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선택, 그리고 그 이후의 이야기
“유학 다녀오면 직장에서 혜택이 있는 거지?”
“네…”
시아버지의 반복된 질문 앞에서 나는 늘 자신 없게 대답했다. 아들만 두고 손주들과 해외에 나가는 며느리를 어찌 쉽게 이해하셨을까. 얼마나 많은 걱정을 하셨을까.
아이들과 함께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양가 어른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걱정부터 앞세웠다. 가장 먼저 신랑 걱정이었다.
"남편을 혼자 두면 안된다, 혹시 다른 여자가 생기면 어쩌려고?”
"아이들 어릴 때는 돈 모아야지, 그렇게 써서 되겠니?"
영어 쓸 일도 없는 공무원이 유학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야만 했다. 영어를 끝내고 싶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외국살이의 경험을 꼭 함께 나누고 싶었다. 타인의 우려나 이해받지 못할 걱정을 이유로, 그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때가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안 되는 백 가지 이유'에 귀를 닫고, 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에 집중했다. 그렇게 가족을 완전히 설득하지 못한 채, 우리는 하와이로 향했다.
그렇다고 하와이에서의 삶이 편안했을까. 새벽에 일어나 아침을 차리고, 7시 50분 등교에 맞춰 아이들을 보냈다. 아이들이 돌아오기 전까지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밤늦게 어학원 숙제와 시험에 매달렸다. 아이들 재운 뒤엔 책상 앞에 다시 앉아 겨우 새벽녘에야 잠들었다.
공부, 육아, 살림. 그 어느 하나도 쉽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외식도 하고, 반찬도 사 먹고, 가끔 가사도우미 이모님도 불렀다. 신랑이 많은 부분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하와이에서는 그 모든 것이 내 몫이었다. 월세와 어학원비로 예산은 빠듯했고, 집안에 물이 새는 날엔 막막했다. 느린 행정에 속이 터질 때면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외로움과 우울이 몰려온 날도 있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나에게 하와이로 떠난 것을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호하게 말할 것이다. 절대 아니라고.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하와이를 선택할 것이다.
하와이의 삶은 자유로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그건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었을 뿐이다.
결혼 후 나는 늘 누군가의 딸, 아내, 며느리, 그리고 엄마로 살았다. '나'는 늘 마지막 순서였다. 환경이 요구해서이기도 했지만, 나 스스로도 도움을 요청할 줄 몰랐다. 그러나 말하지 못했다고 해서 갈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와이에서는 처음으로 나를 위한 시간이 주어졌다. 내 인생에 집중해도 되는 시간이었다.
자기 계발에 꼭 필요하다고 들은 바인더 쓰기, 새벽 기상, 운동을 하나씩 시도했다. 읽고 싶던 책을 틈날 때마다 펼쳤고, 청소와 설거지를 하며 유튜브 강의를 들었다. 소소하지만 늘 급한 일에 밀려 미뤄졌던 것들이었다. 하루 루틴을 짜고,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려 애썼다.
무엇보다도, 진심으로 해보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학창 시절 내가 좋아했던 것들, 피아노와 노래, 그리고 글쓰기. 초등학교 3학년부터 배우기 시작한 피아노는 고등학교까지 내 곁에 있었다. 콩쿠르에 나가 상을 받고, 학교 음악 시간엔 피아노 반주를 도맡았다. 100명이나 되는 고등학교 합창반에서는 대표 소프라노로 활동했다. 대입 스트레스에 지칠 때면,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때 음악은 내 인생의 가장 큰 위안이었다. 대학 전공으로 성악을 꿈꿨지만, 부모님은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반대하셨다.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취업 준비에 음악은 점점 멀어졌다.
하와이에서 대학 공부를 할 때 다시 음악이 내 삶으로 들어왔다. 피아노와 성악 교양 수업을 신청했다. 어렵게 느껴지던 다른 과목들과 달리, 음악은 나에게 익숙한 과목이었다. 특히 피아노 수업은 두 번째 학기부터 전공자를 위한 수업에 초대될 정도로 열정이 컸다. 코로나로 인해 1:1 줌 수업이 진행되었고, 굳었던 손가락은 다시 감각을 되찾았다. 밤낮으로 연습했다. 발표 날, 박수갈채를 받으며 느낀 벅찬 감정은 오랜만에 맛보는 행복이었다. 메말랐던 감성이 깨어났다. 잃어버렸던 음악을 다시 찾았다.
글쓰기도 마찬가지였다. 학창 시절 방학 독후감으로 상을 받곤 했고, 번역사라는 직업에 매료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번역은 당장 돈이 되지 않는다며 반대하셨다. IMF 시기, 안정된 직업을 원하셨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공무원 학원비는 대주셨고, 나는 그렇게 공무원이 되었다.
하와이에서 글을 쓰고 싶었다. 수업도 듣고, 습작도 쌓았다.
누군가 말했다. “방구석 글쓰기에서 벗어나 보세요.”
독서 기록을 하던 블로그에 하와이 일상을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다처럼, 아이들과 기억을 남기기 위해 썼다. 그러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고 썼다. 관광 위주 정보가 대부분인 하와이 블로그 중에 실생활을 담은 내 글이 누군가에게 작은 힘이 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쌓은 글이 브런치 작가 선정으로 이어졌고, 결국 책으로 묶고 싶다는 꿈도 생겼다. 신랑은 “공부만 해도 힘든데 뭘 자꾸 하냐”고 했지만, 점점 블로그를 통해 내 일상을 들여다보는 가장 열혈 독자가 되었다.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예전엔 그 말이 비난처럼 들렸지만, 지금은 다르다. 욕심은 하고 싶은 게 많다는 뜻이고, 그만큼 열정적으로 살고 있다는 증거다. 실패가 두려워 시작조차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에서, 나는 욕심껏 살아보기로 했다. 그대로의 나로, 있는 모습 그대로.
두려워 말고 그냥 해봐.
그렇게 시작한 공부, 그렇게 얻은 대학 학위. 안 되는 영어로 시작했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이루었다. 영어는 가랑비처럼 천천히 내 안에 스며들었다. 잘 되는 날도, 안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고, 결국 해냈다. 앞으로도 도전할 것이다. 평생 욕심쟁이로, 내가 원하는 삶을 향해 걸어갈 것이다. 아이들의 응원이 늘 내 곁에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