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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영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는다

어른의 언어 습득, 얼마나 걸릴까?

by 만석맘 지은

영어 실력이 기대만큼 늘지 않았다. 얼마나 오래 해야 유창해질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 답을 카피올라니 대학 언어학(Linguistics) 강의에서 들었다.

"이민자가 3세부터 8세 사이에 미국에 도착하면 원어민처럼 영어를 할 수 있습니다. 8세부터 15세까지도 원어민처럼 능숙하지만, 나이가 많아질수록 습득 속도가 떨어집니다. 어른은 상황과 노력, 시간,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학생이라면 5년 정도 공부해야 원어민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4년을 버텨 졸업장을 받았다.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실력이 늘긴 늘었다.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요즘 우리나라 식당에는 외국인 종업원이 많다. 하와이에서 4년을 살아서 그런지 한국에서 생활하는 외국인들이 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종업원을 보면 자연스레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한국어는 영어보다 배우기 어렵다고 하는데, 그들의 한국어 실력보다 내 영어 실력이 부족한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그들은 한국어를 배워 돈도 벌고 있는데, 나는 과연 미국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실력일까? 그 종업원이 존경스러웠다. 단순히 식당 종업원으로 치부하기에 두 개의 언어를 구사하는 똑똑한 사람들이다.


아이들은 빠르고 나는 느렸다


아이들의 영어는 빨리 늘었다. 둘째는 알파벳 b와 d도 구별하지 못했지만, 하와이에 온 지 3개월 만에 택시 기사가 "drop"이라는 단어를 썼다며 나에게 알려줬다. 정작 나는 그 단어를 듣지 못했다. 입시 영어 덕분에 어려운 단어는 많이 알았지만, 아이들과 실력 차이는 빠르게 벌어졌다.

아이들은 원어민처럼 실시간으로 듣고 대답했다. 부럽고, 솔직히 질투도 났다. 내 영어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 같았다. 더 열심히 하면 나아질 거라 믿고 공부했지만, 오랜 시간 앉아 있느라 목과 어깨, 허리만 아팠다. 엉덩이까지 아프면 누워서 책을 보다가, 팔이 저려서 자세를 바꾸면서 열심히 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건가’ 싶어 책을 덮어버릴 때도 있었다.


영어 실력의 끝판왕, 전화 영어


영어 실력 게임의 끝판왕은 전화 영어였다. 얼굴을 마주 보며 대화하는 것도 어려운데, 전화로 영어를 해야 하다니! 전화 영어가 편하게 느껴진다면 영어를 마스터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내게는 여전히 SF 영화처럼 외계인과 대화하는 느낌이었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하와이에서도 휴대폰 앱을 통한 소통이 가능해졌다.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업무는 여전히 전화가 필수였다. 처음으로 자동차 보험회사에 전화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 친한 샐리 언니가 대신해주겠다고 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개인적인 일을 맡길 수 없었다. 언니에게 필요한 영어 문장과 단어를 배우고, 연습한 끝에 통화에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화 영어는 두려운 존재였다.


생존 영어로 실력이 늘다


하와이 생활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기피하던 전화 영어도 해야 할 일이 많아졌다. 이사를 하면서 부동산에 수리 요청을 하고, 인터넷 연결 문제로 통화해야 했다. 코로나 이전에는 이메일 문의가 빠르게 처리되었지만, 비대면 업무가 늘어나면서 답장이 늦어졌다. 결국 급할 때는 전화가 최선이었다.

급하니 용기가 났다. 생존하려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괴로워야 영어 실력이 는다는 것을. 두렵고 귀찮아서 피하면, 아무리 하와이에 오랫동안 살아도 영어가 늘 수 없었다.


어른 영어는 ‘이생도’야


비록 어른의 영어가 아이들처럼 빠르게 늘지 않고, 원어민처럼 되지 못할지라도 ‘이생망’은 아니었다. 가랑비에 옷 젖듯, 어른의 영어도 늘었다. 가끔 현지인들에게 "영어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괜히 뿌듯했다.

어른 영어의 강점도 있다. 살아온 세월만큼 세상 돌아가는 눈치는 빠르다. 정확한 단어를 못 들어도 대충 의미를 파악하는 능력이 생겼다. 이른바 ‘눈치 영어’다. 때로는 헛다리를 짚기도 하지만, 대체로 맥락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영어 실력은 나이와 상관없다. 성격과도 상관없다. 누가 뭐래도 남의 말에 겁먹지 말고, 그냥 도전하면 된다. 더디게 늘고, 잘 안 들리고, 말하기 어려운 시간이 길더라도 좌절하지 않으면 된다. 눈치와 버티기로도 실력이 는다.

완벽을 바라지 말자. 원어민처럼 할 필요도 없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들 수준의 영어만 해도 충분하다. 결국,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써먹고 살 만큼의 영어는 반드시 는다.

그래서, 어른 영어는 ‘이생도’다.

이번 생에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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