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여행
회복탄력성이란 인생의 바닥에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되튀어오르는 비인지능력 혹은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김주환 《회복탄력성》
“바다로 나가자!”
공부하다 벌떡 일어났다. 하와이에 살면서도 즐길 여유 없이 책상에만 앉아 있다니. 수영복과 비치타월, 선크림과 간식을 챙겨 차에 올랐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공부와 숙제, 시험이 쏟아졌다. 엄마는 정신이 없고, 아이들은 컴퓨터와 휴대폰에 빠져 있었다. 숙제와 시험이 아이들보다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하와이에 살면서도 한국처럼 바쁘게만 사는 게 문득 답답했다.
문밖을 나서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집에서는 꼼짝도 않고 체온이 내려간 탓에 가디건을 껴입었는데 밖은 따뜻했다. 따뜻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 온몸을 감싸주었다. 넓고 파란 하늘과 눈부신 뭉게구름을 바라보며 심호흡을 했다. 아이들도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집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알라모아나 해변 공원에 도착했다. 와이키키와 달리 관광객들로 붐비지 않아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곳이었다. 멀리 서핑하는 사람들, 부기보드를 타며 노는 아이들, 잔디밭에서 요가와 근력운동을 하는 사람들. 모두가 여유로웠고,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탁 트인 바다를 바라보니 내 마음도 한결 편안해졌다. 바다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망설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집에서는 그렇게 싸우던 녀석들이 바다에서는 한없이 행복했다. 나는 파라솔을 펼치고 돗자리를 반듯하게 깔았다. 그 위에 드러누우니 뜨거운 모래가 찜질하듯 허리를 감싸며 긴장을 풀어주었다. 편안한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멀리서 재잘거리는 아이들 소리와 파도 소리를 들으니 비로소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하와이에 살면서도 여전히 한국에서처럼 조급했다. 영어가 서툴다고 기죽고, 젊은 유학생들을 보며 조바심이 났다. 육아와 살림도 끝없는 숙제 같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누구도 나에게 그렇게 살라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괜찮아. 영어 좀 못하면 어때? 못해서 배우러 왔잖아. 아이들 밥도 끼니마다 챙기느라 힘들지? 사 먹어도 되고, 가끔 라면을 먹어도 돼. 조금 게을러도 괜찮아. 하와이에서는 조금 느슨하게 살아도 좋아.’
바다는 내 불안을 씻어주듯 잔잔히 밀려왔다. 내려놓는 연습이 필요했다. 하와이 사람들처럼 여유롭게, 조급해하지 않고 즐기기로 했다. 책도 보고 눈을 감고 노래도 들었다. 한동안 떠오르던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들이 달아났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바다에서 실컷 놀고 나온 아이들이 배가 고프다고 했다.
"와이키키로 갈까?"
평소에는 번잡해서 잘 가지 않지만, 때로는 관광객처럼 즐기고 싶었다.
우리는 알라모아나 쇼핑센터에서 와이키키로 가는 핑크 트롤리를 탔다.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를 제시했다. 이층 버스 맨 앞자리가 명당이다. 사방이 탁 트인 풍경을 바라보니 정말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쉐라톤 호텔 근처에서 내려 서핑 보드가 가득한 골목을 지나 비치로 향했다. 알라모아나 해변보다 활기가 넘쳤다. 모래 위에 수건을 깔고 앉아 간식을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멀리서 파란 돛을 단 요트 한 척이 관광객들을 모으고 있었다. 근육질의 긴 금발머리 선장은 마치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그는 맨손으로 큰 요트를 바다로 밀어내고, 힘차게 도약해 요트 위로 올라탔다. 그 모습이 성서에 나오는 삼손 같기도 하고, 마블 영화의 토르 같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말했다. “아빠가 오면 우리도 저 요트 타보자!”
아무리 천국 같은 하와이라도, 일상에 파묻히면 지치고 답답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과 짧은 여행을 떠났다. 트롤리를 타고 북적이는 와이키키를 한 바퀴 돌거나, 해변을 따라 부촌을 구경했다. 배우 이영애가 결혼했다는 카할라 호텔에 가서 돌고래와 거북이를 보고, 2층 레스토랑에서 애프터눈 티 세트를 즐기는 날이면 고급 관광이 따로 없었다.
휴일이면 섬 북쪽, 서핑의 성지 노스쇼어로 향했다. 절벽에서 높은 파도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와이키키보다 더 황홀한 노을이 지는 해변에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는 여행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여행이 되었다. 그 덕분에 지루한 날도 견뎠다. 짧은 여행 속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며, 하와이에서의 삶을 아이들과 즐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