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서, 그래서 더 고마운 날
“엄마, 오늘 학교 안 가면 안 돼?”
아이의 애처로운 눈빛.
“그래, 엄마도 오늘 하루는 쉬자.”
흔쾌히 대답하자 아이는 안도하며 방긋 웃었다. 그 미소 하나에 마음이 놓였다.
하와이에 살면서 놀라운 일 중 하나는 아이들이 좀처럼 아프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에선 감기며 중이염, 장염을 달고 살았다. 특히 환절기에는 병원으로 출근을 했다. 오전에 큰아이, 오후엔 작은아이가 차례로 진료받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하와이에 오기 전엔 걱정이 많았다. 혹시나 싶어 항생제를 미리 받아 챙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4년 동안 서너 번 갔나.
우리는 ‘하와이’ 하면 무조건 더운 나라라고 생각했다. 여름옷만 한가득 챙기고 긴 옷은 얇은 남방 몇 개를 가져갔다.
하지만 하와이 겨울은 생각보다 쌀쌀했다. 특히 2월, 3월엔 비바람이 세게 들이쳤다. 한국의 겨울만큼은 아니었지만, 마룻바닥에 발이 닿을 때면 시릴 정도였다.
밤엔 더 추웠다. 얇은 홑이불만 가져온 탓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급히 두꺼운 이불을 사고, 긴 옷도 장만했다. 그래도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시렸다.
며칠 동안 추운 날씨가 이어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목이 칼칼했고, 콧물이 흘렀다. 작은아이도 비슷한 증상을 보였다. 몸이 으슬으슬한 걸 보니 감기였다.
그래도 주말을 그냥 보내기 아까웠다. 와이키키로 나가보기로 했다. 복잡한 주차를 피하고자 알라모아나 쇼핑센터에 차를 댔다. 그곳에서 ‘핑크 트롤리’라는 2층 버스를 타고 와이키키로 향했다.
그날따라 트롤리 안으로 바람이 거세게 들어왔다. 체온이 뚝 떨어졌다. 다음날, 아이는 본격적으로 감기에 걸렸다. 처음으로 “학교 못 가겠다”고 말한 날이었다.
목도 붓고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챙겨 온 약을 먹이려 했지만 알약은 못 삼킨다고 고개를 저었다. 결국 시럽 해열제만 겨우 먹였다.
한국이었다면 바로 병원으로 갔겠지만, 여긴 하와이였다. 병원은 어디로 가야 할지, 영어는 어떻게 해야 할지 겁부터 났다. 밤새 열이 오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학생비자 신분이라 어학원은 결석일수가 5일을 넘기면 비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렇다고 아이가 집에 있으면 나 역시 학원에 갈 수 없었다. 법적으로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신고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잠시 망설였다.
아이 상태가 심각해 보이진 않았지만, 처음으로 스스로 쉬고 싶다고 말한 날이었다. 아픈 아이의 마음을 안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함께 하루를 쉬기로 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라멘이 먹고 싶어!”
동네에 우리가 자주 가던 매콤한 라멘집이 있었다. 아이가 원하니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아픈 아이와 식당이라니’ 양심에 조금 찔렸지만, 먹고 싶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환자라는 핑계로 차를 탔다. 따뜻한 햇살로 데워진 차 안은 마치 온돌방 같았다. 학교에 간 큰아이가 알면 분명 배 아파할 일이지만, 둘만의 비밀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었다.
라멘집은 평일 오전이라 한산했다. 돈코츠 국물에 매운 소스를 살짝 넣어 주문했다. 감기 때문에 평소보다 덜 맵게 주문했다.
보통 한 그릇을 나누어 먹었는데, 그날은 특별히 각자 한 그릇씩 시켰다. 땀을 뻘뻘 흘리며 라멘을 먹다 보니, 감기 기운이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다시 힘이 나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이불을 깔았다. 집안일도, 숙제도 모두 미루기로 했다. 아이를 꼭 껴안고 오랜만에 평일 낮잠을 잤다.
“아파도 엄마랑 있어서 좋아.”
그 말에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도 그래, 너랑 있어서 좋아.”
땀을 푹 흘리고 한참을 잤다. 하와이에 와서 긴장의 연속이었는데, 그날만큼은 모든 걸 내려놓고 푹 쉬었다.
자고 일어나니 아이의 열이 거짓말처럼 내려가 있었다. 감기가 무사히 지나갈 모양이었다. 뜨끈한 라멘 국물, 그리고 엄마의 사랑이 약이 되었을까.
한국에서는 늘 직장이 우선이었다. 아이 아플 때마다 더 아픈 마음으로 회사를 향했다. 병가를 쓰는 건 쉽지 않았고, 아이는 늘 약에 의존해 학교로 향했다. 나도, 아이도 지쳐 있었다.
그런 나날 속에서 늘 미안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는 달랐다. 아이 곁에 머물 수 있었다.
특히 아플 때, 함께할 수 있었다. 엄마로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아픈 아이와 보낸 그 하루가 고마웠다. 아파서 더 가까워졌고, 더 따뜻했다.
한국에서 쉽게 허락되지 않던 하루, 하와이에서야 비로소 함께할 수 있었다.
아파도 행복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