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쯤 되어 아이는 다른 나라에 관해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된 관심은 '잘 사는 나라와 못 사는 나라'였습니다. "엄마, 미국은 왜 잘살아요? 그럼 영국은? 프랑스는?" 아는 나라의 이름을 대며 잘 사는 나라인지 아닌지 묻곤 했습니다. 아프리카는 왜 저렇게 못 사냐고도 물었지요. 아이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걸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아프리카 구호활동에 동참하라는 해외원조단체의 광고를 텔레비전에서 자주 봤으니까요.
저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부국과 빈국의 차이에는 한 두 마디로 설명하지 못할 복잡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유명한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처럼 부국은 그에 걸맞은 여러 조건을 고루 갖췄기 때문이고, 빈국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가난할 거라고요. 그렇다면 그 나라의 역사를 알아야 답이 나오겠군요.
당시 눈에 띈 책이『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시공사) 였습니다. MIT 경제학과 교수 대런 애쓰모글루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제임스 A. 로빈슨이 함께 썼는데, 꽤 두껍지만 핵심은 명료합니다. 한 나라가 발전하거나 발전하지 못한 이유는 '정치와 경제 제도'에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선진국이 번영할 수 있었던 건 '포용적인 정치·경제제도' 때문이었고, 번영에 실패한 이유는 '착취적인 정치·경제제도' 때문이었다고요.
장장 600페이지에 걸쳐 기원전 5세기경 마야 도시 국가부터, 로마제국과 베네치아의 몰락, 포용적인 제도를 향했던 영국과 프랑스, 식민지 착취적 제도의 잔재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살핍니다. '문제는 제도야!'라는 주장을 충분히 설득력 있게 풀어가지요. 더불어 국제 원조의 한계, 국가 번영에 있어 시민·언론 역할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마무리합니다. 핵심은 명료하고 사례는 풍부해 읽다 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저자들은 한국 전쟁 이후 남북한의 발전상을 비교하며 제도의 중요성을 일깨웁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둔 두 인접 지역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 까닭은 지리적 문화적 요인이 아닌 바로 '제도' 때문이라고요.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걸친 노갈레스라는 도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도시 안에서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국 쪽 주민은 멕시코 쪽 주민보다 평균 소득이 세 배나 많다 합니다. 인종과 문화가 같아도 제도가 다르면 격차가 생긴다는 증거지요.
부국의 원천이라는 '포용적 정치·경제제도란 무엇일까요? 포용적 정치제도는 충분히 중앙집권적이고 다원적인 정치제도입니다. '다원적'이란 사회 전반에 권력이 고루 분배되어 있고 서로 견제가 가능하다는 뜻이에요. 힘있는 정부가 치안과 인프라를 관리하며, 정부의 권력을 분리·견제할 수 있는 수단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개인과 언론은 표현의 자유를 갖기 때문에 포용적 제도를 위협하는 움직임에 저항할 수 있고요.
포용적 경제제도는 공정한 법 체제 하에서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자유로운 교환과 계약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언제든 새로운 기업이 시장에 참여할 수 있으며 개인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가집니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참여자에게 인센티브를 제공하여 진취적인 사업가가 등장할 가능성, 혁신의 가능성을 높여 줍니다. 인센티브는 번영의 다른 원동력인 기술과 교육을 이끌어내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합니다.
포용적 제도로 번영을 이룬 대표적인 나라는 영국입니다. 명예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왕권보다 의회 권력이 강해졌고, 신흥 계급 젠트리가 의회로 진출하여 귀족을 견제하게 됩니다. 의회가 사유재산권과 특허권 등 상업과 신기술을 보호하는 경제제도를 도입하면서 영국은 부국의 길로 들어서지요. 포용적인 정치·경제제도는 선순환할 가능성이 큽니다. 위의 예를 보면 '명예혁명 -> 포용적 정치제도 (법치주의 , 다원주의) -> 포용적 경제제도 (공평한 소득 분배, 인센티브 제공) -> 포용적 정치제도 (계층이동, 다수 시민의 권력 분점)' 이 되겠네요. 물론 선순환은 저지되거나 후퇴하기도 했습니다.
착취적 정치제도는 일부 엘리트 계층이나 기득권층이 나머지 계층에게 정치권력을 주지 않는 제도입니다. 착취적 경제제도는 한 계층만의 소득과 부를 위해 다른 계층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것이고요. 이 둘은 악순환의 고리를 돌면서 나라를 정체와 빈곤으로 이끕니다. 권력을 잡은 지배층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착취적인 경제제도를 만들어내고, 반대 세력과 정적이 두려워 권력에 더욱 집착하게 되니까요.
콩고, 시에라리온, 과테말라, 에티오피아, 케냐, 나이지리아 등 아프리카 역사를 살피면 착취적 제도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노예 무역 이야기로 시작할까요. 17세기 들어 사탕수수 농장에서 부릴 노예가 부족해지자 유럽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적극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대요. 당시 아프리카는 나라보다는 부족 개념의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데 추장들은 전쟁을 통해 다른 부족을 노예로 만들어 유럽에 팔았다고 합니다. 유럽인과 추장은 노예와 총기를 교환했고, 아프리카는 노예무역과 내전으로 고통받다 결국 식민지로 전락합니다.
20세기 들어 아프리카 나라들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여전히 빈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잡은 일부 특권층이 유럽이 식민지를 착취하기 위해 만든 제도를 이어받아 여전히 다른 계층을 수탈하고 있기 때문이래요. 나라의 군대는 특권층의 군대로 전락했고 반대파가 생기면 숙청해 버리니 그들을 견제 수단이 없는 것이지요. 유럽이 그랬던 것처럼, 특권층은 농민들로부터 헐값에 농산물을 사들여 이익을 갈취하고, 착취에 익숙해진 농민들은 더 잘 살고자 하는 의욕이 없습니다.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는 고사하고 사유재산을 지키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각 나라의 모습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적인 치안과 사회인프라도 문제 될 만큼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에티오피아에서는 권위주의 군사정권이 토지는 물론 사유재산까지 국유화해버렸고, 짐바브웨는 지도자 무가베의 폭정 때문에 생활수준이 독립 전보다 더 후퇴했다고 합니다. 벨기에가 잔혹한 지배했던 지역인 콩고민주공화국은 아직도 제대로 된 중앙정부 없이 부족 간 내전이 계속되고 있어요.
아프리카에서 빈곤을 탈출한 사례도 소개되는데요, 바로 보츠와나입니다. 보츠와나의 추장들은 영국의 지배하에서도 포용적인 제도 즉 중앙집권 제도와 민주적인 의사결정 제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자 이를 국유화하여 부족 간 이권다툼을 막고, 다이아몬드 수입으로 사회인프라와 교육 재원으로 활용했고요. 이 책은 제도가 중심이라 위대한 지도자의 이야기는 별로 없는데, 보츠와나의 경우 지도층의 역량이 국가 번영에 매우 중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유럽 대륙 안에서 서유럽과 동유럽의 격차가 벌어진 지점도 흥미롭습니다. 역사에는 우연적 요소(역사적 부동(drift))가 있기에 필연도 가정도 없다지만, 결정적인 시기는 있었습니다. 저자들은 페스트 발병이 동서 유럽의 결정적 분기점(critical juncture)이었다 합니다. 치명적인 돌림병으로 농노가 급격히 줄자 서유럽에서는 봉건사회가 붕괴되고 시민의 힘이 강해진 반면, 동유럽에서는 오히려 수탈이 더 심해져 농노제가 결국 1800년대까지 유지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에 포용적인 제도로 나아간 서유럽은 번영했고 동유럽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죠.
저자들은 국제 원조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쓴소리를 합니다. 많은 국제기구들이 저개발국 원조를 하고 있지만 제도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저개발국에 원조를 해 봤자 소용이 없다고요. 원조가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그 외 비용으로 들어가거나 엘리트층의 축재에 쓰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잘못된 정책과 제도가 왜, 언제부터 존재하는지 이해해야만 그 나라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교육이나 의료 분야 개선보다는 착취적인 제도를 개선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니 권력에 밀려난 집단이나 지도자에게 힘을 실어주고, 다양한 이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방향으로 국제 원조를 사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합니다.
발전을 다루는 이 책은 문명을 다루는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균쇠 』와 꽤 닮았습니다. 두 책 모두 '왜 어떤 지역 사람들은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정복당했는지, 왜 구대륙이 신대륙보다 빨리 발전했는지' 보여주거든요. 수백 페이지의 근거 자료를 통해서요(읽다 보면 귀에 못이 박히는 기분을 즐길 수 있습니다).『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는 기존 이론인 지리적 위치 가설과 문화적 요인 가설을 비판하고 있어요. '식량 생산과 가축화가 일찍 나타났던 대륙이 더 빨리 발전했다'는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이론으로는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요. 독자로서 저는 대륙 간 불평등은『총균쇠 』, 대륙 내 불평등과 각 국 역사를 살피려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의 손을 들어주겠지만, 결론은 둘 다 읽어야 한다! 입니다.
그럼 처음으로 돌아가서, 아이에게 부국과 빈국의 차이를 이야기해 주었냐고 물으신다면.......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질문은 이어지고 있거든요. "독일이랑 일본은 전쟁에서 졌는데 왜 잘 살아요?", "북유럽은 왜 잘 살아요?" 그래서 대답을 보류 중입니다. 책을 감수하신 장경덕 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불평등은 "사회과학의 영원한 화두"이니 앞으로 더 공부해야겠습니다. 아이가 커갈수록 저도 알아야 할 게 많아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