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악마와 손을 잡으면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by 제나랑


이태원 한 복판에 가장 높은 건물 [BLUE MOON] 이라는 간판 아래로 건물 전체를 달모양이 감싸고 낮이나 밤이나 반짝이고 있다.


건물 앞으로 롤스로이스 한 대가 들어서자 건물 앞에 서 있던 벨보이가 허리 숙여 인사 후 차 문을 열고 청바지에, 코트 차림을 한 여자가 내린다.

그 여자도 벨보이에게 간단한 목례를 하고 운전석에서 내린 정장 차림의 남자와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6성급 호텔로 KCIA 한국소비자산업평가에서 3년 연속 우수 호텔로 선정되었고 고객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로비의 컨시어지, 보안팀 직원들, 프런트의 호텔리어, 매니저 그리고 객실 복도에 청소 카트를 끌던 하우스키퍼들까지 모두 그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를 한다.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두 사람은 가장 꼭대기 층인 77층을 누른다.


지하 1층부터 10층까지는 부대시설, 11층부터 70층까지 객실, 71층부터 76층까지 레지던스로 되어 있으며, 77층은 그녀의 사무실 겸 서재다.

책상 위 크리스탈 명패에는 그녀의 이름 석자 [지해주]


해주는 큰 창 너머로 외부 절경을 내려다본다.

해주의 귓가에 여러 사람의 간절한 기도가 한꺼번에 들려온다.


그중 누군가의 울먹이는 기도 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명확하게 들리기 시작한다.


(신이 있다고 믿어본 적 없지만

이렇게 염치없이 죄송한데요..

제발 우리 딸 하루만이라도...

더 있다가 데려가시면 안 되나요?

제발...딱 하루만요...

돈 번다고 엄마 노릇도 못하고

그 흔한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어요...

마지막 가는 길 행복한 추억으로만

가득 채워서 보내고 싶어요...

뭐든 다 할게요.. 제발....)


해주는 책상 너머로 한 쪽 벽면을 가득 매운 책장 앞으로 걸어간다.


남자는 목례 후 사무실을 나와 비서실로 향한다.


수많은 책들 중 유독 거꾸로 뒤집어져서 꽂혀 있는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악마와의 약속]


그 책을 건드리니 여러 책장 중 하나가 문처럼 열리면서 사무실만 한 크기의 공간이 나온다.

분위기는 고급 와인바지만 카페로 꾸며놓았다.


해주가 커피머신과 커피용품들이 있는 작업대로 향한다.

작업대 앞 넓은 공간 한가운데엔 아일랜드 식탁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해주가 아일랜드 식탁 위에 캔들 하나를 두고 캔들용 미니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그러자 조금 전 기도 하던 중년 여성이 소환되고 아일랜드 식탁과 어울리는 의자도 나타난다.

당황스러움에 어쩔 줄 몰라한다.


"김현숙, 앉아"


현숙은 어정쩡하게 의자에 앉는다.


"여..여기가 어디죠? 어떻게..."


"딸 이름이 이. 예. 지. 혈액암 말기. 얼마 안 남았네."


"누..구세요? 그걸 어떻게..."


"내가 당신에게 딸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을 준다면 당신은 나에게 뭘 해줄 수 있지?"


"저기요. 누구신데 다짜고짜 이러시는지, 이게 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남의 딸 목숨 가지고 장난치지 마세요."


"그렇게 믿지도 않는 신 찾아가며 빌 땐 언제고."


현숙은 자신이 딸의 손을 잡고 울며 속으로 읊조렸던 기도까지 알고 있는 해주의 말에 더욱 혼란스러워한다.


"진..짜에요? 진짜 우리 딸에게 시간을 줄 수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면 뭐든! 진짜 뭐든 다 할게요! 제가 뭘 하면 될까요?"


갑작스러운 태새전환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는 해주


"당신 딸 예정대로면 내일 죽어. 내일 하루 당신 딸 고통 없이 당신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주지.

내일모레로 넘어가는 12시가 되면 예정대로 당신 딸은 죽어.

대신 당신은 나에게 너의 영혼을 내놔라. 딜?"


영혼이라는 단어에 우물쭈물 망설이는 현숙


"뭐든. 다. 한다고 하지 않았나? 딸이 고작 하루 더 사는 데에 너의 나약한 영혼을 받치기에는 아깝다 이건가?"


"..아...아니에요! 할게요! 딸과 하루라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저의 영혼, 목숨 같은 건 어떻게 돼도 상관없어요!"


"좋아. 그럼 사인해."


해주는 현숙에게 계약서와 만년필 한 자루를 내민다.


"내가 천사가 아니라서 자비롭지는 않지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주문 먼저해."


계약서 옆에 음료 메뉴판을 툭 놓는다.


"음..저는...아메리카노 따뜻한 걸로 할게요..."


해주는 커피머신 앞으로 가 직접 아메리카노를 제조한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머그잔 하나가 순식간에 작업대 위로 날아와 울려진다.

커피머신에서 포터필터를 분리한 후 마른행주로 물기를 제거하고 그라인더 아래 도징컵을 받힌 후 버튼을 누르자 분쇄된 원두가 도징컵에 나온다.

도징컵 안 원두를 포터필터에 옮겨 담고 레벨링 탬퍼로 탬핑한 후 커피머신과 결합한다.

버튼을 누르자 샷잔으로 에스프레소가 적정량 내려오기 시작한다.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담고 그 위에 에스프레소를 붓고 현숙 앞에 원목으로 된 커피코스터를 놓고 머그잔을 내려놓는다.


"주문하신 멸망 나왔습니다."


현숙은 커피를 마시며 만년필을 손에 쥔 채 고민에 빠진다.


'고민하는 척 하기는..퍽 역겨운 인간'


현숙은 오랜 고민 끝에 커피를 다 마신 후에야 계약서에 사인을 한다.

현숙의 사인이 끝나자 현숙의 이름 아래 악마의 사인이 저절로 그려진다.


해주가 캔들 스너퍼를 이용해 캔들을 끄자 현숙과 의자가 함께 사라지며 현숙과 그녀의 딸은 평소 가고 싶어 하던 바닷가로 소환된다.


해주는 다시 사무실로 나오고 책상 앞에 앉자 문처럼 열렸던 책장이 다시 닫힌다.

인터폰 버튼 누르는 해주


"정 실장님, 들어오세요."


해주와 같이 출근했던 그 남자가 다시 해주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다.


"네. 대표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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