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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ravelwalker Apr 28. 2019

낭만적 여행기

낭만浪漫에 대해서 글쓰기를 한다는 글을 보자마자 '아 이건 써야해' 라는 근거없는 낭만적 확신이 불현듯 가슴을 파고 들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쓰려고 보니 내가 알고 있다 생각했던 낭만이라는 것이 정확히 무슨뜻인지 잘 모르겠다. 돈이 없어서 학교 잔디밭에 앉아서 깡소주에 새우깡을 먹던 것을 낭만이라 불렀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낭만이라기 보다는 가난으로 인한 궁핍인것 같고, 그렇게 마신 술에 취해서 호기롭게 시계탑을 기어올랐다 추락해서 구급차에 실려간 것을 낭만이라 주장하려고 보니, 그건 주정에 가까운 것 같다.


낭만浪漫 : 주정적 또는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일, 혹은 그렇게 하여 파악된 세계 라고 검색에 뜻이 나온다. 주정적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본다 혹은 모든 것에 감정을 주입하여 감정을 통해 세상을 본다 라는 의미 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 낭만이라는 한자어는 Romance를 일본인이 '로망'으로 읽고 한자로 음차하여 생긴 밑도 끝도 없는 단어다. 물론 한자어 자체의 뜻으로 제멋대로 한다는 의미가 있다고는 하지만, 한자어에 담긴 뜻 보다는 로망스 혹은 로맨티시즘으로 생각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어쩌면 낭만에 대해서 혹은 낭만적인 것에 대해서 잘 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젊은 날의 방탕과 일탈을 낭만이라고 불러 주기엔 다소 감정의 낭비 같은 느낌이 있다. 그것은 아마 낭만이었기 보다는 질풍노도라는 말이 더 어울렸을 것이고, 지금 중년에 다다른 내게 있어서 추억의 다른 이름 정도의 자리 매김이 좀 더 온당하다.

내가 자란 어린시절에는 세상을 볼 수 있는 통로가 좁았다. 기껏해야 텔레비젼이고 신문이었다. 시선이 좁으니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좁다. 주어진 환경에서 선택되어지는 것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믿었고, 자연스레 당위성을 부여해서 잘 된 선택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삶을 살아내면서도 엇나가지 않고 '모범생'의 꼬리표를 무난히 달고 버텨냈다. 꼬리표에 묶여 있으면서 잠깐 잠깐 친구들과 작당하여 야간자율학습을 빼먹고 영화를 보러가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저녁 방파제에 올라 소주를 마셔보는 정도의 일탈이 그 시절의 유일하게 혈기방장한 청춘의 감정 소모 였던 셈이니 낭만이라 부르기에도 참으로 알량하다.


이성적이라고 스스로 자평하는 사람일 수록 사실상 감정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 크다.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데, 아니 사실은 감정적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있는데도, 밖으로 꺼내어 말하기가 두렵다. 어린 시절에 한번 붙여진 꼬리표는 그렇게도 오랫동안이나 따라다닌다. 제멋대로 좀 해보고 싶은데, 그렇게 할 수 없다. 반듯한 사람이었고 이어야만 하는 강박은 최대로 감정적일 수 있는 순간 마저도 그럴 수 없는 인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헤어진 애인의 집 앞 놀이터에서 밤새워 기다리며 너를 위해 죽을 수 있다고 편지를 쓰고 싶지만, '그게 너를 위한 일이라면..., 사랑했었다' 같은 말도안되는 신파를 날리며 쿨한척 돌아선다. 쿨하기는 개뿔, 그런 순간에도 감정에 충실하지 못한 인간은 조금도 낭만적이지 않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딱 부러지고 날이 서 있던 그 반듯한 청년은 조금씩 주책맞은 중년으로 변해간다. -호르몬의 영향은 절대 아니라고 여전히 격렬히 부인하고 있지만-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로만 보이던 드라마가 막 가슴을 후벼파고, 남의 인생 이야기에 같이 슬펐다가 기뻤다가 감정이 요동친다. 김광석의 이야기 처럼 할레이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하나 사서 머리 노랗게 물들이고 가죽바지입고 유럽을 횡단하고 싶기도 하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라는 노래 가사처럼 뱃고동이 울리는 부둣가에서 도라지 위스키 한잔하고 싶기도 하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했던가. 인생중에 해야할 지랄의 총량은 같다 즉, 젊은 시절에 할 지랄을 다 못하면 결국 나이 들어서라도 한다는 말이다. 아마도 이 법칙을 이제 '낭만 총량의 법칙'으로 바꿔도 좋을 것이다. 꼭 일탈이 아니어도 감정에 충실한 순간으로 낭만을 누려야만 했던 순간이 인생의 어느때라고 정해진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기를 쓴다. 여행기만 쓰는 것은 아니지만, 내 아이디에 걸맞게 아니 여행기를 염두에 두고 아이디를 만들었다. 글을 쓰는 일은 내게 있어서는 낭만에 가까운 일이다. 내가 어릴적 부터 전가의 보도로 삼고 살아왔던 '공부'나 '인생의 성공'과는 반대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글쟁이 되면 밥 굶는다고 했던 어른들의 말이 남긴 반감에 대한 동경이 만든 환상일 수 도 있겠지만, 왠지 내 생각들이 글로 표현되어 누군가가 읽어주고 동감한다는 것이 주는 쾌감 같은 것이 있다. 글을 잘 쓰지는 못하지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부터 논문이나 보고서가 아닌 내 '글'을 누군가 읽어주고 공감해주는 것에 대한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적확하고 딱 떨어지는 문장으로 부러 심오한 어휘를 선택하여 쓰는 논문이나 보고서에 지쳐 있던 나로서는 젊은 시절 써댔던 연애편지 이후로 처음으로 읽는 사람의 즐거움을 생각하며 글을 쓰는 것이 무척이나 즐거웠다.


여행기를 쓰는 것은 신변 잡기나 혹은 에세이 같은 것을 쓰기엔 나의 문학적 소양이 부족함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을 엔지니어 혹은 관리자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는 하나 문득 문득 묻어나는 엔지니어의 무식이 부끄럽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기를 통해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했다. 여행지의 정보를 정확히 전달하는 여행기보다는 여행지에서 여행자로 느끼는 감상을 적고 싶었다. 그렇다고 여행지를 배제한 생각만을 담은 여행기가 되기 보다는 여행지의 '인상'을 담은 사진과 그곳에서 내가 느낀 정취를 감정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다. 말 그대로 여행자로서 여행지를 걷는 이의 낭만을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낭만은 떨어지는 낙조의 쓸쓸함이어도 좋고, 고민을 가득 안고 떠난 여행지에서의 인간으로서의 고뇌여도 좋을 것이다.


아직은 나의 글도 또 그 글이 표현하는 여행기도 제대로 여물지는 못했다. 글이라는 것을 제대로 써보기 시작한것도 고작 두달이 좀 넘었을 뿐인데다가, 문학적 소양도 부족한 공돌이니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 일것이다. 하지만, 나는 글 쓰는 것이 즐겁고 그것이 소통의 도구가 되는 것이 즐겁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거기에 덧붙여서 보상도 있고, 이루어 보고 싶은 꿈도 함께 꿀 수 있으면 이것이 낭만적인 것이 아니면 무엇이 낭만적인 것이겠는가.


낭만적이라 해도 좋고 철이 없다 해도 좋지만, 난 내가 이곳에 써나가고 있는 여행기들을 언젠가 모아서 '낭만적 여행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이 있다. 이 꿈을 위해서 조금 더 정성 들여 사진을 찍고, 글을 쓸때도 어제 쓴글보다는 조금 더 나아진 글을 쓰려고 노력한다. 점점 글쓰기가 어려워진다. 스스로의 기준이 올라가고 또, 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에 대한 책임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이 모든 것이 즐겁고 이것이 내 인생에 있어서 작은 일탈이라고 한다하더라도 나는 이것을 낭만이라고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 더불어 내 낭만을 함께 해 준 그리고 이 글을 읽어줄 이웃님들도 우리가 나누는 이 이야기들을 '우연의 낭만'으로 여겨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중년의 낭만은 꽤나 무섭다. 역시 '지랄 총량의 법칙'은 건재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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