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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ENNA Dec 05. 2020

립밤을 바르는데 지난 그 시절이 문득 스치잖아.

왜 너가 거기서 나와?


냄새는 기억의 문을 여는 통로다. 어느새 겨울이 왔다. 입술이 메마르고 건조해져서 방구석 어딘가 묻혀있던 립밤을 찾아 톡-뚜껑을 열었다.

아무 생각없이 입술을 비비다가 문득 어디에 맞은 것처럼 얼얼하고 아릿한 감정을 떠올렸다. 상큼한듯 밍밍한 석류향 립밤에서 그 시절 내가 이 향기와 느꼈던 감정들이 묻어나왔다. 만약 우리가 기억을 보관할수 있다면 향기에 책갈피를 꽂아 보관할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이 입술로, 설익은 어설픈 모습으로 당신과 함께 티비를 보고 있었다. 소파에서 각각 담요를 두르고 편한듯 어색하게 시트콤을 보고 있었다. 로맨틱한 장면이 나올라치면 우린 둘다 긴장한티를 내지 않으려 티비에 고개를 고정하고 멋쩍게 침묵하곤 했다. 흐리고 비오는 날 우리는 가끔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뻔한 이야기로 내 인간 베개가 되라며 네 다리를 뭉게고 있었고 어린 너는 그 장난에 웃어줬다. 몸을 뺄듯 피하다가 허술하게 붙잡혀서 가만히 기댄채 함께 티비를 봤다. 몸만 커다랗게 훌쩍 자라버린 풋내기 남자. 우리는, 끝까지 친구였다. 나의 착한 두번째 청년.


과거의 기억은 가끔씩 엉뚱하게 뛰어나와 우리를 놀라게 한다. 내 또래 그녀가 나눠준 이야기 하나. 그녀는 직장에서 무심코 노트를 꺼내다 옛날 연인에게 보낸 빼곡한 편지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깜짝 놀라 덮고는 퇴근길 버스에서 조심스레 펴봤고, 그 종이는 밤늦게 맥주 몇병과 함께 다시 접혔다.


내 인생엔 악명높은 독주가 있었다. 그 럼주는 크라겐(문어 괴물)모양의 유리병에 담긴 검정색 액체의 술이었다. 내 마음에 곰팡이를  피게 한 나의 첫소년은, 그 술을 크라겐의 독이라고 그 나잇대 남자애처럼 말해줬다. 나는 그 술을 우리의 마지막 이별주로 선물하고 떠나왔다. 내가 고향에 돌아가는 하루 전날 우리는 새벽을 함께 보냈다. 술은 한입도 마시질 않았는데 이미 취한듯 지독한 슬픔에 빠져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캐리어를 들고 떠났다. 도착한 공항에서 역사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뚝뚝 눈물을 흘렸다. 현실은 더 떫고, 더 아무런 의미도 남지 않았다. 지나간 기억은 현실을 끌어내리는 잔인한 괴물이었다.그때 이후 몇 년이나 그 럼주를 보질 못했다. 외면하고 싶은 감정에 지독히도 삼켜졌고 그건 지긋지긋하게 충분했으니까.


우연이라고 한다면, 운명의 장난이었다.

어른이 됐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똑같은 나로 돌아와버렸다. 내 착한 청년이 떠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릴적 내가 캐리어를 들고 첫소년을 떠났듯이, 이 청년 역시 떠나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나는 남겨지는 쪽이었다. 참 이상했다. 인생이란... 분명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이젠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을 떠보니 이전에 걸었던 길의 반대편에서 결국 과거의 나를 마주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공항터미널에서 붉은 눈시울로 앉아있던 여자아이가 다시 괴롭지 않기를 바랐기에, 어른이 된 나는 아끼는 청년과 친구 사이로 남으려 부단히도 애썼다. 남녀는 왔다가 떠나지만, 친구는 그래도 어딘가에서 머무르니까. 세상의 어딘가에서 모르는 척 연락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그를 많이 생각하지만, 애정으로 아끼지만, 그래서 더욱 상처입히고 상처입고 싶지 않았다. 너의 현실과 미래가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나처럼 아프지 않기를, 악몽으로 남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이별이 가까이와도 무디게 도자기를 한겹 입힌듯 해맑게 웃었고,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친구로서 시간을 보냈다. 서로를 잃는 것보다 많은 친구중 하나를 잃는 편이 서로에게 낫다고 여겼으니까. 사실 내가 다시 아프고 싶지 않았으니까.

이 청년의 마지막 밤을 기념하는 저녁날. 한 친구가 너희가 떠나기전 이걸 꼭 마셔봐야한다며 비장하게 걸어왔다. 그리고 까만 유리병을 내 앞에 내밀었다. 그 술. 악몽같은 크라겐 럼주. 나의 이별, 내 과거의 모든 독. 우연이라면 아니 운명이라도, 참 지독했다. 어째서, 그걸까? 세상에 수없이 많은 술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이여야 했을까? 지난 수많은 날들 동안 내 인생에서 잊혔다가 하필 또 다른 이별을 앞둔 이때 불현듯 찾아왔다. 애써 괜찮은척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산산조각 깨져 정신을 차릴수 없게 불안해졌다. 무너질듯 초조했다. 그래 그날은 이상한 일 천지였다. 아침부터 칼에 손을 베여 피가 그치질 않았다. 밴드로 둘러 막았는데 하루종일 몇번이나 피가 그치질 않아 계속 덧대고 덧댔다. 간신히 막아둔 모든 게 터진 건 늦은 저녁때였다. 누구도 모를 개인적 서사로 얼룩진 그 독주를 운명처럼 마셨다. 과거의 눈물을 담은 검정색 액체는 과거와 현재에 스물스물 뒤섞여 어떤 신호를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다. 엎드려 있는 그 괴물을 최대한 감추려 외면해봤지만,  끝끝내 이별을 암시하는 사소하고 진부한 말을 신호탄으로 터져버렸다. 그가 떠나면 슬플거라는 누군가의 단순한 한마디를 무심코 따라가다 한순간에 발밑이 무너졌다. 새어나온 감정을 숨길 여유따윈 없이 손수무책으로 상처와 눈물이 한방울씩 뚝뚝 털어져서 내 뺨과 내 손을 타고 흘러내렸다. 독주에 취해서, 이내 고장난 듯 엉망으로 울었다. 덧댔던 밴드는 소용없이 상처가 틑어져 나의 착한 청년의 흰티에 피 얼룩을 뒤집어 씌웠다. 너의 잘못이 아닌데. 나는 그대로 네 품에 기대서 서럽게 울어버렸다. 내 지난 과거의 상처가 그대로 네게 덕지덕지 묻어버렸다. 눈물도 피도. 모두...



말하지 못했던 그날의 눈물. 이제야 이유를 털어놓게됐다. 이 립밤 하나의 향기 때문에 문득 너를 기억하게 됐다. 그날 밤 내가 너를 놓지 않고 울었던 날에. 네 눈시울이 붉었다. 있지 사랑이란건 참 스치는 감정이야. 우정 역시도 남지는 않지만. 내가 너를 아꼈던 마음은 아마 그 어딘가 사이에 있었을거야. 그날의 나는 참 어설프고 설익었다. 그런 서투른 나를 너가 안아줘서 고맙게 생각해. 이런 나와 그냥 한순간이라도 함께 해줘서 고마워. 부족하고 모자랐던 우리 사이. 그런데 항상 같이 있었던 매 순간들. 너가 있었기에 나의 흐렸던 날들이 따뜻했어. 아침마다 네가 알려준 모카포트로 커피를 끓여서 나는 그걸 겨울동안 꼭 소중하게 들고 다녔어. 화창했던 날 너와 처음으로 함께 햇빛을 쬐던 평화로운 시간. 처음으로 누군가의 옆에서 편안함을 느꼈다. 흐린날 너와 함께여서 내심 안심했던 나날들. 야간 버스를 함께 타고 집으로 오는 그 마지막 밤, 네 어깨에 기대 울면서 왔던 그 날이 생생하다. 32번가, 33번가, 34번가. 집에 다가올수록 너무나 슬펐던 그 마지막의 기억들. 감당할 수 없을것 같던 그 감정의 무게. 창문으로 비친 도시의 야경. 얼룩덜룩한 빛무리. 그것도 이젠...., 41번가. 우리들의 집. 고마웠어. 나의 친구. 내가 아꼈던, 나의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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