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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Oct 04. 2024

자기혐오에 대한 새로운 통찰.

책임전가의 심리적 본질

최근에 깨달은 것이 있다. 자기혐오는 어쩌면 나 자신을 미워하기보다는 원망하는 것에 가깝다고.

 

우리가 살면서 무슨 일 실패하거나 일이 어그러졌다 생각될 때, 우리는 종종 어떤 대상을 향한 원망을 하는 경우가 있다. 우리원망하는 이유는 보통 그 실패의 '원인'을 명확히 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이다. 그리고는 도리어 그 원인이 되는 '대상'을 특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 원망의 이면에는 책임을 전가하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 일의 전개 과정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더라도, 원망을 반드시 느낄 필요는 없다. 만약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이 진정한 목적이라면, 우리는 원망에 에너지를 소비하거나 원망의 대상을 자신의 삶에서 제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원망은 결국 그 책임을 특정 대상으로 전환하는 행위이다. 이는 마치 자신의 인생에서 일어난 모든 일의 의미와 가치를 부정하고, 오로지 하나의 지점에 그 책임을 몰아세우는 것과 같다.


겉보기에는 자기혐오가 온화하거나 희생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실상 이는 나의 내면에 또 다른 자아를 형성하고 그 자아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무의식적 시도이다. 이러한 자아를 원망하고 감정적으로 억압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자아를 왜 미워하게 되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증오'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자기혐오는 나 자신을 소모시키며, 결국 자신을 분리시키거나, 능숙하다면 숨기려 하는 과정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조차 무의식적으로 부인하기에, 우리는 자신이 원래 그러한 자아와는 다른 존재라 주장하며 자기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


자아를 인위적으로 분리해 낸다고 해서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잠시 동안의 위안에 지나지 않을 뿐, 우리는 온전한 '나의 전체'를 상실하게 된다. 부족해 보이거나 쓸모없다고 여겼던 나의 일부를 억지로 저 지하실 다락방에 감금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성장은 불가능하다. 나의 일부를 분리시키려 해도 그건 사실 분리 되지 않으며, 그 분리된 자아가 불쑥 튀어나올 때 우리는 너무나 당황하고 우리가 감금해 두었던 수치스러운 자아에게 더욱 분노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혐오의 언어를 내뱉으며 점점 그 자아를 더욱 핍박하고 고문하게 된다. 수치의 자아는 그렇게 더욱 수치스럽게 만들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수치의 자아는 사라지지 않는다. 죽지도 않는다. 그도 그런 것이, 나라는 존재는 원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나인 나의 온전한 전체가 소멸하지 않는 한, 나의 기억도, 나의 역사도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다. 그래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나는 바로 이것이 "세상의 속임"이라 생각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깨달은 것은, 자기혐오는 결국 원망으로부터 시작되고, 원망할 대상을 내 안에 만들어내어  그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려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 본질은 결국 책임의 전가에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못나고 수치스러운 자아에게 그 꼬리표를 떼어주고 화해할 필요가 있다. 내가 스스로 붙인 그 꼬리표를 떼고 그 자아에게 일종의 코치가 되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타인들이 물론 여러 가지 쓸모없는 못된 말들을 해서 내 나약한 자아가 그 말을 믿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은 있었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 자신만큼은 타인의 말보다 더 권위 있는 존재이며, 내가 나를 가장 잘 알고 있음을 신뢰해야 한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나보다 나를 더 잘 안다는 부모님의 말에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했으나, 그 관계가 깨질까 두려워 그들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 말이 나를 잠식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리고 그렇게 나 자신의 소리를 믿지 못하고 그들의 인정이나 승인을 갈망 하며 나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다. 그러나 내가 부모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것은 그저 부모들이 자녀에게 행하는 일종의 가스라이팅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무리 사회적 질서와 사실관계를 많이 안다고 해도, 부모가 자녀의 모든 생각을 알 수 없다는 명백한 진실을 깨달은 것이다. 내 부모는 분명 자기 자신이 이해하고 해석한 나라는 존재가 그 실체라고 스스로를 과신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나는 오랜 시간 고통스러운 싸움 끝에, 나는 부모님과 별개의 존재이며 그들이 내 생각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각인시킬 수 있었다. 비록 이 과정은 나를 더 깊은 수치의 길로 내몰았으나, 그 길을 견디고 나아가니 결국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예민한 것이 아니라, 단지 나 자신을 지키고자 했을 뿐이었다. 이제는 그것을 당신들이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들어온 말들이 나를 확신시켜 주는 말들이 아니었기에, 가까운 이들로부터 들은 '말의 데이터 베이스'는 부족했고, 오로지 독서와 학술적 담론 속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으려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나 자신을 향한 원망과의 싸움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그래서 환경을 바꿨다. 나를 해하는 말, 꺾으려는 말, 짓밟는 말들은 멀리하기 위해 물리적 거리를 두고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관계와 일에 투자했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었고, 그 비워진 관계망에 나를 응원하고 믿어주는 타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사전에 내가 나 자신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의 말들이 채워져 갔다. 그러니 점차 수치스러운 자아를 숨기기보다는 그것 또한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을 긍휼히 여기며 그 책임의 짐을 덜어주니, 나의 자아는 점차 하나로 통합되어 갔다. 이 과정 속에서 그런 개인이 나뿐이 아니라, 심지어 나를 공격하던 그 타인들에게도 숨겨진 자아가 있다는 것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내가 나 자신의 그 못난이를 긍휼히 여겼듯, 그들을 향한 시각을 긍휼함으로 바꾸며 보게 되면서 내 집중이 내 수치나 모자람이 아니라 내가 마주한 문제의 해결로 돌려졌다. 내가 나 스스로가 처한, 혹은 맞닥뜨린 상황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책임을 지려 한다는 것이다. 자기혐오의 주술에서 풀려나니 내 삶이 앞으로 향하고 해결의 방법으로 향한다.


나를 정말 사랑하는 것은 나를 타인보다 우월하게 여기거나 나만 아는 자기 중심성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책임지려 하는 것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 내 삶의 책임이 타인이나 내면의 또 다른 ‘타자’에게 전가되지 않고, 내가 나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는 삶을 스스로 정의하고 가치를 부여할 수 있음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나는 선택할 수 있다. 삶과 생명을 향한 방식으로. 자기혐오로부터 벗어나, 내가 회피하고자 했던 책임을 당당히 감당하며, 나를 스스로의 코치로서 임명할 수 있다. 나의 존재의 가치를 알고 있는 감독의 말을 잘 전달해주는 그런 코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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