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낙타 똥을 태워서 난을 부쳐 먹은 적이 있다. 그건 이집트에서였다. 키가 땅꼬마만 한 유치원생 나는 엄마 이것 봐! 하면서 신기하게 생긴 덩어리를 집어 들었는데, 엄마가 그거 낙타 똥이라며 기겁하셨다. 난 어려서 희한하게 그런 게 좋았다. 지렁이, 쇠똥구리, 무당벌레, 스핑크스, 낙타 그리고 낙타 똥. 고대 이집트인들은 겹겹이 파피루스를 교대로 엮어서 종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위로 그림을 그렸다. 그건 그들만의 언어였다. 이를테면 새나 발, 칼과 뱀이 이집트의 알파벳이었다.
언니와 나는 어린 시절 우리들만의 언어를 만들어서 소통하곤 했다. 쁘라쿠셰 씨씨- 하면 그건 바나나 먹고 싶다는 뜻이었다. 쁘라쿠셰가 먹고 싶다는 뜻이고, 씨씨가 바나나라는 뜻이다. 근데 우리들만의 언어는 딱 그 한마디만 있었고, 우린 그 한마디만 썼다. 쁘라꾸셰 씨씨! 쁘라꾸셰 씨씨! 했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어로 먹다가 쿠샤찌다. 우리는 엄마 아빠에게 마마치카! 파파치카! 했더랬는데 그건 우리도 모르는 사이 러시아어로 엄마, 아빠라는 뜻이었다.
비가 오고 나면 난 지상으로, 그것도 아스팔트 위로 기어 나온 지렁이들을 맨손으로 집어 잔디로 옮겨주었다. 지렁이들은 똥을 싸서 흙을 비옥하게 한다. 그 똥을 먹고 꽃들이 자라난다. <강아지똥>에 나오는 그 강아지똥이랑 비슷하다. 근데 난 그 그림책의 교훈이 1. 보잘것없어 보이는 것도 다 쓸모가 있다, 2. 외모만으로 상대의 가치를 판단하지 말자 - 이 둘 중에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도 사실은 <아낌없이 뺏는 인간>이어야 한다. 그 불쌍한 나무는 허리가 잘려나가고도 그 영약한 인간 노인네 엉덩이에 깔리는 굴욕을 봤다. 그걸 자랑이라고 그 작가는 순수한 아이들에게 그게 피해자의 자발적인 배려인 마냥 포장을 해놓고 착취를 정당화했다. 난 그런 걸 보면 성악설이 맞는 건지 성선설이 맞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