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수동태, 내용은 능동태
저자 : 토머스 컬리넌 (Thomas Cullinan)
번역 : 이진
출판사 : 김영사
국내 발행 : 2017년
한줄평 :
각자의 눈으로 보는 멀티버스(?)
독자는 모든 등장인물들을 조망하며 관음적 즐거움을 누려봐도 좋을 것.
#매혹당한사람들 #영화원작소설 #소피아코폴라
이미 몇 년 전에 받아서 그간 꽤 오랫동안 책장에 꽂혀 있었던 책이다. 조금 뒤적거려 보긴 했지만 크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재고 최적주의자인 내 행동 패턴대로라면 진작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팔았을 거다. 출판사 증정 도장이 찍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증정 표시가 있거나 표지 등에 손상이 있는 책은 안 받아주니까.)
이번에 책장 정리를 하면서, 누군가에게 줄 생각으로 솎아냈는데 - 뜻밖의 매력을 (이제야) 발견했다. 다른 할 일도 많은데 어쩐지 꽂혀서 단숨에 독파해 버렸네. 역시 인생은 모르는 거야.
‘매혹당한 사람들’을 검색하면 아무래도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하고 니콜 키드먼, 커스틴 던스트, 엘르 패닝 등 쟁쟁한 출연진으로 화제몰이를 했던 2017년 영화가 상단에 뜬다. 그 영화에는 원작 소설이 있다는 언급과 함께.
하지만 나는 영화는 아직까지 안 봤고, 앞으로도 안 볼 가능성이 상당할 것 같다. 음, 정확히는 여성 출연진의 일부 장면들만 발췌해서 보고 싶군. 이 정도라면 내 머릿속 원작 보존을 위해서 영화는 안 보는 편이 낫다는 게 나의 하찮은 통계다.
여담이지만, 영화 별점의 한줄평들이 꽤나 재미있다. 그 내용들만 봐도 영화의 미장센이나 배역 적합도 등이 어느 정도 상상되기도. 혹자의 말에 따르면 영화에서 유의미한 단 한 명의 남자 배우와 (콜린 파렐) 그와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다수의 여성 배우들이 (니콜 키드먼 등등) 그림체가 안 맞아서 그 성적 긴장감에 몰입이 안 된다고도 하던데.
‘조금 더 매혹적인 남자였으면...’
‘양다리 걸치다가 외다리 되삔네’
‘이 작품을 박찬욱 감독이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이런 매력적인 소재와 배우들로 이 정도밖에 못 만드나’
‘의상 때문에 그나마 6점 줍니다. 좋은 배우, 괜찮은 소재임에도 김 빠진 콜라 같네요.’
(음, 역시 영화는 보지 말아야지. 딱 출발 비디오 여행 류의 프로그램에서 방영해 주는 요약본으로 미장센만 보고 싶다. 특히 엘르 패닝의 의상, 분위기, 연기가 궁금한데.)
매혹당한 사람들.
카피라이팅이 이렇게 중요하다. 헤드라인은 한층 더. The Beguiled 라니. 저 단어가 이미 내재하고 있는 긴장감이 아주 팽팽하다. 더이상의 수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간결함에 숨이 막힌다. (언어에 집착하는 자의 소감...)
우리말 제목인 ‘매혹당한 사람들’은 원제에 대한 직역이기도 하지만, 적절한 번역이기도 하다. 다행이야. 책이든 영화든 간에, 번역 때문에 보기 싫어진 작품들이 한둘이 아니라서. 원작의 간결하고 함축적인 어감을 번역이 그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언어 자체의 특성 때문이어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봐야겠지.
‘매혹’에 해당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다. 보다 일상적이고 쉬운 단어들도 많다. 하지만 ‘매혹’은 한국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채택되어 등장한 단어일 뿐, 원작의 의미는 beguiled, 매혹되고 기만당한 것. 속은 것. 농락당한 것.
’매혹‘이 있었을진대, 이것은 그 매혹을 당한 자들, 매혹을 느낀 자들의 이야기다. 매혹을 행한(?) 자는 이를 위한 장치, 소품일 뿐. 책의 제목은 수동태, 그러나 그 내용은 능동, 너무나도 능동태.
그러고 보니 어느 블로그에서 본 영화 관람평 중에서 유독 인상적인 표현이 있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존 맥버니를 연기했던 1971년 영화와,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17년 영화를 비교한 내용이었다.
2017년 작품 여성 감독은
여인들의 매혹당함과 결속을 그려냈다면
1971년 작품 남성 감독은
남자의 매혹시킴과 파국에 중점을 두었다.
라는 것.
(아무래도 언젠가 영화를 보려면 1971년 작품으로 봐야겠다. 존 맥버니의 색기가 그 정도는 되어야 이 분열과 갈등과 파국이 온전히 이해될 것 같아. 콜린 파렐 배우님 미안.)
책에서는 매 챕터마다 화자의 이름이 제목으로 붙는다.
무심코 페이지를 넘기지 말고 ‘지금부터 이 챕터는 누구의 시각에 이입해야 하는가‘를 단단히 눈여겨봐두어야 한다. 만약에 놓쳤다면 페이지를 돌아가서라도 ‘그러니까 이게 지금 누구의 이야기더라’를 다시 확인하고 와야 한다.
같은 현실 속에서, 같은 대상(존)을 두고서도 모든 여성들이 제멋대로의 해석을 하고 자기 취향, 욕망대로의 행동을 하기 때문에. 존이 이러이러하게 바라보았다, 저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듯 했다, 라는 모든 화자의 말들이 사실은 각자의 동상다몽일 뿐이다.
집단 내의 남성의 주목을 받아야만 성이 차는 얼리샤, ‘당신만은 나를 이해하고 진실로 사랑해 주겠지’라는 낭만적 환상을 가진 에드위나, 본인이 사회 부적응자이기 때문에 외부인 존이야말로 ’나와 통할거야‘라고 기대를 하는 어밀리아, 예쁜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저들과 달리 똑똑하고 특수 정보도 가지고 있어‘를 군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에밀리, 유약한 자기 부정형 알코올 중독자 해리엇, 그리고 가장 크게 파열하는 독재자 마샤.
각자의 파티션 속에서 모두가 ‘나는 달라, 나는 특별해 (aka 그가 진심으로 믿고/의지하고/사랑하는 건 나야)’라는 생각으로 무모하게 치닫는 모습. 물론 이게 가능했던 것은 존(이라는 양아치)이 다각도로 판타지 설정 작업을 한 탓이긴 하지만. 어쨌든 독자는 각 인물의 입장에 필요한 만큼 이입하면서도 제3자적 시각으로 이를 관음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다.
미처 발견 못 하고서 지나칠 뻔했던 이 책의 매력을 뒤늦게나마 발견해 낸 소소한 기쁨을 담아서, 기록해 두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