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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Dec 10. 2023

퇴사를 결심하며 머리카락을 잘랐다

퇴사하기 며칠 전, 어깨 아래로 한참 내려오던 긴 생머리를 남편이 싹둑 잘라줬다. 순식간에 말릴 새도 없이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보며 잠시 얼음이 되었지만, 삐뚤빼뚤 쥐 파먹은 듯한 뒤통수를 확인하고 내심 ‘이건 기회다'라고 생각했다. 진심으로 외모에 신경 쓰지 않고 살아 볼 기회. 중학교 때 이후로 이렇게 짧고 못생긴 단발은 처음이었다. 난 회사에서의 자신감이 머리카락에 있었다는 듯, 퇴사를 결심하며 머리카락을 먼저 잘라 버렸다. 그건 마치 연약한 내 마음이 다시 흔들려 회사를 그만두지 못할까 봐, 미리 머리카락을 자르며 치른 나름의 의식 같은 것이기도 했다.


다니던 은행을 그만두고 나니 화장을 하지 않고 지내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점점 이틀에 한 번씩 정리하던 눈썹도 그냥 두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하나씩 외모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아 보았다.


사회생활 초반, 남편은 직장에서 겪은 우울증으로 이른 퇴사를 원했다. 잘 맞지 않는 상사를 만나 생기게 된 우울증이었다. 남편은 명상과 요가를 통해 우울증을 극복했고, 다행히 회사도 잘 다니는 듯했지만 이른 퇴사를 원하는 마음만은 시들지 않았다. 뭐든지 같이 하는 걸 좋아하는 우리는 7년 동안 노력한 끝에 동시 퇴사를 시도해 볼 수 있었다.


맞벌이 부부에서 자발적 백수가 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산업공대와 MBA를 졸업하고 데이터 분석을 전문으로 하는 일을 하던 숫자에 강한 남편과 그 어떤 투자나 새로운 도전에도 쉽게 멘탈이 흔들리지 않는 무던한 성격의 내가 만나, 7년 동안 조용히 우리만의 작은 성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은행에 취직해서 고소득 연봉을 버는 일이 처음엔 좋았다. 남편과 나는 매년 늘어나는 소득과 줄어드는 학자금 대출을 보면서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쁨은 <이웃집 토토로>를 보며 시골로 이사 가고 싶어 하는 우리의 기질과는 어울리지 않는 생활이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는 외적인 모습에 대한 욕망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무한 자산증식에 대한 욕망도 같이 내려놓는 연습을 하게 됐다.


퇴사를 하며 우리가 꿈꿨던 아침은 이런 거였다. 느긋하게 7시쯤 일어나 방금 내린 향긋한 커피와 함께 아침 햇살이 내려앉은 창가에 앉아 잠시 아침 독서를 하길 원했다. 그리고 조용하지 않겠지만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한바탕 사랑스러운 아침 식사를 천천히 한 후, 다 같이 큰아이를 학교에 걸어서 데려다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매일 정신없는 전쟁터 같은 아침식사가 아니라 말이다.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준 후엔 남편과 둘째와 함께 집 근처 동네를 한 바퀴 산책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새로운 옷을 사지 않는데도 좋았고, 근사한 해외여행을 다니지 못한다 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을 자연과 함께 우리의 속도데로 조금 더 천천히 음미할 수 있다면 좋은 차, 큰 집, 명품 옷과 가방, 고급 레스토랑 등의 소비는 (그때도 없었지만) 앞으로도 영원히 나와 상관없다 해도 괜찮았다.


꿈꾸던 삶을 살기 위해 3백만 명의 인구가 사는 토론토에서 8만 명이 사는 작은 소 도시로 이사했다. 비슷한 크기의 집인데 집값이 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과감한 이사와 함께 두렵지만 지금 꼭 해야 할 것만 같은 퇴사를 했다. 그리고 아침마다 남편과 손을 잡고 멋있는 나무가 많은 동네를 천천히 산책했다.


우리만의 속도로 아침을 맞이한 지 어느덧 3년 차가 되었다. 우리 가족은 조만간 다시 바쁜 토론토로 돌아가 우리의 작은 성을 보수하기로 했다. 그때는 느긋한 아침 산책대신 노을을 바라보며 저녁 산책을 하게 될 수도 있다.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지난 몇 년간 아침마다 쌓아 온 산책의 시간들이 우리에게 다시 도전할 힘을 주리라 믿는다. 


매일 아침 하던 동네 산책길


가위질 두세번에 잘려나간 머리카락


쥐파먹은 듯 잘린 머리. 2년을 버티다 이번에 한국와서 미용실에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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