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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6. 2020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정체성

밀란쿤데라


오랫동안 동경했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던 그 남자, 밀란쿤데라. 

민음사 편집본을 만든 편집자에게 무한 감사를 드리고 싶다. 도저히 그냥 흘려 보내기 아까운 이 계절, 덕분에 쿤데라씨를 만나게 됐다. 



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배경은? 체코가 체코슬로바키아이었던 시절의 프라하, 그리고 취리히 (1968년 민주화운동시절 프라하의 봄 시기다)


큰 줄기는? 소련 공산주의 지배하의 지식인의 고뇌와 존재의 가벼움과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 키치에 대한 것. 


이 책을 읽은 후 제니퍼씨가 생각한 세가지 것들 

'한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니까' 그래서 그 한번을 막 살거냐, 제대로 살것이냐는 개개인의 선택에 달린건데, 개개인의 선택을 하기에 밀란쿤데라가 살았던 시기는 스탈린과 독재에 의해 억압받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비극적이다.

남녀사랑은 개와 인간의 사랑보다 열등하다. 이해관계가 없는 것이 진정 사랑인데 인간사이에서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이해관계가 성립되지 않기는 힘들다는 것. 

비열한 공개 철회서는 서명자들의 몰락이 아니라 상승을 동반한다는 것.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바에 대해 주장했던 글에 대한 정부와 언론의 탄압이 이어지다못해 철회서를 요구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의사라는 직분을 잃으면서까지 철회서를 거부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나는 (개)바람둥일지라도 토마시를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다.


키치는 무엇인가? Kitsch

19세기 중엽 독일 부르주아 중산층이 상류층의 삶을 동경하며 지녔던 싸구려 복제예술품을 칭하는 용어. 지금은 그 의미가 확장되어 획일화된 이념, 다양성의 부정, 우아하게 포장된 관념같은 것에 대한 총칭이 되었다. 프라하를 점령한 소련의 행위는 공산주의라는 가치 아래 민주화를 열망하는 체코 국민 개개인의 존재를 말살하며 전체주의적 사고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키치의 사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키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묻는다면 우리가 키치를 경멸하더라도 인간조건의 한부분으로 자리잡는다는 걸 부인할 수가 없다. 


이책의 6부 대장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장교와 같은 수용소에 수감된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1907-1943)가 변기를 더럽게 쓴다며 욕을먹다 결국 '똥'때문에 고압철조망으로 달려가다 자살로 숨을 거둔 이야기로 시작한다. 고상한 비극 (스탈린의 아들이라는 운명)과 똥이 적나라하게 대비된다. 신의 아들에서, 똥으로 비난을 받은 가벼운존재로 전락하자 자살을 하게 된 것. 이 똥이 부정되는 세계, 이러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를 키치, 라고 한다. 키치란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을 의미한다. 아니 똥 안싸고 사는 인간있나?


주요인물들

밀란쿤데라의 소설 속에는 그닥 평범하지않은 네 남녀가 등장한다.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그리고 프란츠. 

아니 그런데 위대한 작가는 모두 심리학 전문가란 말인가? 내가 좋아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신기하게도 웬만한 정신과의사만한 심리분석능력을 가지고 있는듯하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길은 그래서 더 요원해보인다, 고 생각했다. 


토마시는 잘 나가는 의사였으나 정부나 언론의 공개철회서 쓰는 것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아니, 어쩌면 테레자 주장대로 테라자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그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싶다) 결국 유리창 닦는 사람에서 시골의 트럭운전수가 된다. 

토마시에게 테레자, 라는 여인은 '바구니에 실려 강에 떠내려온 아기'같은 연민의 대상이다.

그녀를 위해 종국에 그는 자유를 포기하게 된다. 그가 생각하는 자유의 공간은 이상하게도 오직 여자와의 섹스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천하의 개바람둥이 호색한이(정부 외에도 1년에 12명의 여자와 자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이 사랑하는 여인 (연민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은, 진리인가 헛소리인가?) 테레자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시골 트럭 운전수가 된다. 그리고, 아니 그렇게 연민에서 시작된 가벼운 그의 사랑은 결국 자의&타의 그리고 상황에 이끌려 차츰 무거운 사랑으로 변해간다. 전부인 사이에서 낳은 아들 시몽과의 관계도 회복해야 하는데 그에게 테레자는 너무 큰 존재다.

테레자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천박한 엄마'다. 월경이나, 섹스 따위의 것들에 지나치게 솔직하게 말했던 엄마. 타인의 엄마라면 이해했겠지만 내 엄마, 라는 이유로 이해할 수 없었던 유년시절의 상처. 그러나 그녀의 현재 삶 역시 그것으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못하다. 술집의 천박한 손님을 상대하는 웨이트리스. 그런 사람들 속에서 안나 까레리나를 읽는 토마시를 만나면서 테레자는 지긋지긋한 육체적인 삶을 끝내고 영혼의 삶을 추구하고자 한다. 하지만 웬걸, 토마시야말로 희대의 호색한이 아니겠는가! 일년에 12명 정도의 아내나 정부가 아닌 낯선 여자와 자는 것을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늘 그의 머리에서 다른 여자 성기의 냄새가 난다고 믿으며 밤마다 괴로워하는 그녀는 토마시에게 바라는 것이 많다. 하지만 타인으로부터 스스로 욕망이 채워지기는 불가능한 법. 토마시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국 그녀 자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테레자는 우울하고 슬픈 삶을 지속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키우는 개 카레닌이 죽게 되고 그 죽음을 통해 비로소 테레자는 사랑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된다. 진정한 사랑이란 이해관계가 없어야 한다는 것. 잘나가던 의사에서 시골 트럭운전사로 전락한 토마시를 보며 모든 것이 자기탓만 같아 죄책감을 느낀다.

사비나는 토마시와 프란츠의 섹시한 정부다.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가다. 

프란츠는 아내와 딸이 있지만 한때 정부였던 사비나를 동경하며 살아간다. 그녀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이미 떠난 그녀에게 인정받고자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반대하며 의료봉사를 지원하자는 거리행진(시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에필로그

마침 노희경의 <괜찮아 사랑이야>를 보면서 부모형제 어린시절의 환경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배웠던지라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 토마시의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랑 이야기가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단순히 네 사람의 복잡하고 미묘한 사랑타령만 한 게 아니라 당시 억압받던 공산주의 체제에 순응하기보다 저항하고자했던 지성인의 고뇌가 담겨 있어서 더 흥미롭게 읽었다. 결론적으로 사랑에 대한 것과 공산주의 자본주의에 대한 깊이감이 쩐다, 정도의 한문장으로 정리하면 되려나?



1부 가벼움과 무거움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다음 생에도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고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강제로 내쫓긴다면 동료 의사 모두가 사표를 던질 거라는 점을 넌지시 암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무도 사표를 쓸 생각을 하지 않았고 얼마 후 토마시는 병원을 더나야만 했다.
사실 낮을 위한 책이 따로 있고 밤을 위한 책이 따로 있어.
(내게도 나만의 분류 방법이 있다. 여행갈 때 가지고 가면 좋을 책, 지하철에서 읽으면 좋을 책, 시끄러운 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읽기 좋은 책, 회사에서 몰래 읽기 좋은 책 등등등)
그 당시에 손님들 앞에서 바닥에 앉는 것은 자신이 자연스럽고 긴장이 풀렸으며 진보적이고 사회적이며 파리 스타일임을 의미했다.


그 당시에 종교는 공산주의의 박해를 받았고, 사람들 대부분은 교회를 피했다.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노인들 뿐이었는데 그들은 정권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오직 죽음만을 두려워했다.
토마시는 독일 속담을 되뇌었다. einmal ist keinmal.한번은 중요치 않다. 한번뿐인 것은 전혀 없었던 것과 같다. 한번만 산다는 것은 전혀 살지 않는다는것과 마찬가지다.



3부 이해받지 못한 말들  

프란츠는 강하다. 그러나 그의 힘은 오직 외부로만 향한다. 그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는 약하다. 프란츠의 허약함은 선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당신 힘을 가끔 내게 쓰지 않는 이유가 뭐야?
사랑한다는 것은 힘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이지
_프란츠와 사비나의 대화 중에서_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테레자는 파괴된 시청을 바라보았고, 이 광경에 불현듯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의 폐허를 과시하고, 자신의 추함에 자부심을 갖고, 소매를 걷어 흉하게 잘려 나간 손을 보이며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보아 달라고 강요하는 그 변태적 욕구.
애교란 약속과 보장없음 사이의 균형이다(중략) 달리 말하자면 모든 사람들은 그녀가 엄청나게 헤픈 여자라고 믿었다. 그리고 남자들은 약속된 것이라고 믿었던 것의 이행을 요구하다가 갑작스러운 저항에 부딪혔고 그들은 이를 테레자의 세련된 잔인성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었다.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번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부제가 그려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


5부 가벼움과 무거움  


소련 침공 이후의 세월은 매장의 시기였다.
범죄적 정치체제는 범죄자가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발견했다고 확신하는 광신자들이 만든 것이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라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중략) " 난 몰랐어! 그렇다고 믿었어." 라는 바로 그 말 속에 돌이킬 수 없는 그의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토마시는 한 가지 이상한 것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이 그에게 미소를 짓고, 모든 사람이 그가 철회서를 쓰기를 바라며 자기가 의견을 철회한다면 모든 살마이 기뻐할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비굴함의 인플레이션이 그들 자신의 행동도 평범한 것으로 만들며 그 실추된 명예를 돌려주기 때문에 즐거워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은 결코 포기하려 들지 않았던 명예에 각별한 특권이 여전히 유지되는 것을 보는데에 익숙했다.
인간에 대한 그의 뿌리 깊은 불신(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판단할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회의)이 그가 직업을 선택하는데 이미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당시에는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뢰감에 가득찬 환자들의 눈길이었다.
프란츠가 끼여있던 프랑스 지식인들은 따돌림을 당해 모욕감을 느꼈다. 캄보디아 대장정은 그들의 발상이었는데 감탄스러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미국인들이 주도권을 잡았을 뿐 아니라 한술 더 떠서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프랑스인이나 덴마크인이 있는지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중략) 결국 프랑스인들이 항의를 표현할 수 있는 길이라곤 영어밖에 없는 셈이었다. " 왜 이 회의에서 영어를 사용하는가? 여기에는 프랑스인도 있다."
세상의 무관심에도 캄보디아 대장정은 계속되었지만 대장정은 신경질적이고 과민해졌다. 어제는 미국의 베트남 점령에 반대하며 오늘은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반대하며, 어제는 이스라엘을 위해, 오늘은 팔레스타인을 위해 어제는 쿠바를 위해 내일은 쿠바에 반대하며 항상 미국에 대항하며 매번 학살에 반대하며 또한 매번 다른 학살을 지지하면서 유럽은 행진을 계속했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을 도와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어떤 시선을 받으며 살고 싶어 하는지에 따라 네 범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첫번째는 익명의 무수한 시선, 달리 말하자면 대중의 시선을 추구한다. (중략) 두번째 범주에는 다수의 친한 사람들의 시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속한다. 마리클로드와 그녀의 딸. (중략) 세번째 범주가 있는데 사랑하는 사람의 시선 속에서 사는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의 조건은 첫번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의 조건만큼이나 위험천만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이 감기면 무대는 칠흙에 빠질 것이다. 테레자와 토마시를 이런 사람들 속에 분류해야만 한다. 끝으로 아주 드문 네번째 범주가 있는데,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이들은 몽상가이다. 예를 들면 프란츠가 그렇다. 그가 캄보디아 국경까지 간 것은 오로지 사비나 때문이다. 버스가 태국의 도로에서 덜컹거릴 때 그는 그녀의 시선이 오랫동안 그에게 고정되었다고 느낀다. 토마시의 아들도 같은 범주에 속한다. 
부인에게는 남편의 장례식이 결국 그녀의 진정한 결혼식이었다.
자기 삶의 끝매듭, 모든 고통의 보상.
국가가 시골에 그 세력을 상실하는 것은 아무도 시골에 뿌리내리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땅 주인이 아니라 밭에서 일하는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부는 전원풍경이나 농사일에 아무런 애착도 없었고 잃는 것을 두려워할 만한 것도 갖지 못했다. 이러한 무관심 덕분에 시골은 상당한 자율성과 자유를 누렸다.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어머니가 모르는 마을 여자 중 하나였다면 아마도 그녀의 쾌활한 천박성이 테레자에게 호감을 불러일으켰을지도 모른다. 아! 어머니가 남이었다면! 어머니가 자기 얼굴 윤곽을 그대로 지녔으며 그녀로부터 자아를 탈취해 간 것에 대해 그녀는 어렸을 적부터 항상 수치심을 느꼈다.
그 시절 사람들은 체코 지식인에 대한 박해를 일종의 행복한 연대감을 가지고 받아들였다.


6부 대장정


토마시에게는 무엇이 남앗을까? 비문 하나. 그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원했다.
프란츠에게는 무엇이 남았을까? 비문하나. 오랜 방황끝의 귀환. 그리고 그다음도 또 계속될 것이다. 잊히기 전에 우리는 키치로 변할 것이다. 키치란 존재와 망각사이에 있는 환승역이다.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존재와 망각사이에 있는 그 무엇은 바로 키치다)




2. 정체성

정체성, 자긍심: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발생하기 어려운 감정

강신주의 <감정수업>이라는 책에는 48가지의 감정에 따른 문학작품이 하나씩 소개된다. 그 중 '자긍심' 챕터를 소개하는 부분에서 이 책이 언급됐다. 그래서 찾아보게 됐다. 평소 자긍심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되었기에. 


사랑하는 여인 샹탈을 위해 스토커로 변신한 장마르크

이 짧고 간결한 한문장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내용인 즉슨 어느날, 연상의 여자 상탈이 장마르크에게 고백하게 된다. 남자들이 더이상 나이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남자 장마르크는 미지의 스토커가 되어 연상의 연인 샹탈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나는 당신을 스파이처럼 따라다닙니다. 당신은, 너무 아릅답습니다"라고. 그런데 여기 이 여자 상탈. 왠지 일본작가가 쓴 <연애시대>의 하루를 어설프게 닮았다. 아이를 낳자마자 잃게 되고 자연스레 전남편과 이혼을 한 후, 정기적으로 그 죽은 아이의 무덤을 찾아가는 행위 등이 왠지 모르게 하루와 리히치로를 떠오르게 했다. 편지는 지적이며 점잖았고 조롱기나 장난기도없이 유혹이라기보다 차라리 숭배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편지로 인해 변화하는 두 사람의 관계. 장마르크의 편지는 그녀가 망각하고 있던 자신의 매력을 다시 비추었고, 결국 그녀에게 자긍심이란 가치를 부여해준다. 스토커로 위장한 장마르크와 샹탈. 이 두사람의 결론은 어땠을까? 글쎄, 적어도 아직까진 해피엔딩인듯하다.


편애하는 밑줄

그녀는 말했다.
"나는 더이상 당신으로부터 눈길을 떼지 않을거야. 쉴새없이 당신을 바라보겠어." 그리고 말을 멈춘 뒤 "내 눈이 깜박거리면 두려워, 내 시선이 꺼진 그 순간 당신 대신 뱀, 쥐, 다른 어떤 남자가 끼어들까하는 두려움." 하고 이었다. 그는 몸을 조금 일으켜 입술을 그녀에게 대려고 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당신을 보기만 할 거야." 그러더니 다시 말했다.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을거야. 매일밤마다." 
그가 불참했던 어떤 모임에서 모든 사람이 장마르크를 공격했고 그 때문에 얼마 후 그는 직장을 잃었다. 그 모임에 F가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장마르크를 감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오늘날 사람들이 맺고 있는 우정의 유일한 의미를 깨달았어. 우정이란 기억력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인간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과거를 기억하고 항상 지니고 다니는 것은 아마도 흔히 말하듯 자아의 총체성을 보존하기 위한 필요조건일 거야. 자아가 위축되지 않고 그 부피를 간직하기 위해서는 화분에 물을 주듯 추억에도 물을 주어야만 하고, 이 물 주기가 과거의 증인, 말하자면 친구들과 규칙적 접촉을 요구하는 거야. 그들은 우리의 거울, 우리의 기억인 셈이지.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다만 우리가 자아를 비춰볼 수 있도록 그들이 이따금 거울의 윤을 내 주는 것을 바랄 따음이지.
(장마르트) 다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할 때 그는 침묵했어.
그런데 문제는 내가 정당해야만 했어. 그는 자신의 침묵을 용기라고 생각했지.
심지어 그는 나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박해에 끼어들지 않았고 나에게 누가 될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고 자랑까지 했다더군. 그래서 그는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았았고 내가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를 만나지 않자 상처를 받았을거야. 그에게 중립 이상을 바란 것이 내 잘못이었어.
그가 악의에 차고 흉악한 분위기에서 어줍짢게 나를 변호하려 들었다면 그 자신도 따돌림, 갈등,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내가 어떻게 그에게 그런 것을 요구할 수 있겠어.
더구나 그는 내 친구였는데. 그랬다면 내 쪽이 우정을 저버린 거겠지.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예의에 벗어나는 것이지.
왜냐하면 과거의 알맹이가 빠져버린 우정은 오늘날에는 상호 존중의 계약, 한마디로 예절 계약으로 변질되었어. 그러니 친구에게 불편을 끼치거나 불쾌감을 줄 수 있는 것을 부탁하는 것은 결례인거야. 

(샹탈) 만약 당신이 증오의 대상이 되고 누명을 쓰고 사람들의 먹이가 된다면 당신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두 가지 반응을 기대할 수 있어. 어떤 사람들은 당신을 뜯어먹으려는 부류에 합류하러 갈 것이고 다른 쪽은 점잖게 못들은 척할거야. 물론 당신은 그들과 만나 대화할 수 있을테지. 점잖고 조심스러운 이러한 두번째 범주가 당신친구야. 현대적 의미에서 친구지. 장마르크, 이런 사실을 나는 진작에 알았지.  현대적 의미의 우정이라니. 이런 우정따윈 개나 줘 버리라지 ㅡ,.ㅡ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 날 순 없어
우리가 수줍어하며 우리 비밀을 감추려 한다면 그것은 비밀이 너무 개인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한심할 정도로 비개인적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혐오하는 것에 그토록 쉽게 적응하는 것이 과연 칭찬할 만한 일일까? 두얼굴을 갖는 것 그것이 정말 승리일까? 그는 광고업계 사람들이 어떤 이단자, 스파이, 위장한 적, 잠재적 테러리스트라는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녀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굳이 정치적 용어를 빌리자면 부역자다. 혐오하는 권력에 자신을 동화하지 않으면서 권력을 이용하고 권력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위해 일하고 어느 날 재판관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자기에겐 두 얼굴이 있다고 핑계를 댈 부역자.
자긍심이란 인간이 자기 자신과 자기의 활동능력을 고찰하는데서 생기는 기쁨이다. 스피노자, 에티카


느림

아직 읽기 전, update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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