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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6. 2020

다시보는 사도행전

제니퍼의 북리뷰 (하나님의 계획)


 


박영선 목사 책은 어느 것 먼저 읽어도 상관없지만

강해설교를 바탕으로 주옥같은 책이 3권있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꼭 다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그 첫번째 책은 다시보는 사도행전. 


이책은 총 4부(처음교회,이방전도,선교여행,로마행로)로 나뉜다.




제 1부 처음교회

세상속에 남겨지다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의 최우선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저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윤리도 없고 이상도 없고 가치도 없이, 다만 존재를 위해 악하고 미련하고 어둡게 사는 것과 다르게 삽니다. (중략)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가진 자답게 고난을, 위기를, 유혹을, 시험을, 억울함을 극복하고 감수하는 자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중략) 쓸모가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존재 자체가 다른 삶입니다. " 저 사람은 다르다. 무엇이 저 사람을 우리와 다른 존재로 만들었는가?"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빛이고 소금입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라도 늘 흠이 있고 실수를 합니다. 교회가 실수를 하나는 것은 교회사에 너무나 명백하게 나타나 있어서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중세교회의 정치적 부패, 십자군 전쟁과 같은 턱없는 실수, 종교개혁 시대에 보았던 윤리적 부패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만 봐도 1938년에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교회는 이런 실수를 합니다. 교회마저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자로 살아갈 때 당황하는 것은, 내가 곧 죽을 것 같고 나를 보는 자들고 함께 그것으로 끝인 것 같은 상황들 앞에서 내가 그 상황을 바꿔놓으려고 애쓰지 말고 죽으러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중략) 하나님의 자녀들은 잘되면 잘돼서 하나님께 한걸음 더오고 안되면 안돼서 하나님께로 밀려옵니다.


무엇을 살아낸다는 것일까요? 여러분 각자에게 준 시간과 공간의 자리입니다. 누구의 남편이고 누구의 아내이고 누구의 아버지이고 누구의 어머니이고 하는 그 자리입니다.


하루하루의 괴로움을 견디셔야 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세상의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지말고, 영원한 나라를 알고 있는 자로서 반응하십시오, 해도 해도 안되는 것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견디는 것입니다.


신자로 산다는 것, 자기의 인생을 신앙으로 책임진다는 것을 무엇을 해결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삶입니다.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으십시오. 그런데 이 말만하고 실천이 안됩니다. 그러니 멋있게 하려하지마시고 오늘 주어진 삶에서 도망가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삶을 사십시오, 아무도 대신할 수 업습니다. 누군가에게 위로받을 수 있고 누군가에 넋두리할 수 있지만 여러분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그자리를 지키셔야 합니다. 우시고 신음하시고 그리고 기도하시면서 그 자리를 지키시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만드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 이천년 역사의 증언입니다. (중략) 도망가지 마십시오. 앉아서 울고 앉아서 화를 내시고 그 자리를 지키시면 하나님이 거기에서 기적의 나무를 키우실 것입니다.  (중략) 바깥에 돌아다니면서 남의 집 문 두드리지 마시고 여러분의 집안, 여러분의 마음, 여러분의 영혼을 먼저 하나님 앞에 바쳐 채우십시오.



새로운 세상이 열리다.


구약에서는 성령의 임재가 기능과 직무로 제한되었습니다. 제사장직을 맡거나 선지자가 되거나 왕이 되었을 때 주시는 어떤 일시적이고 한정적인 임재였지만 지금 신약시대에 가지는 것처럼 늘 함께 하시는 성령으로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허락된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입니다.


회개를 촉구하다.


"간절히 기도해서 된게아니라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에 응답을 주신다. 간절해서 주신게 아니라 하나님은 그 간절함 때문에 쓸데없는 것에도 응답을 해주시는 자상한 분이시다. 당신이 간절히했어야 되었다는 것은 그것이 쓸데없는 기도였다는 증거일 것이다" 우리가 간절히 구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것을 하셨고 결과를 주셨습니다. 주께서 오셨고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은 기도해서 오시지 않고 간절해서 오시지 않고, 약속으로 오십니다. 하나님이 하신 약속입니다. 구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잘 구하십시오. 장래 일을 알게 되었으니 잘 구하십시오.  (중략)  나이가 들면 우리가 감각하고 우리가 간절한 부분들이 지극히 작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극히 작다는 것은 훨씬 큰 것들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렸을때는 연애 청바지, 기타가 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나이가 들어 보면 사회가 건강해야하고 나라가 튼튼해야 하고 윤리와 정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당연히 이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이 나라와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나라가 정치, 경제, 사회, 국방, 교육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는것을 제가 압니다. 그러니 우리가 행한대로 갚지 마시고 우리의 실력대로 처치하지마시고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지커주시옵소서. 그러면 기도가 끝나게 됩니다.  (중략)  인생을 해결해야할 숙제가 아닙니다. 인생은 하나의 여행입니다.


표적을 보이다.


여러분을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돈을 더 버셔야 되겠습니까? 더 건강하셔야 되겠습니까?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셔야 되겠습니까? 그런것들과 전혀 상관없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당신의 자녀라는 신분과 인생을 주십니다. 영원한 영광의 운명을 허락하십니다.



권력으로 맞서지 않다.


헌금이란 무슨 행위일까요? 성수주일을 한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날은 구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나와 그를 경배하는 날로서 '우리의 시간과 공간을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고 있는 자입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헌금은 ' 이 세상이 보이는 권력과 질서 앞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 아래 있습니다' 하는 것을 증언하는 편입니다. (중략) 이름을 안 쓰고 헌금을 내는 행위 속에는 무엇이 들어올 수 있냐면 이게 선행이고 잘난 행위이기 때문에 이름을 감춤으로써 나는 잘난척하지 않는다는게 들어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이름을 쓰십시오. 헌금을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 아무개가 우리의 모든 권세와 궁극적인 권위가 하나님 앞에 있음을 시인합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억울함을 받아들이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공하고 승리해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는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람들은 메시아를 하나님이 버린 자라고 생각했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일하실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시대나 교회는 자기가 존재하는 시대의 사회와 세상앞에 도전을 받습니다. (중략) 예수님은 희생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희생의 길로 가셧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순종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살하신게 아니고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억울한 자리, 능욕의 자리입니다. 오해받는 자리입니다. 그 길을 통해 전세를 역전시키는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다는 증거가 부활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는 그렇게 열심히 예수를 믿는데 뭐 나아진 게 하나도 없느냐" 그럴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할말도 없고 분하고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 저 까짓거 하나 오해받는 것은 상관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지는것은 제가 못참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안하셨다는 말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내려와보라" 에 대한 답이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들을 알지 못하나이다"였습니다. (중략) 그냥 죽으십시오. 죽는다고 끝나지 않습니다. 부활이 있습니다. 병신이 되십시오. 각오같은 것은 하지 마십시오. 각오는 꼭 각오한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순교란 장렬하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병신이 돼서 죽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선택이 기전에 붙잡혀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신비한 하나님의 붙잡으심으로 우리가 여기에 붙들려 와 있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로 붙잡아 낸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영광스럽다거나 자랑스럽지 못합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게 붙잡혀 와 있습니다.



구제가 복음을 대신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꾸만 세상이 알 수 잇는 것들로 신앙을 확인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세상의 위협을 겁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신앙에 대해 자신이 겁을 먹고 누군가에게 확인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꾸 세상앞에 우리가 좋은사람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세상앞에 설명하려는 것이 점점 더 커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그 교회가 애국심을 얼마나 갖고있느냐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는데까지 나갑니다. 미국의 극우파 교회에 가면 강대상에 국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 간겁니다. 기독교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것으로 끌고 가는 것인데 그렇게 해서 되지 않습니다.


구제를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해야할 일입니다. 다만 그것으로 자기 할 일으르 다한 것 같이 생각하지느 마십시오. 여러븐 교회의 일원이 되시면 교회에서 함께 책임을 나누셔야 합니다. 대형교회가 생기면서 숨을 수 있는 틈이 생겨버렸습니다. 들어와서 책임을 같이 나누어 한 교회를 제대로 교회답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합니다. 비판만 하고 비난만 하고 고함만 지르고 도망가는 것 말고 실제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살아내다

제가 보기에 기독교 신앙은 삶이어야 합니다. (중략) 기독교 신앙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싸움입니다. (중략) 여러분이 선행이나 구호로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인생을 사는 것을 대체해서는 안됩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아무리 좋아도 대상이 없는 사랑은 말이 안되는 이야기입니다. 대상이 없는 사랑은 거짓말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중략) 여러분이 훌륭해지고 여러분이 능력이 생겨서 하나님을 도우려고 하지마십시오. 그의 일하심과 부르심과 신비한 십자가의 비밀에 순종하십시오.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다

우리는 예수께서 오신다고 전한 선지자들을 다 죽인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먼저 나를 바치고 먼저 이해하고 시작을 합니까? 먼저 시작되고 그리고 나서 이해합니다. 나중에 돌아보니까 하나님이 먼저 일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늘 그렇습니다. 이해가 뒤 따라옵니다.




제 2부 이방전도

도망간 자리에서도 일하신다


사마리아는 북왕조 이스라엘의 수도입니다. 북왕조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남왕조 유다는 바벨론에게 망했습니다. 먼저 북왕조를 멸망시킨 앗수르는 그나라에서 쓸만한 인재는 다 잡아가고 평민들만 남겨두고, 그 자리에 다른 민족을 이주시키는 혼합정책을 폈습니다. 민족성을 말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 앗수르가 바벨론에게 또 멸망당해서 바벨론이 큰제국을 이루고 남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남왕조 유다는 바벨론에서 귀환을 하는데 북왕조 이스라엘은 회복이 안되고 이제 유다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이 회복됩니다. 그때 회복된 이스라엘이 사마리아에 남았던 사람들을 동족으로 취급하기를 거부합니다. 혼혈이라고 해서 이방인과 똑같이 외면하고 차별했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서 북쪽으로 갈일이 있으면, 사마리아를 밟지 않으려고 옆지방으로 돌아서 갔을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 애굽에서 해방되고 광야 40년을 지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사사시대를 보냅니다. 그리고 사울 왕을 시작으로 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사울, 다윗, 솔로몬까지만 통일왕국이었고 그 이후 남북왕조로 분열됩니다. 북왕국은 이스라엘 열두지파 중에 열개지파가 연합해서 세웠기 때문에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를 가져갔고(에브라임은 북왕조 열지파 중에서 우두머리역할했던 지파입니다) 남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두 지파만 남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컸던 유다의 이름을 따서 유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포로에서 돌아와 회복된 다음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보다 유다라는 이름이 더 우세해졌고 우리도 오늘날까지 그들을 유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는 야곱의 나중이름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아브라함, 모세, 요셉, 다윗, 엘리야 이런 사람들을 기준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훌륭해져야 복음이 소용이 있고 가능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책이 많습니다. 늘 자책합니다. 복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이해관계도 아니며 유능함과 무능함의 문제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랑의 관계입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지 마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십시오. 우리는 야곱같이 우리의 연약함과 비겁함에 늘 휘둘리는 자이지만 예수 안에서 우리의 못난 선택, 못난 현실, 실패 같은 것들이 우리를 흔들 수 없는 자라고 사도행전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중략) 우리가 도망간 곳엔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 자리가 없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약속을 어디에서 주셨습니까? 벧엘에서 주셨습니다. 얍복에서 준것이 아닙니다. 울며 간구해서 준 것이 아니라 도망가고 생각없는 야곱에게 주었습니다. (중략) 여러분은 실제 현실이 겁나십니까? 누가 여러분을 겁먹게 합니까? 어떤 명분 어떤 자랑이 어려분을 겁먹게 해서 스스로 입을 다고 자기 생을 살지 못하고 그저 남을 기웃거리고 큰소리치는 사람 앞에서 꼼짝 못하게 합니까? 여러분 자신입니다. 복음이 왜 복음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중략) 야곱이 걸어 망친 모든 실패와 배신과 좌절과 그 기만과 절망, 눈물과 탄식의 자리를 따라 들어와 하나님의 축복으로 다시 회복하십니다. 눈물의 자리까지 들어오십니다. (중략) 앞으로는 빌립을 존경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귀한 줄을 아십시오.



우리의 약함도 감싸신다

혹, 여러분이 어떤 회심의 순간, 누구의 증언이나 설교 혹은 기도를 통해 어떤 변화가 일어난 그때의 정황을 기억하고 있을지라도 그 모든 것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왔을 때의 무대에 불과하며 하나님이 찾아오신 방법에 불과합니다. (중략) "너희가 가는 길을 내가 원하고 내가 정한 것이다. 너와 함께하고 있다. 걱정마라"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는 납득이 안됩니다. 그러니 성경이 하는 이야기는 납득이 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실패했을 때도 주께서 그 일로 일하십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누가 당신 예수 믿는거 맞아? 그러면 이렇게 답하십시오. "그러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의 자랑, 결코 정죄함이 없는 예수님 안에 있는 축복, 그것이 우리의 인생인 줄 아시는 자랑과 감사가 넘치는 인생 사시기를 권합니다.



사랑받는 자녀로 삼으신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며,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했다는 것도 복음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중략) 하나님은 특공대같이 들어왔다가 일 하나 해결하고 나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기도해야 찾아오시는 구조대가 아닙니다. 넉넉한 마음과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인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성경적으로 붙드셔서 사랑을 받는 자의 영광을 누리십시오. 신뢰를 나누는 친구로서의 그 명예를 지키시는 신앙의 큰 재미, 큰 약속을 여러분 삶 속에서 누리시는 귀하고 멋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은 넉넉하시다

 유대인들이 초대교회에서 이방인들이 그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오해하고 거부했듯이 기독교 시대에 와서는 지금까지 기독교 내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거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자들이라는 거부가 있고 마치 버려진 자식인 것 같이 구별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늘 열려 있습니다. 의심하는 자도 오고 반대하는 자도 오고 물어보려고도 오고 호기심으로도 오고 언제나 열려 잇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닫고 싶어합니다. 어떤 자격 어떤 특징 같은 것으로 닫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믿는 자들에게 닥치는 가장 큰 시험이 이것입니다. 내가 잘하면 하나님이 내 편을 들고 내가 잘못하면 하나님이 외면한다는 식의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중략) 한번 두번 세번 까지는 봐주시지만 네번재는 안봐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넉넉하십니다. 돌아오는 시간을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넘어지면 일으키시고 무릎 닦아 주시고 눈물 닦아주시고 내 손을 잡아라, 그러시지 "거봐" 그러시지 않습니다.


자식 잘되게 해달라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관두십시오. 아프시면됩니다. 고통스럽습니다. 우십시오. 손해 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견딜만큼 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자기 일을 하며 기다린다

아무도 지금 잘못하거나 지금 못마땅한것으로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지 마십시오. 가장 많이 틀렸던 자가 가장 훌륭하게 돌아오는 경우를 우리는 한두번 보는게 아닙니다. 그것이 교회입니다. 떠밀어 내보내지 마십시오. 못하겠으면 그냥 기다리십시오. 자기 일하면서 기다리십시오. (중략)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갑니다. 우리의 길, 옳은 길을 갑니다. 용서하는 길, 기다리는 길, 정죄하지 않는 길 말입니다. (중략) 여러분은 살아내지 않으면서 누구에게 정치 잘하라고 하고 누구에게 좀 더 잘하라고 하지 마십시오. 그러지 마시고 여러분의 인생을 사십시오. 위대한 사람으로, 세상이 감당못할 사람으로 사십시오.



어떤 조건과 환경도 감수한다

아무도 양보하지 않는 사회에, 오직 이기심과 경쟁밖에 없는 어떤 정의도 어떤 평화도 만들어 낼 수 없는 인류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인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 희생, 양보, 억울함을 지라는 것입니다. (중략) 예수를 믿어서 이 자리에 오지 않으시면 여러분의 신앙은 죽은 다음에만 쓸모 있게 됩니다. 현실에서는 쓸모 없습니다. 그리하지 마십시오. 지금 써먹는 신앙이 되십시오. 그리하여 감사와 자랑이 있는 인생을 여러분 스스로 확인하여 가슴을 펴고 살게 하십시오.



제 3부 선교여행

세상의 것으로는 증명하지 못한다 


십자가란 고통이며 비난이며 오해며 수치입니다.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은 강요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로 그 이야기를 합니다.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게 아니다. 사랑은 산을 옮기는능력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뭐냐? ' 우레와 같은 소리로 이렇게 선언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오래 참는 거다' Love is long-suffering. 입니다.



세상과 구별된다

고린도 교회에는 믿음이 연약한 자, 우상을 섬기지 않기로 하고 하나님만 섬기기로 했으니까 우상제물은 먹지 않겠다고 이해하는 순박하고 분명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신은 없고 이것은 사람들이 스스로 속인 것에 불과하다는 지점까지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믿음은 자라는 것이니까 이렇게 실력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략)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라. 그것이 너한테는 괜찮은 것이지만 그에게는 오해가 되고 시험이 되는 것이라면 네가 절제하라(고전8:7-13)



예수 믿는 것이 정죄용으로 쓰이면 여러분은 기독교 신앙을 오해하시는 겁니다. 다른 사람하고 비교하여 누구를 정죄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확인하지 마시고 여러분의 할수있는 진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실천 여러분이 가진 믿음을 지켜내셔야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자기가 아는 만큼 사십시오. 다른 사람이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것은 놔두십시오. 내가 지나온 길을 누가 지나오거든 그 사람을 위하여 더 많이 절제하십시오. 그리하면 우리가 가지는 신앙적인 절제들이 자랑인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구를 비난하고 정죄하고 경멸하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도 되는 것을 절제할 수 있는 이 특권이 얼마나 큰 것인지 예수께서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믿음의 자랑과 만족이 생깁니다.


예수를 믿으면 다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슨 싸움을 하고 있는지, 어떤 역할로 보냄을 받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갈5:22-23)"




친구로 부르신다

유대민족은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이방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자기 민족에 대해서 그 마음에 깊이 책임을 가집니다. (중략) 여러분 여러분ㄷ의 아내가 지옥 간다고 그러면 '넌 안믿었으니까 지옥가라 난 천국간다' 그러시겠습니까? 아내가 지옥가면 난 쫓아갈꺼에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냉정하고 그렇게 말이 안되는 것이 아닙니다. 피가 흐르고 눈물이 있습니다. 사랑이란 그런 겁니다. 그런데 신앙이 이데올로기가 되면 가장 근본적인 윤리를 깨버립니다. 친구 혈육 이런 것을깹니다. 이런 것을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습니다.



일부러 틀리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자신있게 틀리십시오. 그리고 용감하십시오.' 하나님 어저께는 할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다르게 할 작정입니다' '하나님 저녁이 되니 잊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가십시오.



기꺼이 죽음의 길을 간다

나는 예수께 잡힌바 된 사람이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의문의 도전을 남기십시오. 저 사람들은 다르다, 도대체 왜 저 희생과 저 성의를 가지고 사는 걸까? 하고 묻게 만드십시오.



제 4부 로마행로

하나님이 불러 보내셨다

바울이 앞으로 벨릭스, 베스도, 아그립바 앞에서 그리고 궁극적으로 가이사 앞에까지 가서 그들이 알아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시는 손길이 되어가는 길을 갑니다. 그가 당하는 세상의 모든 무관심과 억울함에 대하여 그는 아무런 불평이 없게 됩니다.


은혜를 누리며 나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고전 15:58)



하나님은 끝없이 기다리신다

하나님은 죽이고, 회개시키고, 하는 강제력을 쓰지 않으십니다. 부활이란 기독교가 가지는 중요한 신앙의 기둥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한 복음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에는 죄의 용서와 죄인의 승리가 들어 있는데 그 내용은 죄인으로서 가지는 승리가 아니라 죄인이고 심판받아야 하는자에게 주는 용서를 넘어 그 용서 후에 가져오는 영광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무의미한 시간은 없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바쳐야 하는 하루를 하나님의 자녀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헌신합니다. (중략) 어차피 죽어나가는 인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가진 자의 넉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으로 현실을 가로지른다 

"저 사람은 저 꼴에 무슨 목사냐?" 그 사람은 자기 운명과 자기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합니다. 한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인생을 걸고 있는데 그 앞에서 심사위원 하시면 안됩니다. 심사위원하지 마시고 자기 인생을 거십시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선포입니다.


할수 있는 만큼 하십시오, 열심히 하시고 넘어지면 거기가 끝이 아닌 줄 알고 돌아오십시오. 혹시 예수님을 파셨습니까? 그 자리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 안에서 확인하십시오. 그리고 제정신이 돌아오면 돌아오십시오.



위대한 것은 복음이다

바울과 여러분의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 보듯이 예수님을 믿어서 문제가 풀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예수를 만나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을 벗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고난의 인생에 대해 그것이 자신의 신앙 이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딤후 1:7-8)



박영선 목사 기도중에서 

우리가 있는 곳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고 그 기적도 반복되게 하여주시옵소서.
내 인생을 책임있게 사는 특권과 명예를 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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