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 두렵지 않아
언니가 어느 날 나에게 콘덴서마이크를 주었다.
"나는 새로운 마이크가 생겨서 이거 안 쓰는 건데, 네가 써."
마이크를 보자마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갖고 싶었는데 어떻게 알았지?
그날 밤, 나는 침대에서 책상 위에 올려진 마이크를 바라보았다.
이걸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잠겨있었다.
근데 그 순간 나는 이 마이크가 나에게 "무언가라도 해봐"라고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방문을 닫고 마이크를 컴퓨터에 연결했다.
"아, 아."
이어폰에서 선명하게 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이크테스트, 마이크테스트."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마치 어린아이가 혼자 몰래 장난을 치듯 마이크 하나에 신이 나버렸다.
나는 몇 년 전부터 라디오와 팟캐스트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관심의 시작은 나의 예상보다 조금 오래 유지되었던 회사 생활에서 비롯하였다.
비슷비슷한 사람들과 비슷비슷한 이야기.
어느 순간 나는 좀 지쳐버렸다.
그렇게 나의 세계를 넓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중,
어느 날 카페에서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라디오가 그곳의 분위기를 따스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정확히 어떤 방송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조곤조곤 말소리가 참 듣기 좋았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사연은 내가 그동안 주변에서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그 후로 휴대폰에 라디오 어플을 깔아서 종종 듣기 시작했다.
"김이나의 별이 빛나는 밤에", "이석훈의 브런치카페", "김소영의 라디오북클럽"...
엄청 열심히 들어도 되지 않는다는 게 좋았다.
그냥 나의 그 적막한 시간들을 따듯하게 감싸주는 느낌.
그리고 내가 평소에 별생각 없이 지나쳐버린 타인의 순간들과 감정들을 듣는 게 참 좋았다.
그렇게 라디오를 몇 년 듣다가 자연스럽게 팟캐스트를 듣게 되었다.
들으면서 마음 한 켠에서는 항상,
"내가 진행자가 된다면 어떨까?" 하는 달콤한 상상에 빠졌다.
너무 멋질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도 그렇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점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라디오 DJ는 선택받아야 될 수 있지만 팟캐스터는 마음만 먹으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부끄럽지만 나는 팟캐스트를 진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이런 꿈을 꿔왔지만 나는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니가 준 콘덴서마이크를 만지작 거렸지만 아무것도 녹음할 수 없었다.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나는 내가 항상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나는 어떤 것을 하더라도 타이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든 되고 나서 해야 해", "내가 뭐라고 이런 걸 해"라는 마인드는 항상 장착이 되어있었고,
사실 지금도 나는 이렇게 무엇이 되지 않은 채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게,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부끄럽다.
이런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많다.
그리고 살면서 반드시 나를 드러낼 필요도 사실 없다.
내가 만족하면서 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어릴 적 나는 항상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꽤나 즐겼다.
무대 위에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고, 연기를 하고,
나는 나를 표현하는 것을 꽤나 즐기는 편이었다.
대놓고 '관종'은 아니지만 은근한 관종이랄까.
자존감이 떨어지면서부터는 나를 드러내는 게 무서워졌던 것 같다.
조금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냥 조용히 살다가 조용히 죽어야지 싶었다.
남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은 것이 목표였다.
그다지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없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지내는 날들이 늘어날수록 나는 나의 색깔을 잃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원래 여러 가지 색깔이 섞여 있는 사람인데,
이 세상은 회색과 검은색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색들로 나를 칠해버린 느낌이었다.
다채로움을 잃어버렸다.
사실 내가 퇴사를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나에게 칠해진 모든 색들을 지우고
정말 내 안에 있는 색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다.
얼룩덜룩해진 나 자신이 마음에 안 들어 다시 새하얀 도화지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과부터 말하면 나는 지금은 팟캐스트 채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 시작은 친구와의 길고 길었던 통화였다.
친구는 나에게 전화를 가끔씩 걸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늘 한 번 통화를 하면 기본이 한 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시간이 넘는 전화를 끊고 갑자기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진아라면, 왠지 나랑 같이 잘할 수 있겠는데?"
그렇다, 나의 친구 진아는 내가 아는 친구들 중에서도 생각이 깊고 말을 잘하는 친구라 팟캐스트에 최적화되어 있을뿐더러
내가 배울 점이 정말 많다고 느끼는 친구다.
혼자 하기 무서울 때는 나와 잘 맞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도 참 좋은 방법이다.
나는 나의 베프를 설득했다.
"나랑 팟캐스트 해보지 않을래?"
친구는 나를 너무 잘 알고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제안한 것도 알기에 흔쾌히 말했다.
"그래, 너무 좋아."
그렇게 우리는 팟캐스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채널 이름은 '디어마이프렌드'로 지었다.
친구와 나,
우리는 예전부터 항상 서로를 향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는데,
주어가 '나'로 시작해 어떤 일을 겪었고 어떤 생각들을 갖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하지만,
언제나 마무리는 '너'로 끝났다.
"너 참 잘하고 있어"
"너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야"
"너는 이런 점이 참 좋은 것 같아"
그래서 팟캐스트를 통해 우리가 서로에게 말한다는 의미,
그리고 청취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건넨다는 의미를 담아 짓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을 마주한 우리는 설렜고, 신났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이러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라서 무섭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고 생각할지, 어떻게 평가할지.
"정작 남들은 나에게 관심도 없어."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고,
나의 인생, 눈치 보는 거 없이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보고 싶어졌다.
성공한 모든 사람들도 처음은 엉성했을 것이다.
부족한 부분만을 바라본 나 자신에게 팟캐스트를 시작한 것은,
미완성의 상태로 시작해도 된다고,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에게 새로운 시작의 걸음은 생각보다 가벼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이 많은 걸 가져다줄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팟캐스트를 시작했다고 인스타그램에 글을 올리자,
어느 한 지인이 "점점 더 도화지에 다양한 색을 칠하는 그녀"라고 댓들을 달아주었다.
나는 어쩌면 내가 한참 고민하던 무엇이 되어야지라고 하는 그 '무엇'에 가까워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 나의 도화지에 어떤 색들이 그려질지 기대해 본다.
이젠 더 이상 시작이 두렵지 않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