
경주의 숨은 매력은 옥산서원, 독락당, 그리고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이다.
*참고자료:
문화재청 소식지, 문화재사랑, 2013.6. - ‘자연으로 더불어 마음을 닦고 즐거우리라 - 경주 옥산 세심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