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6. 2020

프랑스적인 삶

제니퍼 북리뷰


기껏해야, 느리게 사는 삶 정도를 예찬하는 책인 줄 알았다.

프랑스 어머니의 교육법같은 정도의? 근데 이 책은 그런책이 아니었다. 첫 문장자체에서 책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장폴 뒤부아를 비롯해서 많은 작가들은, 어쩌면 글을 쓰면서 차마 회복할 수 없는 슬픔과 상처를 치유해가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형 뱅상은 1958년 9월 28일 일요일 초저녁에 툴루즈에서 죽었다.



어쩌면 너무 슬픈 그의 가족사를, 너무나 유쾌하고, 재미있게 써내려갔다.

참 부러운 재능이다.




편애하는 밑줄

 나의 형 뱅상은 1958년 9월 28일 일요일 초저녁에 툴루즈에서 죽었다.
형이 죽는 그 순간에 그러니까 내 첫번째 반응은 그에게서 그의 물건을 빼앗고 독점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훔치는 것이었다.
뱅상의 장례식은 끔찍한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 부모와 내가 모두 노력했음에도 우리는 결코 진정한 가족을 다시 만드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아버지는 나에게 형의 카메라 브라우니 플래시 코닥을 건네주었다. 물론 나중에 그 카메라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으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한 채였다. 뱅상의 죽음은 우리 인생의 일부를 기본적인 감정의 상당 부분을 잘라냈다.
할머니는 매번 성당에서 신부를 모셔다놓고 집의 문턱에서 할아버지를 맞이했다. 용감하게 떠났던 사람이 북아프리카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다가 돌아왔는지 자신이 저지른 파렴치한 행각을 당장에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바로 까다로우며 엄격하고 화를 잘 내는 마리 블릭이었다, 그리고 카톨릭 신자였다.
나는 전혀 공산당원이 아니었음에도,할머니 마리 블릭은 자신이 증오하는 인물을 나란히 세워놓은 팡테온에서 스탈린이나 불가닌 같은 공산주의자들보다 앞자리에 그 유명한 미코야시 앞에 나를 앉혀놓은 것 같다. 할머니는 그를 경멸할 때와 똑같은 태도로 나를 대했고, 나에게 말했다. 형이 죽은뒤에는 더 심해졌다. 할머니 눈에는 뱅상만이 항상 블릭 집안의 단 하나의 유일한 후계자였다. 형은 내 아버지를 꼭 닮았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이미 엄격함과 성숙함의 싹수를 지니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겨우 새싹이 돋았을 뿐이었다. 남아도는 정자로 인해 태어났을 뿐이었다. 나는 어머니와 닮았다, 말하자면 블릭집안이 아닌 다른 집안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해 크리스마스 저녁 식사는 내 기억속에 오래 남을 것이다. 나는 그때 열두살이었다.
우리 할머니 마리 블릭은 뒤늦게 드골 식의 규범으로 개종했지만 본심은 페탱(1856-1951 프랑스 장군)파이고 맹렬한 기독교인이며 반공산주의자였다. 망데스를 미워하고 나를 미워하고 요리가 나오는 중에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는 그녀는 알제리의 장래에 대해서 전적으로 회의적이었다. 알제리는 부도덕한 나라이므로 기독교 세계를 위해 영원히 패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언제나 칠면조 한 마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화해했다.
그 시대 우리가족은 이러했다. 불쾌감을 주고 고루하고 반동적이고 너무나 슬픈 모습이었다. 한마디로 프랑스라는 나라와 많이 닮아있었다.
나는 열세살때 빅토르 위고 때문에 사정의 원인과 그 역학적 구조를 발견했다.
이번에는 발기하고 나서 갑작스런, 대 천사를 닮은 듯한 신비한 현상이, 곧 사정이 일어났다. 얼굴이 빛나는 순례자처럼 나는 그때 갑자기 깨달았다. 이제부터는 오로지 그 떨림만을 알기 위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떨림을 느끼고 난 다음에야 세상은 움직였으며 떨림으로 인해 지구는 돌고 있었다, 떨림은 기근을 낳았고 전쟁을 일으켰으며 인간 생존의 진정한 동인이었다,
다비드네 집을 자주 가면 갈수록 그집 외아들의 특별한 성향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가구와 화려하 자동차에 대한 아주 두드러진 취향 이외에도 이 부부는 끊임없는 성적 갈망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집안에서 로샤스 부부는 서로 몸을 슬쩍 건드리고 찾아다니고 달콤한 말을 주고 받고 애무하고 포옹했다.
그때 1965년 여름에 나에게 개인적인 변화가 있었다. 어학 담당 교사의 충고에 따라 나의 부모는 런던 남부에서 한시간 거리에 있는 끝모를 감옥같은 곳으로 나를 한달 동안 보내기로 했다. 그곳은 이스트 그린스테드의 앳워터가에 있는 끔찍한 가정이었는데 오로지 어학 교육이 목적이었다.
1년이 조금 지난 1969년 4월 28일 드골은 지방제도 개혁과 상원 개편 국민투표에서 패배해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가족이 모여 텔레비전 앞에서 별 감동없이 선거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을때 갑자기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무엇을 잡고 싶은듯 나의 아버지가 손짓을 했다. 그리고 나서 식탁위로 푹 쓰러졌다. 아버지가 겪은 최초의 심장병 발작이었다.
그 당시에는 집을 찾기 위해 5년 동안의 급여명세서와 여섯개의 진단서 일곱달 동안의 보증금 여덟달 동안의 은행보증 범죄기록에 대한 아홉통의 복사본을 제출하고 상속자의 면모를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지는 않았다.
그때 지퍼는 산타나의 솔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날부터 내 삶은 대체로 두 사람이 있는 곳에서 마주치는 때를 엿보며 짜여졌다. 나는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자연스레 그들 모임에 끼고 그들의 호감을 얻고 친숙한 인물이 되어야했다. 그 시기를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거미와도 같았다. 사랑의 집을 짓기 위해 수없이 많은 실을 짜면서 인내했고 과감했으며 이 세상에 대해 맹목적이고 내 임무에만 몰두했다.
출생신고를 할 때 우리는 아이의 이름을 뱅상이라고 지었다. 사실 단 한순간도 내 아들을 다른 이름으로 부를 것을 상상해본적이없었다.
몇해동안 보모 생활을 하도록 한껏 격려해주었던 안나도 이제는 내가 집안일을 그만두기를 바랐고 사진 작업을 끝까지 해보라고 부추겼다. 그녀는 내 사진 작업에 대해 아주 단호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기술적으로 비난받을 소지는 없지만 내 사진에는 특히 생명력과 현실세계와의 연관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꼬집었다. 확신을 갖고 다소 거만하게 말하는 안나 때문에 항상 성가시긴 했지만 그 상황에서 전적으로 아내를 비난할수는 없었다. 전혀 인간적인 체취를 찾아볼수없는 수많은 내 사진에서 굳이 인간적 자취를 찾는 사람이야말로 사실 매우 악의적일 터이다.
나는 오로지 사물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광물조각과 식물의 한 단편을 사진으로 찍었다. 이따금 순수한 추상에 스스로 만족했고 빛에서 무지개를 또는 어둠의 깊이를 순간적으로 포착한 것에 아주 행복했다. 안나의 비판을 통해서 그녀가 의도하는 나의 진로가 어떤 것인지 알수 있었다.
안나 앞에서 아톨과 관련된 것은 결코 건드리지 말았어야했다. 우스꽝스러운 거품냄비 벌룬, (중략) 건드릴 수 없는 성스러운 성역에 속했다. 아톨의 제품 중 가장 별로인 것조차 별로라고 말하는 것은 안나 개인을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겼다.
안나에게는 결국 행복의 조건이 두요소의 결합으로 요약되었다, 즉 빵빵한은행예금 잔고와 아주 커다란 집이었다. 내가 망설이는 것을 무시하고 그녀는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시하기 위해 대형주택을 사들였다.
그 당시에 나는 어리석게도 아이들과 늘 가까이 있고 기꺼이 마음을 쓰는 아버지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아이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아이들과 중요한 것을 공유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나에게서 삶을 혼란스러워하는 사회 부적응자의 모습을 보았다. 사회의 기준을 무시하고 시간계획이나 목적도 없고 집안에서 살림을 한다지만 일요일마다 어디론가 떠나고 별안간 오랜 기간 여행도 마다하지 않는 일탈의 모습을 보아온 것이다. 아주 나중에서야 나는 아이들이 그런류의 모호한 기인을,떠도는 존재를,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을 싫어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리와 뱅상은 정상적인 아버지를, 이를 테면 자기들 학교 생활에 맞추어 정해진 시각에 회사에 출근했다가 집에 돌아오고 가끔 학교 선생도 만나고 이따금 주말이면 가족들을 데리고 야외로 나가고, 여름에는 (중략)
내가 심정적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게으르고 또 안이해서 삶을 어떤 방식으로 이끌어갈지 더 이상 알수없다는 것을 공정하게 말을 들어주는 사람에게 어떻게 이해시킬까. 우리의 대화에 보두엥라르티그는 꽤나 당황한듯했다. 내가 치료에 대해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으면서 단순하게 스포츠나 정치 또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나 주고받으려고 돈을 지불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가 다른 문을 열어주기를 가령 좀 더 일상적이고 내밀한 세계를 보여주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형의죽음, 형의 호화로운 사륜마차, 신중한 성격의 아버지, 창백한 어머니, 안나의 침묵, 장모의 가슴, 로르의 엉덩이. 다비드의 고깃덩어리, 미테랑의 나무, 방아벌레의 포물선 같은 것. 즉 한 남자를 만들어가고 어느 순간에 자기 뒷발로다시 일어서는 것을 돕기도하고, 동시에 억누르기도 하는 사소한 것들 말이다,
이따금 보두앵라르티그는 우리의 대화를 좀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가려 애썼지만 나는 변함없이 곤충과 함께 하는 평범한 일상으로 그를 이끌었다.
나와 같은 세대이고 게다가 두뇌회전이 빠른 남자가 어떻게 아무런 통찰력도 없이 이미 1962년에  퐁피두 정부 시절에 건설교통부 장관과 시설부 장관을 지낸적이 있는 왕촌놈 정치가를 지지할 수있는지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보두앵라르티그의 주장은 간단했다. 자크 시라크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결정적으로 비열한 시대와 단절하는 의미를 담고있다는 것이다. (중략) 사실은 보두앵라르티그가 시라크를 지지한 유일한 이유는 좌파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나는 4년이라는 긴 터널을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 그 과정은 점점 더 고통스럽고 우울하게 느껴졌다.
어느 날에는 마치 광산의 지하 갱에서 일하다가 지상으로 올라오듯 그 어두운 창자 같은 터널 속에서 뛰쳐나왔다. 어머니를 위해 일하는 것이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게 힘들었다. 노화와 질병으로 결국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일이라니. 이어 내게서 점점 더 고상하지 못한 감정이 싹트는 것을 확인했다.
어머니가 내 시간을 훔쳐간다고 원망했으며 더이상 노력할 것이 남아있지 않다고 불평했다.
나의 이 모든 불평불만은 더없이 부당한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신영복 (강의 & 담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