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을 기억하며

영화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iht)>, 2013

by jenny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비포 시리즈의 마지막, Before Midnight.


낭만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이전 시리즈와 달리 너무 현실적이라는 평도 많았지만,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이 마지막 시리즈에서도 (현실적인 동시에) 낭만적인 사랑이 보인다. 상대의 마음을 할퀴는 말들로 다투면서도 서로 솔직하게 생각을 털어놓으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이. 앞으로 사랑할 오십 몇 년의 시간이 막막하면서도 지금도 앞으로도 서로 사랑하고 싶은 사이. 셀린과 제시의 이런 사랑을 두고 어찌 낭만적인 사랑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투닥거리는 커플을 보며 처음에는 셀린이 다소 억지스럽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달래고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애쓰는 제시가 안쓰러웠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셀린의 말과 행동들에서 공감되는 감정들이 느껴졌다.


여자로 살아가면서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이런 것이다. 내가 여자로서 '순종적'이라는 전형적인 여성상을 대변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지금 나의 행동이 그런 것은 아닐까, 혹은 지금은 그렇게 안 보이더라도 결국 나의 삶이 그렇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하는 것. 셀린은 제시에게 이것을 직접적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대사를 통해 내가 이해한 두려움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그런 전형적인 여자가 되지 않으려 하지만, 무엇이 정답인지 몰라서 그저 막막하다. 그래서 우선 그런 여자로 무시받지 않기 위해,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재라는 걸 떳떳하게 보여주기 위해, 나는 언성을 높이고 때로는 격한 표현까지 내뱉는다. 그런데 이 때 그 말과 행동으로 말미암아 나는 '감정적이고 비이성적인', 그래서 '구제불능으로 극단적'이고 '관계맺기 어려운' 사람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그건 참 억울하고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일이다. 한 번 그런 경험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 비슷한 상황에서 나는 내가 또 그런 사람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미리 걱정이 되고, 상황이 지나고나서는 혹시 또 같은 상황을 만든 것은 아닌지 걱정과 후회가 밀려온다. 이윽고 상대의 반응에서 비슷한 상황이 느껴지면 역시나 하고 자책이 이어진다. 동시에, 만약 이렇게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했어야만 했는지 알 길이 없어 그저 공허하고 막막한 마음이 든다.


상대방이 은근히 (passive aggressive하게) 나를 무시하는 건 아닌지 의식하는 것. 상대방이 어떻게 답하든 실패가 되고 나에게 상처가 될 질문들을 던지는 것. 이어지는 다툼 끝에 더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해버리는 것. 나 역시 그녀처럼 행동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제시가 셀린에게 "상처따위 받지않고 계속 돌아오는 한 마리의 강아지로 나를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이야(if you think I'm just kind of a dog who keeps coming back, then you're wrong)" 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의 행동 뒤에 숨겨진 생각과 마음들을 상대가 몰라줄 때, 나를 가장 이해해주길 바라던 사람이 나를 이해해주지 못할 때의 외로움. 그 뒤에 이어지는 자책감. 제시의 말을 듣고 애써 눈물을 참는 셀린의 표정에서 그 감정이 느껴졌다.


남자든 여자든, 그 누구든 완벽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상대와 다투고 싸우고 또 어긋나게 된다. 그 와중에 셀린과 제시가 계속 서로 사랑하고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 덕분이다. 프라하로 향하는 기차에서 서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 너무나 멋지고 아름다웠던 그때의 그대와 나에 대한 기억. 그리고 그때 그 사람이 변함없이 지금 내 앞의 당신으로 서있다는 믿음. 그것을 믿게 해주는 당신의 노력. 이것이 내가 본 셀린과 제시의 사랑이고, 내가 이해한 낭만적인 사랑이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리스 커플 스테파노스와 아리아드니가 채소 썰던 칼을 들고 '위험한 싸움(fight)'이 아닌 '대화(negotiate)'를 하는 것처럼, 제시와 셀린이 농담과 상황극으로 서로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건네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서로 통하는 우리만의 방법으로 이 사랑과 이 관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내가 바라는 낭만적인 사랑이다.



영화, <비포 미드나잇 (Before Midnight)>, 2013

감독: 리처드 링클레이터 (Richard Linklater)

배우: 에단 호크 (Ethan Hawk, 제시 역), 줄리 델피 (July Delpy, 셀린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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