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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Jun 05. 2020

신영복
(강의 & 담론)

제니퍼의 북리뷰





신영복 교수의 <강의>  중에서, 다시 보고 싶은 부분만, 용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서론

화두와 오래된 미래


유럽근대사의 구성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임에 비하여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중략)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교수가 인도 서북구 티베트 고원의 라다크에서 17년 동안 라다크 사람들의 삶을 기록한 책입니다. (중략) 미래로 가는 길은 오히려 오래된 과거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자연과의 조화와 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라다크의 오래된 삶의 방식에서 바로 오염과 낭비가 없는 비산업주의적 사회 발전의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전독법의 참여점

서양 근대 문명은 유럽 고대의 과학정신과 기독교의 결합이라는 것이지요. 서양문명은 이 두개의 축이 서로 모순되고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 결함이라는 것입니다. 과학과 종교가 모순된 구조라는 것이지요. 과학은 비종교적이며 종교 또한 비과학적입니다. 동양의 역사에는 과학과 종교의 모순이 없으며 동양 사회의 도덕적 구조는 기본적으로 인문주의적 가치가 중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관계 등 지극히 현실적이고 인문주의적 가치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고전 강독에서 확인해야할 부분입니다. (중략) 엄밀히 말해서 일면성을 띠지 않는 시각이나 관점은 없습니다. 모든 관점은 일정하게 당파서아을 띱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실천적 관점입니다. 동양학에 대한 관점은 바로 이 지점에 세우는 작업이야말로 실천적으로 대단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지점을 참여점 (entry point)으로 하는 고전 독법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전을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삶을 존중하고 길을 소중히 하고

다른 사람에게 모질게 해서는 안 되며 과거를 돌이켜보고 미래를 내다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란 뜻입니다. 현실주의란 한마디로 살아가는 일의 소박한 진실입니다. 서양에서는 철학을 Philosophy  라고 합니다. 지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智에 대한 愛입니다. 그에 비하여 동양의 道는 글자 그대로 길입니다. 도, 란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입니다.길은 우리 삶의 한복판에 있는 것입니다. 동양적 사고는 삶의 결과를 간추리고 정리한 경험 과학적 체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동양 사상이 윤리적 수준이라는 비판을 며치 못한다고 할 수 있지만 반면에 비종교적이며 과학과의 모순이 없습니다.



자연이 최고의 질서입니다.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봄여름에는 도끼와 낫을 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지 않고 촘촘한 그물로 하천에서 고기를 잡지 않는"(맹자) 것이지요. (중략) 바연은 최고의 질서입니다.


'인간'은 인간관계입니다

인성이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논어에 덕불고, 필유린이란 글귀가 있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는 뜻입니다. 덕성이 곧 인성입니다.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곳

21세기를 시작하면서 많은 미래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미래에 대한 객관적 전망이 아니라 자기 입장에서 각자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소망이 전망의 형식을 띠고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미래 담론은 대부분이 20세기의 지배 구조를 그대로 가져가겠다는 저의를 내면에 감추고 있습니다. 나는 21세기 담론은 그것이 진정한 새로운 담론이 되기 위해서는 근대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새로운 구성원리로 바꾸어내고자 하는 담론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중략) 고전을 재조명하는 작업은 어쩌면 오늘날처럼 속도가 요구되는 환경에서 너무나 한가롭고 우원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가 쌓아가고 있는 모순과 위기 구조는 근본 담론을 더욱 절실하게 요구하는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쁠수록 돌아가라는 금언이 있습니다. 길을 잘못 든 사람이 걸음을 재촉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詩와 言

기록은 무서운 규제장치입니다

중국에는 고대부터 사관에 좌우 2사가 있었는데 좌사는 왕의 언을 기록하고 우사는 행을 기록했습니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가 되었다고 합니다. 천자의 언행을 기록하는 이러한 전통은 매우 오래된 동양문화의 특징입니다. 사후의 지옥을 설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구속력이 있는 강한 장치 규제가 되고 있습니다. "죽백에 드리우다"라는 말은 청사에 길이 남는다는 뜻입니다. 자손대대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기는 것은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악명과 죄업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은 대단한 불명예요 수치가 아닐 수 없지요.


미래는 과거로부터 옵니다 

레닌은 [우리는 어떤 유산을 거부해야 하는가] 라는 저서에서 역사공부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계승할 것인지를 준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주장을 피력했지요. 고전 독법은 물론 역사를 재조명하는 것이지만 역사가 우리에게 요 구하는 것도 놓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떠한 시대나 어떠한 곳에서도 변함없이 관철되고 있는 인간과 사회의 근본적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나는 '무일'편이 효율성과 소비문화를 반성하는 화두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능력있고 편안한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들의 가치관을 반성하는 경구로 읽히기를 바랍니다. 노르웨이 어부들은 바다에서 잡은 정어리를 저장하는 탱크 속에 반드시 천적인 메기를 넣는 것이 관습이라고 합니다. 천적을 만난 불편함이 정어리를 살아 있게 한다는 것이지요. '무일'편은 생산하는 사람을 업신여기고 소비하는 사람을 우러러 보는 우리들의 사고는 과연 어디서 연유하고 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의 정체성이 그 사람의 고뇌와 무관한 소비행위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인지를 반성하는 관점에서 재조명되기를 바랍니다. (중략) 농본 문화에서 유목문화로 전환되는 과정이 현대라는 것이지요. 노인 퇴출은 그러한 전환기의 부수적인 현상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유목 문화에서는 과거의 경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동일한 공간에서 반복적으로 경험을 쌓아가는  문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단히 새로운 초원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농본 사회에 있어서 노인의 존재는 그 마을에 도서관이 하나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중략)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한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영원한 갈등 

감옥에서 만난 노선배들로부터 자주들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론은 좌경적으로 하고 실천은 우경적으로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좌경적이라는 의미는 비타협적인 원칙의 고수라고 할 수 있고, 우경적이라는 의미는 맑은 물에는 갓끈을 씻고 흐린 물에는 발을 씻는다는 현실주의와 대중노선을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낭만주의와 창조적 공간

중국 역사에서는 남과 북이 싸우면 언제나 남쪽이 집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물산이 풍부한 남방인들이 기질이 험난한 풍토에 단련된 북방의 강인하 기세를 당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싸움에 지는 것을 패배라고 하고 그것을 敗北라고 씁니다. 北에게 졌다고 쓰는 것이지요. 그런데 유일하게 남방이 북방을 물리친 정권이 바로 현대 중국입니다. 호남성 장사의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건설한 중화인민공화국이 이를테면 남방 정권입니다. 현재의 장쩌민과 후진타오는 물론 측근들 역시 소위 상해파로서 남방 출신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1972년 닉슨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이 <초사>를 선물했습니다. 마오쩌둥 사상이 남방적 낭만주의가 갖는 자유로움과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남방과 낭만주의의 창조적 정신 영역이 서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입니다. 현실에 매달리지 않고 현실의 건너편을 보는 거시적 시각과 대담함이 곧 낭만주의의 일면이 아닐까하는 생각입니다.


주역의 관계론

經과 傳 (지날 경, 전할 전, 경전)

중국의 역사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크게 구분합니다. 공자 이전 2500년과 공자 이후 2500년입니다. 공자 이전 2500년은 점복의 시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의 시기는 주역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의 시대입니다. 경은 원본 텍스트이고 전은 그것의 해설입니다. 예를 들어 <춘추좌씨전>이라는 책은 춘추라는 텍스트를 좌씨가 해설한 책이란 의미입니다. 주역의 경은 8괘, 64괘, 괘사, 효사의 네가지입니다. 괘와 효는 고대문자이며 괘사와 효사는 점을 친 기록이라고 합니다. 8괘를 소성괘라고 하고 이 소성괘를 두개씩 겹쳐서 만든 64개의 괘를 대성괘라고 합니다. 주역의 전은 괘사와 효사에 관한 10개의 해설문을 말합니다. 경에 달린 10개의 날개란 뜼으로 십익이라고 합니다. (중략)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라는 것이지요.


논어, 인간관계론의 보고

논어는 고자어록입니다. 노자에는 노자라는 인간이 보이지 않지만 논어에는 공자의 인간적 면모가 도처에 있습니다. 그것이 노자와 논어의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증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매일 세가지를 반성한다는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나 않았는지 반성한다는 것이지요. 나머지는 전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를 반성한다고 합니다.


스승이란 단지 정보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더구나 과거지사를 전하는 것만으로 스승이 될 수는 없지요. 스승이란 비판적 창조자여야하는 것이지요.


오늘날도 전문성을 강조하기는 막스베버와 다르지 않습니다. 전문성은 바로 효율성 논리이며 경쟁논리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효율과 경쟁을 강조하는 자본가는 전문성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전문화는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아래층에서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차를 전문적으로 모는 사람, 배의 노를 전문적으로 젓는 사람 등 전문성은 대체로 노예 신분에게 요구되는 직업윤리였습니다. 귀족은 전문가가 아니었습니다. 고전, 역사, 철학이라는 이성뿐만 아니라 시서화와 같은 감성에 이르기까지 두류 함양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요구되고 있는 전문성은 오로지 노동생산성과 관련된 자본의 논리입니다. 결코 인간적 논리가 못되는 것이지요.

사회의 본질에 대하여 수많은 논의가 있습니다만 나는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미인은 대체로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그 일익을 담당하려는 자세가 부족합니다. 소위 꽃으로 '존재'하려는 경향이 우세합니다. 미인이라는 자의식이 없는 사람이 열심히 일함으로써 자기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에 비해 매우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요. 존재론과 관계론의 차이입니다. (중략) '아름다움'이란 우리말의 듯은 '알만하다'는 숙지성을 의미합니다. '모름다움'의 반대가 아름다움입니다. 오래되고, 잘 아는 것이 아름답다는 뜻입니다.


논어의 화동론和同論은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 사회의 본질을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는 담론입니다. 화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고 관용과 공존의 논리입니다. 반면에 동同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획일적인 가치만을 용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배와 흡수합병의 논리입니다. 따라서 군자화이부동. 군자는 자기와 타자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타자를 지배하거나 자기와 동일한 것으로 흡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반대로 소인동이불화의 의미는 소인은 타자를 용납하지 않으며 지배하고 흡수하여 동화한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중략) 극우와 극좌는 통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극좌와 극우가 다 같이 동同의 논리에 기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화和의 논리는 자기와 다른 가치를 존중합니다. 타자를 흡수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를 강화하려는 존재론적 의지를 갖지 않습니다.


백범일지에는 상호불여신호 신호불여심호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얼굴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것으로 미모보다는 건강이 더 중요하고 건강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마음이 좋다는 것은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할 줄 안다는 뜻입니다. 배려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중략) 옛말에 쉰살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은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합니다. 그때까지 그가 맺어온 인간관계가 안전망이 되어 그의 노후를 책임진다는 것이지요.


학學하되 사思하지 않으면 어둡고 사하되 학하지 않으면 위태롭다. 경험과 실천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은 현장성입니다. 일반적으로 자신의 경험에서 이론을 이끌어내는 사람들 즉 대부분의 현장 활동가들은 대단히 완고합니다 자기 경험만을 고집합니다. 생산직 기술자들도 장인적인 자존심으로 자기 방식을 고집합니다.  따라서 경험주의를 주관주의라고 합니다.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함은 물론이며 동시에 특수한 곃엄에 매몰되지 않는 이론적 사고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공자는 이야기합니다. 배우면 완고하지 않게 됩니다. 學이 협소한 경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학이란 하나의 사물이나 하나의 현상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경험에 갇혀서 그것이 맺고 있는 관계성을 읽지 못할때 완고해지는 것입니다.


자기 공을 숨기고 겸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욕심이없어야 겸손할 수 이으며 욕심이 없어야 지혜가 밝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중략) 공과를 불문하고 아무리 교묘한 방법으로 그것을 치장하더라도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중립적이지 않으면 질서가 유지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나라 이름을 중국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중은 상하통야의 뜻입니다. 그것이 정치 질서입니다.



맹자의 의

오늘날 낙의 보편적 형식은 독락입니다. 여민락과 같이 여러사람이 함께 나눌 때의 편안함이나 연대의식은 결코 즐거운 것이 못 되지요.


일상생활의 크고 작은 실패에 직면하여 그 실패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는가 아니면 외부에서 찾는가의 차이는 대단히 큽니다.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젊은이들이 노인을 깍듯이 예우합니다. 노인이 타면 얼른 일어나 자리로 안내하고 노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지하철을 저 노인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라고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한 젊은이한테 물어보았지요. 이 지하철을 만든 이가 바로 저 노인들인데 왜 자리를 양보하지 않느냐고 물었지요. "자기가 월급 받으려고 만들었지 우리를 위해서 만든 것은 아니잖아요" 도대체 이러한 차이는 어디서 오는 걸까요? 모스크바의 지하철이건 서울의 지하철이건 젊은 이들이 만들지는 않았지요 노인들이 만든 것이 사실입니다. 똑같은 사실관계를 두고 모스크바의 젊은이의 서울의 젊은이가 판이한 대답을 하는 까닭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중략) 모스크바의 젊은이와는 판이한 우리나라 젊은이의 대답은 인간관계가 세대 간에 어떻게 단절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사회적 가치도 세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맹모보다는 한석봉의 어머니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지도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맹모처럼 공부하기에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자신이 몸소 모범을 보여줌으로써 본받게 했던 것이지요.


노자의 도와 자연 

자연이란 문명에 대한 야만의 개념이 아님은 물론이고 산천과 같은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노자의 자연은 천지인의 근원적 질서를 의미하는 가장 큰 범주의 개념입니다. 굳이 영어로 표현하자면   self-so 정도가 가장 가까운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리하게 하려는 자는 실패하게 마련이며 잡으려 하는 자는 잃어버린다는 것이 노자의 철학입니다.


노자 정치학의 압권이 바로 생선굽는 이야기입니다. 큰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작은 생선 굽듯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생선을 구울때 생선이 익을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집다가 부스러뜨리는  것이 우리들의 고질입니다.


물은 결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산이 가로막으면 멀리 돌아서 갑니다.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비켜갑니다. 곡류하기도 하고 할수割水 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깊은 분지를 만나면 그 큰 공간을 차곡차곡 남김없이 채운 다음 뒷물을 기다려 비로소 나아갑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기는 이유는 무엇보다 먼저 약한 사람이 그수에 있어서 다수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강자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그것은 그가 지배하는 약한 사람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강자의 힘은 그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 힘은 원래 약자의 것이지요.


나의 가까운 선배 중에 매우 조용한 분이 한 분 있습니다. (중략) 참석했을 경우에는 눈에 띄지 않고 결석했을 경우에는 그 자리가 큼직하게 텅 비어버리는 그런 분입니다. 아마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서 이것저것 꼭 필요한 일들을 거두거나 거들었기 때문이라고 짐작됩니다. 노자의 무를 연상케 하는 품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작은 일에 매달리고 그  곧음을 겉으로 드러내게 마련이지요. 어떤 분야든 최고단계는 특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으며, 좁은 틀을 시원하게 벗어나 있게 마련이지요.



장자의 소요

우물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한곳에 모여살기 때문이다. 메뚜기에는 얾음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한 철에 매여 살기 때문이다.


결론을 먼저 이야기한다면 혹시 나 자신도 우물 속에 있는 것은 아닌가를 반성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과제입니다. (중략) 우리들이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는 것이 모든 실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중략) 장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물의 필연성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즉 도의 깨달음이 아니라 그것과의 합일입니다. 도의 이치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합일하여 소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빈배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소요유입니다 빈배는 목적지가 있을리 없습니다. 어디에 도달하기 위한 보행이 아닙니다. 삶이란 그자체로서 최고의 것입니다.


남는 것은 경기의 승패가 아니라 동료들의 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할 것이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우물'입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갇혀있는 우물에서 벗어나야 함은 물론이며 나아가 우리 시대가 집단적으로 갇혀 있는 거대한 이데올로기 체계를 깨뜨려야 하는 것입니다. (중략) 자본주의에 대한 의식의 변혁없이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투쟁은 사상 투쟁에서 시작한다고 하는 것이지요.



묵자의 겸애와 반전평화

墨이란 우리말로 먹입니다만, 목자의 묵은 죄인의 이마에 먹으로 자자하는 묵형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가란 형벌을 받은 죄인들의 집단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이 설령  형벌과 죄인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단지 검은색을 의미한다고 하더라도 검은색은 노역과 노동주의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검은 노동복을 입고 전쟁을 반대하고 허례와 허식을 배격하며 근로와 절용을 주장하는 하층민이나 공인들의 집단이 묵가라는 것입니다.


묵자는 혼란의 궁극적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묵가에는 엄격한 조직규율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말은 믿을 수 있고 그행동은 반드시 결과가 있으며 한번 승낙하면 반드시 성실하게 이행하고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람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뛰어드는 것이 묵가의 조직 규율입니다.


순자, 유가와 법가 사이

일반적으로 유학은 객관파와 주관파로 나누어집니다. 사회질서와 제도를 강조하는 순자 계통이 객관파, 개인의 행위를 천리에 합치시키고자 하는 도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맹자 계통이 주관파로 분류됩니다. 순자는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합니다. 바로 이점에서 덕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는 주관파와 분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중략) 순자의 사상 영역도 물론 광범위합니다만 우리가 주목하려는 것은 그의 법제사상과 성악설입니다. 순자가 유가학파로부터 배척당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그의 천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순자의 천은 물리적 천입니다. 순자의 하늘은 그냥 하늘일뿐입니다. 유가의 정통적 천인 도덕천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는 종교적인 천, 인격적인 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순자의 탁론입니다. 정통 유가와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 바로 순자의 천론이고 순자가 이단인 이유가 바로 천론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파는 결국 관점과 강조점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야하는 것이지요.


음악이란 천하를 고르게 하는 것이며 화목하게 하는 것이며 사람의 정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그래서 선왕이 음악을 만든 것이다_악론 중에서. 순자가 악론을 전개한 이유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자는 법과 제도적 통제가 가져올 폐단을 경계했던 것이지요. 나아가 사회의 질서가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공감과 동의에 근거해야 한다는 점을 피력하고 있는 것이지요. 순자를 계승한 법가의 이론이 바로 이 점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가 단명할 수 밖에 없는 이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가와 천하통일

법가는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한 사상입니다. 법가는 부국강병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하고 최후의 6국을 통일했습니다. (중략) 우리가 법가 사상에서 적극적 의미로 읽어야 하는 것은 개혁성과 법치주의 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상에 비하여 분명한 차별성을 갖는 법가의 특징입니다.



강의를 마치며

우리의 고전 독법은 관계론의 관점에서 고전의 의미를 재조명하는 담론이었습니다. 이러한 담론을 통하여 우리가 발견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양적 삶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가치는 인성의 고양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人은 仁으로 나아가야 하고 仁은 德으로 나아가고 덕은 치국으로 나아가고 치국은 평천하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천하는 도와 합일되어 소요하는 체계입니다. 인성은 이웃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그 시대의 아픔을 주입함으로써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은 좋은 사회, 좋은 역사와 함께 만들어지는 것임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지요. 인성의 고양은 그런 뜻에서 바다로 가는여행이라고 할 수있지요. 바다로 가는 겸손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략) 바다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고전독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명의 독법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근대성을 반성하고 새로운 문명을 모색하는 문명사적 과제와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제 강의를 마치면서 새삼스럽게도 다시 가슴의 이야기를 꺼내는 까닭은 앞으로 시와 산문을 더 많이 읽으라는 부탁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시와 산문을 읽는 것은 바로 가슴을 따뜻하게 하고 가슴을 키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선조들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사철文史哲과 시서화詩書畵에 대한 교육을 병행해왔다는 이야기를 강의 초반에 나누었습니다. 이성 훈련과 감성 훈련을 병행했던 것이지요.  

물론 오늘날의 시서화가 그러한 정신을 옳게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서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그 정서적 측면을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몇 가지 부연해둡니다. 


첫째, 사상은 감성의 차원에서 모색되어야 합니다. 사상은 이성적 논리가 아니라 감성적 정서에 담겨야 하고 인격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성과 인격은 이를테면 사상의 최고 형태이기 때문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상은 그 형식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한 개인의 육화肉化된 사상이 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경우에도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법제적 정비 수준에 의하여 판단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회 성원들의 일상적 생활 속에서 매일매일 실현되는 삶의 형태로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사상은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것입니다. 단지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의 사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말이나 글로써 주장하는 것이 그 사람의 사상이 되지 못하는 까닭은 자기의 사상이 아닌 것도 얼마든지 주장하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 실천된 것만이 자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상의 존재 형식은 담론이 아니라 실천인 것입니다. 그리고 실천된 것은 검증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 담론의 구조가 아무리 논리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격으로서 육화된 것이 아니면 사상이라고 명명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책임이 따르는 실천의 형태가 사상의 현실적 존재 형태라고 하는 것이지요. 사상은 지붕 위에서 던지는 종이비행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상의 최고 형태는 감성의 형태로 '가슴'이 갈무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은 외계와의 관계에 있어서 일차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며 그런 점에서 사고思考 이전의 가장 정직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성적 대응은 사명감이나 정의감 같은 이성적 대응과는 달리,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이러한 정서와 감성을 기르는 것은 인성人性을 고양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 최후의 방법입니다. 말 잘하고 똑똑한 사람보다는 마음씨가 바르고 고운 사람이 참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와 산문을 읽어야 한다는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사상의 장場을 문사철의 장으로부터 시서화의 장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주장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시서화의 정신은 무엇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상상력은 작은 것을 작은 것으로 보지 않는 것입니다. 

작은 것은 큰 것이 단지 작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상상력입니다. 

하나의 사물이 맺고 있는 거대한 관계망을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상상력이며 그것이 바로 시서화의 정신입니다. 시서화로 대표되는 예술적 정서는 우리의 경직된 사고의 틀을 열어주고, 우리가 갇혀 있는 우물을 깨닫게 합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담론


신영복 교수의 담론 중에서, 다시 보고 싶은 부분만, 용약 정리한 내용입니다. 








제 1부. 고전에서 읽는 세계 인식


가장 먼 여행

우리가 일생 동안 하는 여행 중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 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낡은 생각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니체는 '철학은 망치로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갇혀 있는 완고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라는 뜻입니다. (중략) 우리의 강의는 가슴의 공존과 관용을 넘어 변화와 탈주로 이어질 것입니다. 존재로부터 관계로 나아가는 탈근대 담론에 관하여 논의할 것입니다. 당연히 '관계'가 강의의 중심 개념이 될 것입니다.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것입니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 뿐 창조 공간이 못됩니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습니다. 오리엔트에서 지중해의 그리스 로마 반도로, 다시 알프스 북부의 오지에서 바흐, 모차르트, 합스부르크 600년 문화가 꽃핍니다. 그리고 북쪽 바닷가의 네덜란드와 섬나라 영국으로 그 중심부가 이동합니다. 미국은 유럽의 식민지였습니다. 중국은 중심부가 변방으로 이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주입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서쪽 변방의 진나라가 통일했습니다. 글안과 몽고와 만주 등 변방의 역동성이 끊임없이 중심부에 주입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 의미는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 변방성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 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중심부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합니다.


사실과 진실

역사는 결코 과거사를 정직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략) 역사는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을 선별하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과거의 역사를 온당하게 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합니다. (중략) 언어와 개념 논리라는 것이 지극히 추상화된 그릇으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계를 담을 수 없음은 물론이고 방금 일별한 것처럼 문학,역사, 철학 역시 세계를 온당하게 서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문사철이라는 완고한 인식틀에 갇혀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틀을 깨뜨리는 것이 공부의 시작임은 물론입니다.


방랑하는 예술가

이론과 실천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중략) 우리의 삶에는 기존의 상황을 합리화하는 자위보다는 신랄한 자기비판이 더 필요합니다.(중략) 낭만은 불어  roman의 번역어입니다. '이야기'란 뜻입니다. 논리 체계를 갖추지 않은 서술 일반을 '로망' 이라고 합니다.


손때 묻은 그릇

안다는 것은 복잡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을 때, 다시 말하자면 시적인 틀에 담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은 점치는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주역이 점서이긴 합니다. 우리가 통틀어서 점이라고 하지만 상명점(相 命 占) 이 각각 다릅니다. 주역이 상, 명과는 다르지만 점치는 책입니다. 점이 지금 생각으로는 미신이지만 당시에는 과학이었습니다. 상은 관상 수상과 같이 운명 지어진 자신의 일생을 미리 보려는 것이며, 명은 사주팔자와 같이 자기가 타고난 천명, 운명을 읽으려는 것입니다. 상과 명이 이처럼 이미 결정된 운명을 미리 엿보려는 것임에 반하여 점은 '선택'과 '판단'에 관한 것입니다. 이미 결정된 운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판단이 어려울 때. 결정이 어려울 때 찾는 것이 점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인생이 있습니다. 각각 다른인생 행로를 걸어갑니다. 그러나 비슷한 인생 행로가 의외로 많습니다. 세상의 변화도 다르지 않습니다. 수많은 경로를 비슷한 것끼리 묶을 수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64개의 패턴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64괘 하나하나가 그러한 경로를 보여줍니다. 64괘가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것임은 물론입니다. 사계의 변화가 뚜렷한 농본 사회에서 오랫동안 축적된 경험 귀납적 사고가 주역이라고 합니다. 유목 사회는 계속해서 이동하기 때문에 과거 경험이 의미가 없습니다. 위(位), 비(比), 응(應), 중(中) 이라는 네가지 독법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주역에 담긴 관계론을 조명하는 데에 초점을 두겠습니다(요약하자면, '위'는 자리가 중요하다는 것. 예를 들어 득위. '70%의 자리' 가 득위의 비결이다.  자기 능력이 100이면 70의 역량을 요구하는 곳에 가는 게 득위. 반대로 70의 능력자가 100의 역량을 요구하는 자리에 가면 실위가 된다. '비'는 가까운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 '응'은 관계성의 폭을 넓게 보는 것,시공간적 확장, '중'은 관계성의 극대화 되는 자리로 가운데란 앞뒤 좌우로 많은 관계를 맺을수 있는 자리다)


주역은 세계에 대한 인식틀입니다. 윤리적인 교훈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다시 생각하면 세상에 완성이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실제로 완성 괘는 이 미완성 괘 앞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완성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어떤 국면의 완성일 뿐 궁극적인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독법만으로 주역을 이야기하는 것은 부족합니다, 주역에서 발견하는 최고의 관계론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마치겠습니다. 성찰, 겸손, 절제, 미완성, 변방입니다. '성찰'은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시각을 자기 외부에 두고 자기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고 뒤에 세우며 자기의 존재를 상대화하여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 배치하는 것 입니다. '절제'는 자기를 작게 가지는 것입니다. 주장을 자제하고 욕망을 자제하고 매사에 지나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딪힐 일이 없습니다. '미완성'은 목표보다는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소중하게 여기게 합니다. 완성이 없다면 남는 것은 과정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 네가지 덕목은 그것이 변방에 처할 때 최고가 됩니다. '변방'이 득위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이 네가지 덕목을 하나로 요약한다면 단연 '겸손'입니다. 겸손은 관계론의 최고 형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름자에 한일 자를 쓰는 사람은 대개 맏아들입니다. '뉘집 큰 아들이 징역 와 있구먼!'  이름을 말하면  노인들은 고암 선생의 경우처럼 '뉘 집 큰 아들' 로 생각합니다. 사람을 관계 속에 놓습니다. 이러한 노인들의 정서가 주역의 관계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톨레랑스에서 노마디즘으로

주나라가 기원전 1,100년경에 건국되었습니다. 

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770년부터 시작됩니다. 

건국 후 400년이 못되어 혼란기로 접어든 셈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사회경제적 의미의 시대 구분은 아닙니다. 

공자가 집필한 <춘추>라는 역사서가 기준입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사회경제사적으로는 철기시대입니다. 철기시대는 무기와 농기구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농업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 그 잉여 생산물이 상업과 수공업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토지 생산력이 높아지면 토지에 대한 관념이 변합니다. 이와같은 급격한 변화는 주나라의 종법 질서의 붕괴로 이어집니다. 주나라의 종법 질서란 천자의 맏아들은 천자가 되고, 둘째 아들은 제후가 되는 제도입니다. 마찬가지로 제후의 맏아들은 제후가 되고 둘째아들은 대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당시 72개국의 제후국은 혈연관계 입니다. 가족질서이면서 국가질서로 충효일체입니다. 제후국 연방제로 평화공존이 가능했지만 대를 거듭하면서 피는 묽어지고 봉토는 사유화되고 제후국들의 정치적 경제적 위상에 격차가 생기면서 침탈과 흡수합병이 시작됩니다. 同이라는 패권적 경영이 대세가 됩니다. 유가학파는 바로 이러한 패권경영에 반대하고 제후국 연방제라는 주나라 모델을 지지합니다. 그것이 화이부동(和而不同)입니다. (중략) 군자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지배하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지배하려고 하며 공존하지 못한다, 로 읽는 것이 옳습니다. (중략) 배울 것이 없는 상대란 없습니다. 문제는 배울 것이 없다는 폐쇄된 사고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열린 사고입니다.



군자는 본래 궁한 법이라네

공자는 비읍 출신입니다. 비읍은 비교적 자유로운 지역입니다. 국읍, 도읍은 도로와 건물이 절서정연하고 특히 위계질서가 엄격하지만 비읍은 그렇지 않습니다. 공동체 문화가 온존해 있는 자유로운 영역이었습니다. 이 비읍에서 공자가 무당의 사생아로 태어납니다. 야합으로 태어났다고 <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야합은 좋지 않은 의미로 쓰입니다. 당시는 양가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혼례를 야합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중략)공자는 仁이란 근자열원자래 (近者悅 遠者來) 라고 합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 기뻐하고 멀리있는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인이라고 했습니다. (중략)언젠가 어느 잡지사기자로부서 '내 인생의 한권의 책'을 질문 받았습니다. 난감했습니다. 결정적인 한권의 책이 내게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책이 없다고  하자니 오만하게 비칠 것 같았습니다. 궁리 끝에 세권을 준비했습니다. 논어, 자본론, 노자였습니다. 논어는 인간에 대한 담론이고 자본론은 자본주의 사회 구조에 대한 이론이고 노자는 자연에 대한 최대 담론이라고 했습니다.


점은 선이 되지 못하고

나는 맹자 엄마보다 한석봉 엄마가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환경만 바꿔 주는 것이 아니라 엄마 자신이 무언가를 직접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공부 환경도 중요하지만 엄마의 삶의 자세가 더 큰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모스크바 지하철에서는 노인이 탑승하자 청년들이 얼른 일어나서 자기 자리로 모셔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전철을 저 노인들이 건설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대학의 학생들은 다른 대답이었습니다. 노인들이 건설한 것은 맞지만 그것은 월급을 받기 위해서 일한 것이라는 대답이었습니다. 그것 역시 당연한 대답이지만 문제는 같은 사안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히는 이유입니다. 세대 간의 만남도 단절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우리가 고민해야 합니다. 자본주의의 역사적 존재 형태가 도시입니다. 본질은 상품교환 관계입니다. 얼굴없는 생산과 얼굴없는 소비가 상품교환이라는 형식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관계입니다. 얼굴없는 인간관계, 만남이 없는인간관계란 사실 관계없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유해 식품이 만들어질 수 있는 구조입니다. 우리 시대의 삶은 서로 만나서 선이 되지 못하고 있는 외단 점 입니다. 더구나 場을 이루지 못함은 물론입니다.



맹자의 민본사상은 정치사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여민락(與民樂)이 그 예입니다. 여민락은 백성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뜻입니다. 양혜왕이 못가에 서서 큰 기러기와 사슴들을 돌아보며 맹자에게 묻습니다. "현자(賢者)도  또한 이것을 즐거워합니까?" 맹자의 대답입니다. "현자라야 즐길 수 있습니다. 폭군이라면 즐기지 못합니다." 제선왕도 맹자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냥터가 40리 밖에 안되고 문왕은 70리나 되었는데 문왕은 인자한 임금이라고 하고, 왜 나는 나쁜 임금이라고 합니까?" 맹자의 대답입니다. "문왕은 사냥터를 개방하고 당신은 개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독락獨樂이 아니라 여러 사람고 함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여민락입니다. (여민락. 진정한 즐거움이란 독락이 아니라 여러사람과 함께하는 것이어야 한다며 맹자는 사냥터를 개방한 문왕을 인자한 임금이라 평했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북악산을 시민에게 개방한 사람. 그날 기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북악산의 도시공학적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도대체 얼마나 될까요? 이 산을 푹 떠서 뉴욕이나 파리에 내다 팔면 얼마를 받을까요? 이런 아름다운 공간을 대통령이 혼자 독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미안하고 안타까웠습니다. 이제 문화재청의 정성 어린 정비작업을 거쳐 대통령이 된 지 4년 만에 완전 개방하여 시민 여러분과 함께 오르게 되니 정말 기쁩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말이다.)

맹자의 사상과 인간을 알 수 있는 예화를 소개합니다. 활을 쏘아서 과녁에 적중시키지 못했을 때는 자기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고 부중不中, 적중하지 못한 원인을 자기한테서 찾아야 합니다. 유명한 반구저기 反求藷己입니다. 부중의 원인을 자기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잠들지 않는 강물

제자백가의 사상적 스펙트럼은 아주 넓습니다만 그것을 크게 두 부류로 대별한다면 노장老莊을 한편으로 하고, 나머지 모든 제자백가를 다른 한편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노장의 세계는 분명한 차별성을 보입니다.


근본적인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사소한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따라가기도 하고, 자기주장을 유보하기도 합니다. 근본적 원칙을 견지하는 사람이면 이처럼 유연할 수 있습니다. 원칙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오히려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원칙을 고집합니다. 자연은 하나의 가치, 일정한 형식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노자가 자연을 최고의 질서로 삼는 이유입니다. (중략) 획일적 형식이 없기 때문에 닳거나 다함이 없습니다, 자연이 그렇고 자연스럽다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침묵이 훨씬 더 많은 말을 합니다. (중략) 정치권력은 본질적으로 억압과 지배입니다.그렇기 때문에 모든 시대의 민중 정서는 반국가적입니다. (중략) 노자의 인문학적 독법은 '노자 같은 사람'을 찾는 것입니다.


노자가 강물을 최고의 선이라고 하는 이유는 세가지 입니다. 

첫째, 수선리만물水善利萬物입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기때문이며 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물이 곧 생명입니다. 둘째, 부쟁不爭입니다, 다투지 않기 때문입니다. 흐르느 물은 선두를 다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산이 가로막으면 돌아가고 큰 바위를 만나면 몸을 나누어 지나갑니다. 웅덩이를 만나면 다 채우고 난 다음 뒷물을 기다려 앞으로 나아갑니다. 절대로 무리하지 않습니다. 爭은 戰과 다릅니다. '전'은 한일축구 대항전처럼 적과 맞써서 싸우는 것이지만 '쟁'은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때 일어나는 갈등을 의미합니다. '전'은 피할 수 없지만 '쟁'은 방법의 문제이기때문에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합니다. 셋째, 처중인지소오處衆人之所惡입니다.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처하기 때문에 上善입니다. 싫어하는 곳이란 낮은 곳, 소외된 곳입니다. 물은 높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도와 물, 민초가 같은 개념입니다. 물은 궁극적으로 '바다'가 됩니다. 바다는 가장 큰 물입니다. (중략)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시내를 다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름이 바다입니다. 물은 하방연대 下方連帶의 교훈입니다.


우리나라 노동 운동은 대부분 노조 중심입니다. 노동운동의 쟁점 역시 주로 노동조건 개선입니다. 인간해방과 거리가 있습니다. 크게 보면 소작권과 소작료가 전부이던 중세의 소작쟁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조 조직율이 10%를 넘지 못합니다. 거기다 산별노조가 아닙니다. 연대론은 이처럼 취약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입니다. 하방연대의 의미는 대기업 노조는 중소기업 노조와 연대해야 하고,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와, 정규직은 비정규직과 연대해야 하고, 노동운동은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약한 운동 조직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더 진보적인 사람이 덜 진보적인 사람들과 연대하는 것도 포함됩니다. 연대는 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추종이고 영합일 분입니다. 연대는 물처럼 낮은 곳과 하는 것입니다 잠들지 않는 강물이 되어 바다에 이르는 것 입니다. 바다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끝으로 당부하고 싶은 것은 연대는 전략이 아니라 삶의 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산다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연대입니다. 

관계론의 실천적 버전이 연대입니다.


양복과 재봉틀

사람의 정체성은 노동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노동이란 표현이 어색하다면 삶이라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집, 자동차, 의상 등 명품으로 자기를 표현합니다. (중략) 사람을 알고나면 의상은 무력해집니다. 우리시대의 도시미학은 명품과 패션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고통과 방황이 얼마나 큰 것을 알려주는가에 대해서 우리 시대는 무지합니다.

장자는 사물에 대한 추찰력이 뛰어나고 박식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논쟁을 피했다고 합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무감어수無鑑於水는 내가 많이 소개하는 편입니다. 물에 비추어보지 마라는 뜻입니다. 

물은 옛날에 거울이었습니다. 물을 비추어 보면 얼굴만 보게 됩니다. 그렇게 때문에 감어인 鑑於人,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거울에 비추어 보면 외모만 보게 되지만,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비추어 보면 자기의 인간적 품성이 드러납니다. 무감어수의 원전이 묵자묵니다. (중략) 인간 묵자에 관해서도 소개가 필요합니다. <사기>에는 송나라 대부라는 짧은 기록이 있고, 전국시대 송나라 사람으로 본래 고죽군의 후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죽군은 백이와 숙제의 아버지입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고구려아ㅗ 고죽국이 같다고 했습니다. 이를 근거로 묵자 연구자들은 묵자가 우리 조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묵자학파의 차별성은 검소함과 비타협적 실천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그 말은 믿을 수 있고 그 행동은 반드시 결과를 만들어 내고, 한번 승낙하면 끝까지 약속을 지키며, 제 몸을 돌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헌신적이고 실천적인 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천하의 현학이었고 묵자를 따르는 도속들이 천하에 가득했습니다. (중략) 묵자학파는 백성들에게는 세가지 우환이 있다고 진단합니다. 굶주린 자가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떠는 자가 입지 못하며, 일하는 자가 쉬지 못한다고 진단했습니다. 현실인식 자체가 대단히 민중적입니다. (중략) 이러한 현실의 궁극적 원인은 바로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 묵자의 결론입니다. 따라서 근본적 해결방법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차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묵자의 겸애사상입니다.


어제의 토끼를 기다리며

수주대토 守株待兎. 송나라의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급하게 달려오던 토기가 나무 그루터기에 부딪혀 절경이사, 목이 부러져 죽었습니다. 그 이틑날 농부는 밭일은 하지 않고 또 토끼가 와서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수주대토.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고 앉아서 토끼를 기다린다는 우화입니다. 이 이야기는 어제 일어났던 일이 오늘도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제자백가를 풍자한 것입니다. 세사변 世事變, 세상은 부단히 변하는 법이니 행도 역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법가의 변화사관입니다. 이것이 법가와 제자백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법가는 실제로 전국시대를 통일했습니다. 그 사상의 현실 적합성이 검증된 학파입니다. 이 법가 사상을 집대성한 학자가 한비자입니다. 법가사상은 이후 모든 정치 구조의 핵심을 관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략) 겉으로는 유가이지만 실제로는 법가의 원리가 관철되고 있었습니다. 법가사상은 전국시대의 사상입니다. 전국시대는 춘추시대와 달리 주나라 천자의 존재감이 거의 사라진 시기입니다. 그만큼 제후국의 정치적 운신이 훨신 더 자유로워진 시기였고 일단 군주는 聖王일 필요없습니다.



제 2부. 인간 이해와 자기 성찰

사일이와 공일이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서 양치기 산티아고는 연금술의 기적을 믿고 찾아 나섭니다. 양 60마리와 가죽 물푸대 한개, 무화과 나무 밑에 깔고 잘 담요 한장, 그리고 책 한권이 전 재산입니다. 전 재산을 처분하고 바다를 건너서 이집트까지 고행을 계속합니다. 소설은 대가다운 환상과 역전을 적절하게 삽입하면서 고도의 치밀한 구성을 보여줍니다. 연금술이 결국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소설에서는 사막에서 금을 만들어 보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무화과나무 밑에서 모석 상자를 발견합니다. 그러나 <연금술사>가 독자에게 던지는 메세지는 손에 넣게 되는 금이 아닙니다. 그 긴 유랑의 매 순간이 바로 황금의 시간이라는 선언입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변화와 개조 역시 그 과정 자체가 최고의 가치입니다.


자신을 개조한다는 것이 기술자가 된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그것은 여러 가지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내가 기술자에 마음을 두는 것, 그 자체가 나의 콤플렉스 였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기술자보다는 일상적 언어와 정서를 바꾸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왕따를 벗어나고 말투가 바뀌고 인간적인 신뢰를 얻게 되기까지 참 많은 사건과 오랜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고용 관계란 금전적 보상 체계입니다. 그것이 만들어 내는 인간관계에 신뢰나 애정이 담기기는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교도소의 인간관계란 금전적 관계도 아니고 명령과 복종의 권력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인간적 바탕 위에서 만들어 내야 하는 일종의 예술입니다. 너무 잘 나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못나서도 안됩니다. 그사람의 인간성이 일상생활을 통해 검증되어야 합니다.


자기 변화는 최종적으로 인간관계로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중략)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바뀜으로써 변화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개인의 변화가 개인을 단위로 완성될 수는 없다느 ㄴ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기 변화는 옆 사람만큼의 변화 밖에 이룰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자기 변화의 질과 높이의 상한입니다.



비극미

美는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앎' 입니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움의 반대말은 '모름다움'이라고 술회합니다. 

비극이 미가 된다는 것은 비극이야말로 우리를 통절하게 깨닫게 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이란 뜻은 알다, 깨닫다 입니다.


재소자는 출소 전날 남아 있는 동료 재소자들과 악수하며 만기 인사를 합니다. 나는 20년 동안 수많은 만기자들을 떠나보냈습니다. 만기 인사를 나누고 나면 쟤는 1년 안에 들어온다, 두번 더 들어온다 예측을 하는데 오랜 수형 생활을 한 노인들의 예측은 거의 정확합니다. 나는 매번틀렸습니다. 나는 틀림없이 들어오지 않을 줄 알았찌만 노인들 말처럼 1년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노인들이 맞고 내가 틀리는 이유를 나중에야 알게 됩니다. 나는 사람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들은 사람만 보는 법이 없습니다. 그사람의 처지를 함께 봅니다.



위악과 위선

테러가 약자의 전쟁이라면, 전쟁의 강자의 테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현실은 '테러와의 전쟁' 이란 모순된 조어가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관계와 인식

객관 客觀은 뒤집으면 觀客이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잘 알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나를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A가 B를 잘 알기 위해서는 B가 A 를 잘 알아야 합니다. 잘 안다는 것은 서로 관계가 있어야 됩니다. 관계 없는 사람에게 자기를 정직하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중략) 관계가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애정이 있어야 합니다. 관계가 애정의 수준일 때 비로소 최고의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중략) 관계와 애정없이 인식은 없습니다. (중략) 모든 인식은 그 대상과 자기가 맺고 있는 관계를 발견해 내는 것에서부터. 즉 관계를 자각하고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나를 보다 좋은 사람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관계야말로 최고의 관계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라 하더라도 특정 계급에 갇히지 않고 장기적이고 독립적인 사유 공간이 필요합니다. 대학의 존재 이유입니다.


비와 우산

자부심은 고난을 견디게 합니다. 물질적 도움보다는 자부심을 갖게 하는 것이 더 큰 힘이 됩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증오의 대상

어느 감방이든 '싸가지 없는 사람'이 반드시 한명씩 있습니다.(중략)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그 싸가지 없는 사람이 사라져도 어느새 그런 사람이 또 생겨납니다. 다시 우리는 그 친구의 만기 날짜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나가면 또 생기고, 나가면 또 생기고....여러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그런 표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인 그에게 그마한 결함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우리가 처한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글씨와 사람

서양에는 캘리그래피, 펜맵십이란 개념이 있지만 그것을 서도書道와 비교하기는 어렵습니다. 서도의 미학이라는 것은 형식미에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입니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하여 '관계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획을 너무 위로 치켜 그었다고 해서 그것을 지우고 다시 쓸 수는 없습니다. 인생과 마찬각지입니다. 지우고 다시쓰거나 개치랗지 못하기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다음 획으로 그 실수를 만회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한 자가 잘못된 경우에는 그다음 자 또는 그 다음다음 자로 보완해야 합니다. 한 행은 그다음행으로 그리고 한 연은 그 옆의 연으로 조정하고 조화시켜 가야 합니다. 그런 고민을 끊임없이 하면서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얻게 되는 한폭의 글씨에는 실패와 사과와 감사 등 파란만장한 인생사가 담깁니다.



우엘바와 바라나시

수평적 인식을 마냥 확장하기보다는 수직적 인식으로 그것을 심화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 待人春風 持己秋霜. 봄바람과 가을서리. 

남을 대하기는 춘풍처럼 관대하고 반면에 자기를 갖기는 추상같이 엄격하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대채ㅔ로 반대로 합니다. 자기한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까다로운 잣대로 평가합니다. 

(중략)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불가피한 사정은 잘 알지 못합니다. 

반면에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세심한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습니다. 불가피했던 수많은 이유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꿰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는 추상같이 엄격하고 자기에게는 춘풍처럼 관대합니다. '대인춘풍 지기추상'이란 금언은 바로 이와 같은 자기중심적 관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변소 문 꽝 닫는 사람의 경우도 그 행위만으로 단정할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불가피한 사연이 있으리란 춘풍같은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반대로 자기는 자기 자신의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려는 생각을 단념해야 합니다. 구구절절 자기 사정 늘어놓는 사람 치고 썩 좋은 사람 별로 없습니다.


사람의 판단력에 끝까지 집요하게 끼어드는것이 콤플렉스입니다. 

콤플렉스는 합리적인 판단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중략) 콤플렉스는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발견하려고 합니다.


인간의 자유는 카르마를 제거하는 일입니다. 

부정적 집합의 표상을 카르마라고 합니다. 표상(Representation) 은 인간의 인식활동입니다. 

중세에는 마녀라는 집합표상이 있었습니다., 마녀라는 집합표상은 부정적이란 점에서 Karma입니다. 

이 카르마를 깨뜨리는 것이 달관입니다.



상품과 자본

핵심을 요약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알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모든 지식은 압골미 壓骨美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품의 인문학적 의미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합니다. 명품을 손에 넣었을 때 그 순간 열반에 든다고 합니다. 물론 소비를 통하여 행복감을 느낄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소비를 통하여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인간적 정체성은 소비보다는 생산을 통하여 형성됩니다.

에이즈를 비롯하여, AI, 에볼라에 이르기까지 신종 질병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질병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질병이 소위 '우울증' 입니다. 후기 근대사회의 질병입니다.

논어에 번지가 知에 대해 질문합니다. 공자의 대답은 놀랍게도 知人입니다. 사람을 아는 것이 知라는 답변입니다. 최고의 인문학입니다.



피라미드의 해체

압구정과 반구정. 伴과 押은 뜻이 같습니다. 벗한다는 뜻입니다. 압구정은 압구정동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세조때의 모신 한명회의 아호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또 지금은 정자인 압구정이 없습니다. 반구정은 황희 정승이 퇴은 하고 노후를 즐기던 정자입니다. (중략) 압구정이 현대 아파트 72동 옆에 유허지 임을 알리는 표석으로 남아있는데 비해서 황희 정승의 정자인 반구정은 지금도 임진강 갈매기들을 벗하며 여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도 대조적이고 두 정자의 남아 있는 모습도 대조적입니다.


황희정승이 세종조의 명상임에 반하여 한명회는 세조 쿠테타의 모신입니다.


사림과 훈구 세력이 싸워서 사림이 화를 당하는 걸 士禍라고 합니다.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로 개혁 사림이 몰락합니다. 개혁 세력이 결정적으로 좌절하게 되는 사화가 기묘사화입니다. 조광조로 대표되는 기묘사림의 몰락입니다. 흔히 기묘사림을 강경 좌파로 인식하기도 하지만 조광조는 오건 그룹이었다고 합니다.



약한 군주가 신하를 통제하는 방법이 당쟁입니다.



오늘 강의는 한명회와 황희정승을 비교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정도전을 많이 소개한 셈입니다. 역사서의 감동은 그속에서 만나는 사람으로부터 옵니다. 정도전과 함께 반드시 만나야 할 사람으로 忠武公이 있습니다. (중략) 파선된 왜선에 올라가서 인질로 잡혀 있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구출합니다. 가족이 죄다 몰살 당하고 왜선으로 끌려와서 왜장들의 노리개가 되고 있었습니다. (중략)  선조는 자신이 적자가 아니라는 콤플렉스가 매우강한 이해하기 어려운 임금입니다. 신의주까지 도망가서 압록강을 건너려고 내놓는 핑계까 가관입니다. 짐은 죽더라도 천자의 나라에서 죽고싶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왕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략) 충무공이 임금이었어야 하는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습니다.



떨리는 지남철

지행합일은 양명학의 중요한 덕목입니다. 먼저 알고 나중에 행하는 구도입니다. 양명학에서는 독서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아닙니다. 知와 行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품성을 한 가지만 말하라고 한다면 단연 '양심적인 사람'입니다. 양심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인간학일 뿐 아니라 그 시대와 그 사회를 아울러 포용하는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양심적인 사람이 가장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의 얼굴

나는 '나의 정체성'이란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겪은 일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한도시를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할 때마다 그의 서울에 대한 증오를 떠올립니다. (중략) 적어도 그에게 서울이란 '열두 살의 의지할 곳 없는 어린 소녀를 10년 만에 창녀로 만드는 도시'였습니다. 이제 50가호로 이루어진 A,B마을을 예로 들기로 하겠습니다. 각각 열두살의 사고무친한 어린 소 녀를 투입하고 10년후 확인합니다. A마을에서는 여자고등학교 졸업 후에 농협 직원으로 다니고 있는 데 비하여 B마을에서는 술집 창녀로 변해 있다면 A,B 두 마을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납니다.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

석과불식은 "씨 과일은 먹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가지 끝에 마지막 남은 감은 씨로 받아서 심는 것입니다.

논어의 사십불혹을 나이 마흔이 되면 의혹이 없어진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올바른 독법이 못됩니다. 나이 마흔에 모든 의혹이 다 없어질 만큼 현명한 사람은 없스니다. 이 경우의 惑은 의혹疑惑이 아니라 미혹迷惑이고 환상幻想입니다.


여러분과 공유하고 싶은 것은 거름하고 키우고 기다리는 일을 불필요하고 불편하게 여기는 우리들이 정작 잃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사람을 거름하기는 커녕 도리어 사람으로 거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해고와 구조 조정 그리고 비정규직이 바로 사람으로 사람을 거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광우병의 발병원인은 소에게 소를 먹여서 키웠기 때문입니다. (중략) 사람을 키우는 일이야말로 그 사회를 인간적인 사회로 만드는 일입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입니다.



네덜란드 의사이며 작가인 반 에덴의 동화 <어린 요한>의 버섯 이야기 입니다.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갑니다. 산책로 길섶에 버섯 군락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버섯 중의 하나를 지팡이로 가리키면서 "얘야. 이것은 독버섯이야"하고 가르쳐줍니다. 독버섯이라고 지목된 버섯이 충격을 받고 쓰러집니다. 옆에 있던 친구가 그를 위로합니다. 그러나 친구의 위로는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위로하다 위로하다 최후로 친구가 하는 말이 "그건 사람들이 하는 말이야!" 였습니다. 아마 이 말이 동화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기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독버섯'은 사람들의 '식탁의 논리'입니다. 버섯을 식용하는 사람들의 논리입니다. 버섯은 모름지기 '버섯의 이유'로 판단해야 합니다. '자기의 이유' 이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자부심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유를 가지고 있는 한 아무리 멀고 힘든 여정이라 하더라도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自己의 理由를 줄이면 自由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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