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숫자를 좋아하는 남편과 산다는 건

by 안개꽃

'숫자가 1-10까지 있다고 치고, 10이 완벽하게 깨끗한 상태라면 지금 우리 집은 4야'


'6 밑으로 내려가면 다시 치워서 8,9를 만드는 게 더 힘들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돼'


요즘 남편과 부딪히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썼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다. 브런치에 글을 올릴 때 최대한 자기 검열 없이 솔직한 글을 쓰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최근 부부싸움을 올린 후론 자꾸 신경 쓰인다. 항상 글을 올리고 남편한테 읽어보라고 알려주곤 했는데, 그 글 이후론 읽어보라고 하지 않았다.


오늘 글의 제목도 얼마 전에 (부부싸움 전에), 생각나는 제목들을 몇 개 작가의 서랍에 적어둔 것 중 하나이다.


우리는 지금 은퇴 후 (아니 퇴사 후, 다시 회사에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가끔 들기 때문에), 과도기를 겪는 중이다. 회사에서 일하고, 어린 두 자녀를 케어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나를 돌볼 시간이 부족했었다면, 지금은 어떤 계기가 딱 있었던 건 아닌데 내 마음을 더 챙기는 중이다.

예전엔 진심 괜찮았던 게 지금은 안 괜찮아진 건지 뭔지 나도 혼란스럽다. 예전엔 남편의 의견에 많은 부분 적극 따라 주었다면, 이제는 남편도 내 쪽으로 넘어오라고 적극 설득하고 있다. 강조와 강요는 불행을 불러 올뿐이고, 우리는 친절과 적절한 포기를 배워야 한다고 설득한다.

우리 남편이 힘들어하는 부분은 친절과 포기이다. 본인의 주장을 강력히 펼치다 보면, 말투는 불친절해 지기 십상이고, 듣는 나는 감정이 상해버려, 아무리 좋은 얘기를 하고 있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나는 특히 가족 간의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가정환경에서 컸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집안 환경은, 어른이 말씀하시면 '네'하고 보는 게 가장 쉬웠다. 내 마음이 진심으로 그 말에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상관없었다.

남편은 나와 정 반대의 분위기에서 컸다. 자유로운 부모님 밑에서 적극적으로 본인의 의견을 피력하고, 부모님이라는 권위가 주는 어떤 무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토론을 펼치곤 했다.


연애를 5년 하는 동안에도 남편과 어머님이 열띤 주장을 서로 펼치는 모습을 자주 봐 왔다. 나에겐 신세계였다.

심한 고부갈등을 봐온 나에겐, 원하는 남편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 디테일한 원하는 시부모님상도 있었다. 감사하게도 둘 다 너무나 좋았다. 요즘 우린 과도기 이기 때문에 새롭게 맞춰 나가고 있는 중이지만, 20살에 만나 연애를 시작할 땐 한 달 만에 '우린 결혼하게 될 것 같아!'라고 서로 생각할 정도로 쿵짝이 잘 맞았다.


7년 전 큰애를 낳고 얼마 안돼 하게 된 부부싸움이 생각난다. 내 생각에 너무나 독특한 얘기라 두고두고 꺼내보는 이야기이다. 숫자를 좋아하는 남편은, 서로 누가 더 집안일을 많이 하는지 얘기하다 '엑셀'을 꺼내 들었다.

남편 생각엔 본인이 50% 이상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그럴 리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남편은 본인의 억울함을 풀고자 엑셀에 모든 데이터를 넣어 보자고 했다. 직업병이다. 남편의 직업이 데이터 싸이언티스트이다. 나는 속으로 어이없어했지만 해보자 했다.

모든 집안일을 세분화하고, 누가 보통 그 일을 맡아서 하는지 적고, 들어가는 시간을 입력한 후 합계를 내어 봤다.

예를 들어, 설거지는 남편이 하고 시간은 20분. 3가지 항목으로 정리했다. 이렇게 해서 합계를 냈다. 결과는 7:3 이였다. 내가 7 이였다. 여기에 아이 이유식 만들기나 이유식 먹이기는 포함시키지 않았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데이터가 생기자 남편은 바로 수긍했고, 본인이 그렇게 생각하고 우긴 거에 대해 사과했고, 물론 집안일을 50% 넘기기 위해 지금 보다 더 노력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하지만 여기엔 부작용도 있었다. 나도 5:5가 아니라는 건 감으로 알고 있었지만, 7:3은 나에게도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이렇게나 하고 있었고, 또한 나는 내가 이만큼이나 한다고 생색내지 않았는데 3밖에 안 한 남편은 왜 5 이상 하고 있다고 느꼈을까?


지금 남편이 5 이상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 남편은 5가 웬 말이냐, 6이나 7은 본인이 감당하고 있다고 진심 믿고 있을 것 같다 ㅎㅎ 본인 피알을 나보다 더 잘하는 건 확실하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은퇴, 그거 얼마면 되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