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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 헤드헌터 Aug 21. 2020

보통의 존재



모든 경험은 의미가 있다. 아무리 고통스러웠을지라도.

그때 넷째언니가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렵다면서 아무 이유없이 불안해하며 쓰러졌을 때, 내 세상은 멈추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언니의 회복과 함께 다시 평온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석원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른다. '언니네 이발관'과 그의 노래 '아름다운 것'을 엄석대가 처음 들려줬을 때 '곡은 좋다만 노래 참 못하는 가수네', 라는 생각만 했었을 뿐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몇년전 우연히 집앞 알라딘에 들렀다가 그의 책을 읽게됐다.


자식을 억압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강요했던 엄마 때문에 신경정신과 약을 먹고 폐쇄병동에 입원했었다는 기록이 책에 담담히 적혀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비로소 그가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통을 지나온, 혹은 고통에 처한 모든 이들을 존경한다.



편애하는 밑줄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만약 내가 직접 고를 수 있었다면 나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 몸, 내 키, 내 머리와 재능, 우리집, 내 나라, 그 어떤 것도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겁니다.

(중략)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뿐. 그러나 그 불공평함이 결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게임의 승부는 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렸을 때 우리집은 왜 그럴까,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았을까 하는 고민을 저처럼 많이 한 사람들은 승부에서 꽤나 뒤처진 셈이 되겠지요.

많은 연인들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연애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씁쓸하지만 헤어짐이 쉬어진 대신 이제는 헤어짐조차 영원하지 않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요? 오늘날 이별 뒤의 사랑은 이렇게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아닌 담담함으로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마음이란 뭐든 떠나게 된 후라야 관대해지는 것인가보다. 그동안 살던 곳에서도 층간 소음이며 사용법이 복잡한 보일러 때문에 꽤나 불편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이사가 결정되고 나자 갑자기 집이 너무나 아늑하고 편안하게만 느껴지는 거다.


누군가와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야.

자유를 포기해야 결혼을 할 수 있고

동물의 본능을 거세해야 사람과 살 수 있고

자식과 부모 둘 중 어느 하나는 불편과 희생을 감수해야만 동거가 가능한 것 처럼. 그때 고양이라는 생물에게 발톱이 갖는 의미를 조금이라도 헤아렸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모르겠어.


진정으로 굳은 결속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거에요. 나 자신을 위해서.


사랑하자는 건 헤어지자는 거지, 안그래?

너와 내가 사랑만 안 하면 평생을 볼 수 있는데 뭣 때문에 사랑을해서 일이년밖에 안봐야 해?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관계의 깊이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_보통의 존재, 중에서_



2010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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