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퇴사하고 남편과 한 번씩 고민하던 일이 봉사활동이었다. 뭔가 사회가 도움이 되는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어떤 일을 하면 보람도 있으면서 재미도 있을까. 남편은 회사 다닐 때 팀원들과 한 번씩 했던 음식 퍼주기 봉사가 좋았다고 했다. 외국 요양원에 가서 점심을 나눠주는 일이었다. 또는 한 번씩 나무 심기 봉사도 하러 갔는데 사무실이 아닌 야외에서 흙을 만지고 나무를 심는 일은 무척 신났다고 했다.
나는 회사 다닐 때 봉사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퇴사 후 잠깐 고민하긴 했지만, 어영부영 시간이 흘렀고 우리 가족은 지금 한국에 와 있다.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보자는 얘기가 나왔고 나는 우선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책 읽어주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도서관이 있는데 거기서 아이들에게 영어 동화책 읽어주기 봉사활동을 하면 좋겠다 싶었다. 캐나다 살 때 도서관에 가면 도서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동화책 읽어주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되면 엄마들이 유모차를 끌고 아직 말도 못 하는 애들까지 데리고 온다. 또는 아직 유치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이 오기도 한다.
그 프로그램을 떠올리며 나도 내가 사는 단지 내의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영어 동화책을 읽어주는 모습을 상상해봤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자마자 바로 다음날 작은 도서관으로 갔다.
"선생님, 제가 캐나다에서 22년 살다 세종시로 이사온지 이제 한 달 좀 지났는데요.."
"아 네~ 안녕하세요!"
"제가 아이들에게 영어 동화책 읽어주기 봉사활동을 하면 어떨까 해서요."
"우와 너무 좋죠! 말 나온 김에 12월에 바로 시작할까요?"
이렇게 해서 일주일에 두 번 유치부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을 모집하여 책 읽어주는 시간을 갖게 됐다.
모집은 각각 20명씩 받기로 했고 시간은 유치부 40분 초등부 1시간으로 정했다.
그 후에 영어 강사로 이미 몇 년째 일하고 있는 언니에게 전활 걸어 물어봤다. 언니는 한 시간은 처음 해보는 내가 하기엔 절대 무리라며 20분도 힘들거라 했다. 아이들 20명도 엄청 많지만 애들이 지루해하지 않고 집중을 유지시키면서 40분이고 1시간이고 끌고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급 소심해진 나는 도서관에 다시 전화해서 혹시 시간을 30분으로 줄이면 어떻겠냐고 했다. 도서관 선생님은 이미 벌써 포스터도 만들어 모든 동 게시판에 붙였다며 곤란해하셨다.
그렇게 해서 이번 주에 드디어 유치부 아이들 20명에게 영어책 읽어주기 시간을 40분 가졌다.
나보다 더 걱정인 남편이 준 아이디어로 '감정 체크'를 가정 먼저 했다. 캐나다에서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오늘의 기분에 대해 물어보고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에 대해 들여다보고 알아차리는 연습을 매일 시킨다. 자신의 감정 상태를 잘 알 경우, 감정조절이 더 수월하다고 한다. 이것과 관련해서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다양한 액티비티를 한다. 예를 들어 호흡법을 알려주면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연습을 하기도 한다.
큰아이가 한국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 '감정 체크'를 혹시 하는지 궁금했는데 여긴 그런 컨셉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남편이 아이들과 감정 차트를 가지고 얘기를 해보면 어떻게냐고 제안했고 난 좋은 아이디어라고 했다.
인터넷에서 찾은 9개의 감정 차트를 보고 따라 그려서 수작업으로 만들어 갔다. 아이들이 원하는 색의 스티커를 오늘의 감정상태와 맞는 얼굴에 붙이는 방식이었다. 20명의 아이들 중 3명 정도는 본인의 감정이 어떤지 잘 모르겠다고 했다. 행복한지 화가 나는지 걱정이 되는지 슬픈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모를 수도 있다며 괜찮다고 모르는 사람들은 맨 위에 제목에 붙이라고 했는데 3명이나 나왔다.
5살 우리 딸은 걱정된다고 '걱정'에 스티커를 붙였다. 왜냐하면 오늘 'Go Bananas'라는 노래를 춤과 함께 할 건데, 도우미로 내가 부르면 나와서 대표로 보여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친구들 앞에 나서서 하려니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우리 딸 옆에 앉아있던 딸아이 유치원 친구가 자기도 '걱정'이 오늘의 감정이라며 골랐다.
그런데 이 따라 하기는 참 전염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 혼자 튀기보단 두루두루 어울리며 잘 모를 땐 옆사람은 어떤 선택을 하나 보고 나도 그런 선택을 같이 할 때 아무래도 생존율이 높았을 테니 그 습성이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도 어느 정도 맞는 말 일지도..)
많은 아이들이 Excited (신남, 흥분됨)을 골랐고, 그중 유난히 까불이였던 남자아이 둘이 Silly (웃긴, 까불까불 모드)를 골랐다. 그런데 자기감정을 고르는 순서가 거의 끝나갈 때쯤, 대세가 Excited로 몰리자 이 두 아이가 자기들 스티커를 Silly에서 Excited로 바꾸겠다고 하는 거 아닌가.
자기 기분을 들여다보고 고르는 액티비티였는데 그 둘은 스티커가 한 곳으로 몰빵 되어 있는 모습을 원했던 것 같다. 5세-7세 아이들인데도 대세가 뭔지 파악하고 하나로 통일하려는 모습이 정말 신기하게 느껴졌다.
다행히 우리 딸은 본인의 '걱정'상태를 바꾸지 않았고 다른 친구들이 왜 다들 Excited를 고르는지 눈치채지 못한 듯싶다. 자기 꺼 고르고 옆 유치원 친구와 노느라 다른 친구들이 뭘 고르는지 집중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영어책 읽어주기는 첫 수업 치고 잘 끝마쳤다. 책을 한 5권 읽어준 것 같고, 노래 두 개를 두 번씩 하나는 격한 춤과 함께 나를 내려놨고... 하하 아이들 이름을 시작할 때 하나씩 물어봤는데 마스크와 발음 때문에 5번씩 물어보다 나중엔 '어~ 그래~'라며 넘어가기도 했다. 나의 목은 너무 오랜만에 40분 동안 크게 말해야 해서 막판에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처음 어떻게 40분을 채울까 고민할 땐 처음부터 끝까지 영어로만 말해야 하나..라고 고민했는데 그렇게 하진 않았다. 오늘 기분이 어떤지 영어로 뻔뻔스럽게 물어봤고 당연히 뭔 말인지 못 알아듣는 아이들에게 한국말로 다시 설명해 줬다. 영어 동화책도 중간중간 간단히 한국말로 풀어서 설명해 줬다. 다행히 아이들이 책 읽기 시간을 좋아했던 것 같다.
다음 주에 만나면 똑같이 또 '오늘 기분이 어때?'라고 물어볼 건데 좀 더 다양한 대답이 나올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