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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Mar 21. 2024

the producer (1)

오랜 벗이자 라이벌이자 균형의 길라잡이 J를 만났다.

오랜 친구와 오래간만에 얼굴을 보며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이제는 각자의 가정에서 두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로, 10대에 만나 40을 바라보는 우리가 지난 20여 년을 건너오며 남긴 흔적들 그리고 앞으로의 비전을 나눠 볼 수 있었다.


사실 지난 10여 년간은 우리 둘에게 실연과 고통, 혹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나 실패감에 찌들어 서로에게 소원해 지고 서운해하는 감정이 북받치던 시간들이었다. 그래도 20대까지는 대충 학교나 직장 정도 그리고 연애만이 조금 다른 시점에 다른 전개가 되어갔는데, 30대가 되며 결혼, 이주, 이사, 커리어, 그리고 두 번의 임신, 상실, 출산, 육아 등의 큰 라이프 이벤트들을 각자가 다른 시점과 다른 환경에서 겪어내며 꽤 다른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히려 서사의 내용은 좀 달랐을지언정, 30대 여성으로, 한인 디아스포라로, 엄마로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것에 관통하는 아픔과 어려움 등을 공감했다. 그리고 과거에는 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어떤 인생을 살고자 했는지를 다시 정의하고 또 아직 실패가 아닌 과정을 지나고 있음을 깨닫게 했다. 역시 30대는 아직 열매를 얻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이 친구는 나와 너무나 다른 성향의 인간이라 사실 당시에도 주변에 우리가 속한 그룹에 들어오는 새로운 사람들은 우리 둘이 베프인 것은 둘째치고 애초에 친한 친구라는 사실에도 놀랐었다. 같은 신앙인이라는 점, 그리고 170센티미터가 넘는 꽤 장신이라는 점, 또 학구열이 있다는 점을 빼고는 딱히 공통분모가 없었으니까. 음식, 패션, 선물의 취향은 물론,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이나 소통방식까지도 우리는 참 달랐다. 그리고 가장 극명하게 다른 점은 인생의 목표에 대한 관점이었다. 그로 인해 가끔은 오해도 하고 갑갑함을 느껴 무례함을 범하기도, 말도 안 되게 불평하며 상대를 나무랄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한쪽은 이상주의자, 다른 한쪽은 현실주의자로 서로에게 건설적인 비판을 해대며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는 그런 서로의 다름을 좋아했다. 나아가, 나는 그것에 바람직함을 느꼈다. 발란스를 맞추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해주는 길라잡이가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대체로 외향인의 모습을 한 나는 대체로 내향인인 그녀와 대화할 때 거의 대부분 그녀의 질문이나 생각에 되받아치는 형태로 나의 이야기를 해댔는데 그중에는 나의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았다. 나는 참 꿈도 내 취향과 관심사만큼 다양했는데, 한 번은 우리가 자주 만나던 널찍한 베이커리 카페에서 나는 이런 꿈들을 이야기했다.


‘난 나중에 라디오 디제이도 하고, 글도 쓰고, 사람들과 담론의 장도 펼치고, 카페도 차리고, 이벤트 코디네이터도 되고, 그림도 그릴 거야!’


어떤 직업을 갖겠다가 아니라, 나는 내가 어떤 행위를 하며 살 인간일지에 대한 상상으로 벅차올라 행복해했다. 어떠한 인간으로 살 텐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나는, 그 어떠함이 실상 그의 행위에서 나오는 정체성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타이틀자체에 대한 말은 아니었다. 그럼 현실주의자에 명예와 자기 위신, 그리고 경제적 만족이 매우 중요했던 그녀는 그게 무슨 직업이냐고 대체 그걸 다 어떻게 할 셈이냐고 비판하는 것이다. 이상주의자는 고사하고 몽상가라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긴 그랬다. 지금은 만연한 아이디어지만, 2010년도 되지 않았을 당시에는 현실가능성이 떨어져 보였을 것이다. 이제 막 아이팟에 사람들이 열광하던 시대였고 정말로 유튜브 같은 채널로 무언가 해낼 수 있을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평면적이고 어딘가 큰 몸에 종속되어 위로 올라가야지만 소위 성공한 삶이라 여기지 않고 싶었고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내 시간을 행복한 순간들로, 내 공간을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로 채울 수 있는 것이 더욱 입체적으로 성공한 삶이라고 여겼기에 나는 내가 원하는 사업체라도 그렇게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삶을 구현해 내기를 바랐던 것이다. 명문 상경계를 졸업해서 어떤 직장을 들어갈 셈인지 좀 더 명확히 그려내는 그녀와 달리, 나는 대학 공부마저 ‘학제 간’ 학문으로, 뭐 웬만해서는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디아스포라 학, 언어학, 유대인학, 사회학을 공부하면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50:50으로 걸쳐 있는 그런 류의 학문을 하던 중이었다. 심지어 그전에는 예술계에 들어갈 생각으로 포트폴리오도 준비했던 그런 사람. 입체적인 방식으로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가장 즐거운 일, 내 몰입과 열정을 이끌어내는 일들이었던 사람. 그래서 나는 그게 왜 현실적이지 않느냐 되물었다.


‘일단 이 세상은 공간과 시간, 경제적인 요건들이 이루어져야 삶을 영위해 갈 텐데, 내가 나의 공간을 마련해서 거기서 장사를 하며 나머지 시간에 내 방송 채널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이벤트를 제공해서 불러 모으고, 그런 생각들을 글과 그림으로 남기는 일이 왜 불가능한 일이야?’


그랬던 내가 30대에 한국행을 하면서 좀 그럴싸한 학위나 해외에서 생활했기에 쥐고 있던 문화자본 또는 언어 자본 정도 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라고 느끼면서 이 모든 것들이 역시 그저 몽상가에 그치던 내 허영이었나 싶었다. 그러면서 현실주의자인 친구가 옳았다고, 당시에 소원해지기까지 한 우리 둘 사이만큼 멀어져 버린 우리 둘의 현실을 느끼면서 나는 나 자신을 미워하고, 한심하게 여기고, 친구에게 더욱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 같다.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열등함을 느끼는 존재가 된 것 같아서.


하지만 그 10여 년을 울며 겨자 먹기로 버텨보고 땅을 치며 후회도 해보고 또 어떻게든 이 상황과 상태를 논리적으로 이해해 보려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노력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는 새에 더 객관화된 사실들에 대한 공부를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결국엔 그 꿈들을 현실화해낼 수 있는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분명한 목표를 가졌거나 구체적인 5년 계획 따위는 별로 없었으며 툭하면 이거 저거 기웃거렸던 것 같았지만 한 가지 뚜렷한 미션은, 나 자신이 치유되고 빛을 구하려는 노력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나 놓친 것들에 대한 후회에서 비롯되었을지언정, 그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선한 계획 안에서 이것들 바라보려 했던 노력. 그 과정에서 더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인간의 창의성은 결핍에 의해 발화되고 그것이 바로 성장과 특이점을 일궈낸다는 사실이다. 20대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선택했다라면, 30대에는 그것을 해내기 위해 내게 없는 자원을 파악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그것들을 채워가면서 그렇게 내가 원하는 삶의 터전과 시간 쓰임을 디자인하며 시행착오를 통해 방향을 잡아가는 시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로 원하는 삶의 모습을 그려내며 그 방향을 잡기 위해 내가 싫어하고 할 수 없는 것을 골라내야 하는 시간은 필수부 가결했음을, 내 지난 10년은 그렇게 허무하게 흘러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 삽질‘을 하며 밑으로 밑으로 더 깊이 땅을 파고 기초를 다지고 있던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고독했던 환경도, 과거의 관계 내에서 모멸감을 느끼거나 도태된 것 같다 느꼈던 점도, 지치고 우울하다 느끼던 고된 육아노동도 모두 나의 성장을 이루는데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고. 가지치기를 하거나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재료가 된 것들 — 이제는 정말 무언가 나만의 기준이나 생각, 이야기를 펼치기가 가능해지는 재료들을 얻었다고 말이다. 이 과정의 단계가 40대에도 이어지겠지만 내게 닥칠 더 큰 시련들 가운데에서도 붙잡고 나아갈 수 있는 삶의 철학, 혹은 진리 같은 파운데이션을 얻었음에는 부정할 수 없다. 사람의 저력은 그런 기초에서 나오는 것이니까.


그래서 그 시절의 이 일화를 꺼내며, 우리의 삶이 틀렸거나 늦은 것이 아님을 말하니 친구도 끄덕인다. 어떻게 그 시절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느냐, 나와는 다른 네가 참 신기하기만 했는데 이제는 참 대단하다며. 나도 마찬가지로, 내가 몽상가에 그치지 않을 수 있도록 현실의 무게에 대해 말해주고, 어쩌면 사기를 꺾는다면 꺾는 것일 수 있었겠지만 그것에 더욱 도발하고자 하는 나의 와일드함을 꺼내준 그 친구가 오히려 내가 나답게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또렷하게 보여준 길라잡이임을 깨달았다. 우리는 달랐기에 서로의 길에 한쪽으로 치우쳐 낭떠러지로 빠지지 않게 하는 그런 길라잡이였다. 오랜 친구는 금보다 귀하다더니, 정말 그러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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