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 Belonging
나 자신에게 먼저 소속된 자아가 느낄 수 있는 타인 속의 내 자리
나 자신을 혐오하는 자아가 과연 누구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취약점을 보면 눈을 돌리게 되는 이유도 사실은 내 안의 자아가 스스로의 취약점을 미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안의 취약점이 다른 이의 모습에서 보였을 때 조금도 여유롭게 바라봐주지 못하고 내 안의 무언가가 들킨 것처럼 몸서리치게 되면서.
사실 나는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왔다.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나는 나 스스로여도 충분하다는 말과 호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 다수가 그렇지 못해도 괜찮았을 것 같다. 그저, 내게 정말 중요한 몇이 나를 알아주었다라면, 내가 객관적으로 강점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고 인정했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들, 잘하는 것들, 관심 있어하는 것들, 혹은 담론화 하고자 하는 것들이 무용하고 무가치하다는 평가이거나 혹은 내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 대화와 자리를 피하는 사람들, 또는 대놓고 조롱하는 평가들 사이에서 나 스스로가 곧게 피어나기엔 나는 어린 새싹에 불과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나 자신을 탈피하고 싶었으나 내 영혼이 내 육체를 떠나 머물 수 있는 곳은 달리 없기에 가면을 쓰며 살아왔다. 타인이 내어주는 작은 공간에 들어가 있으면 될 거라는 착각에 그들이 인정하고 좋아할 만한 무언가가 되면 된다고 생각하며. 물론 어느 정도, 이것은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자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관계에 대한 욕구로, 그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온전한 사랑에서 비롯된 사회화의 단면일 때도 있었으나, 내가 통제할 수도 없고 나일 수밖에 없는 것을 내가 아니라고, 나는 이것이 아니라고 기만하듯 살기까지 용기 없는 나 자신은 비참했다. 그렇게 나는 자기 통제나 자기 객관화가 아닌 자기 검열로, 나를 열렬히 미워하고 있었다. 내 안의 목소리는 작은 실수나 모자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읊조렸다. '그러면 그렇지, 너 따위가'.
다행히도 이성의 자아에는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닐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영혼을 믿는 인간이라서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지만 나보다 더 큰 존재가 주는 용서와 관용으로 조금은 미래지향적인 내면을 품고 살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의 조롱하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그게 모든 사실은 아니라는 이성을 붙잡으며 조금씩 스스로를 달래고 사랑해 주는 법을 배워갔다. 하지만 말이야 쉽지, 나 스스로를 달래고 사랑하는 법은 일단 나 스스로를 마주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또한 끝없는 질문의 수렁으로 빠지는 기분이었다. 나 스스로를 거울로 마주하고도 도망치지 않되, 대체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아껴줘야 하며 어떤 것을 내가 더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하는지 그 노력을 해도 나 자신을 배신하는 일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일인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 고민을 하는 동안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거나 비일관적인 태도가 타인에게 보여지기도 했는데, 그런 과정은 그 자체로 더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나는 그때에도 결국엔 타인이 내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과 조급함이 있었던 것이다. 모든 기준은 타인이었다. 그나마 나는 저항의 의미로 약간의 일탈을 하기도 하고 똘기 넘치는 짓도 당당하게 해보려고 하며 요상한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말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잃고 싶지는 않아서 작은 용기를 냈었고 오히려 나 자신을 쿨함으로 포장한, 개복치의 영혼만 너덜너덜 해질 뿐이었다. 나는 나 스스로를 더욱 미워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까지 밑도 끝도 없이, 어떤 외부의 환경을 넘어 내면에서부터 땅속으로 꺼지는 듯한 무기력은 참담 그 자체였고.
30대 후반을 들어오며 그 노력이 얼마나 헛되고 얼마나 한 발짝만 헛디디으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가를 깨닫고 내가 귀속될 수 있는, 내가 처해야 하는 곳은 그저 나 자신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나 스스로를 괴롭히며까지 나 자신에게 먼저 속하지 않은 채로 타인에게 거하고 싶을수록, 더욱 허탈하고 더욱 외로워진다는 것을. 그들도 다 각자의 자신이 있어서, 사실은 스스로의 껍데기를 탈피하고 싶거나, 자신을 돌보느라 어쩔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을. 그것은 잔인한 일이 아니라, 그저 인간의 인간됨이자 섭리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직면했다.
거울 속의 나를 보았다. 거울 속에 있던 나도 보았다. 그 작은 아이도 십 대의 못난이도, 이십 대의 서글픈 어른 아이도. 모두 내 가장 깊은 자아와 연결되었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다는 그 사실이 너무 안타까워서 처음엔 불쌍하고 화도 났지만, 그 감정들을 소화해 가면서 지금은 과거의 내 모습들을 그리 하지 못한 것에 크게 매이지 않는다. (그 소화하는 방식에는 글쓰기와 심리분석 등 관련 영역에서의 많은 인풋들이 있었다!)
직면이란 그런 것이다. 그저 오랜 과정과 과거의 시간을 지나 지금 현재의 이 상태와 상황과 위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수용할 준비를 위하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지 않도록 용기를 내어, 관찰하려고 이해하려고 오랜 시간을 조급하지 않으며 속단하지 않으며 바라보는 것. 그렇게 나는 조금씩 나 자신에게 귀속되고 있었다. 나 자신의 깊은 뿌리까지 닿고 그 안의 여러 방과 자리에 다양한 내 모습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과 그런 다양한 모습들이 다 충분할 뿐이라는 것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타인을 조금 더 타인으로 대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